• 온바오 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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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뤄구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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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 10-84043217
1234
    현지어
  • 南锣鼓巷
  • nán luó gǔ xiàng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베이징 베이징 둥청구 南锣鼓巷61号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953.4km
난뤄구샹은 베이징 둥청구(东城区, 동성구)의 아주 오래된 거리 중 하나로 너비가 그리 넓지 않으며, 원나라 대도(大都)의 당시 거리 및 후퉁(胡同, 골목)을 여전히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원나라 시대의 대도성(大都城)은 50여 개의 골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난뤄구샹은 그 중 "자오후이팡(昭回坊, 소회방)"과 "징궁팡(靖恭坊, 정공방)"의 분계점에 위치해 있었다. 명나라 시대의 베이징은 28개 골목으로 나뉘어진 가운데 "자오후이(昭回, 소희)"와 "징궁(靖恭, 정공)" 2개 골목이 합병되면서 "자오후이징궁팡(昭回靖恭坊, 소희정공방)"으로 불리게 되었고, 난뤄구샹은 바로 이 골복의 남북 중심축에 위치하게 되면서 "뤄궈샹(罗锅巷, 라과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명칭은 원나라 시대 때부터 이어져왔다는 설도 있다.

건륭(乾隆) 15년(1750)에 그려져 제작된 <경성전도(京城全图)>에는 명조의 뤄궈샹이 난뤄구샹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구러우둥다제(鼓楼东大街, 고루동대가) 중간 구간 도로 북쪽과 마주보고 있는 난뤄구샹 거리를 "베이뤄구샹(北锣鼓巷, 북라고항)"이라 불렀다. 베이뤄구샹은 원나라 시대의 "링춘팡(灵椿坊, 령춘방)"과 "진타이팡(金台坊, 금대방)"의 분계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명나라 시대 때도 동일했다. 원나라 시대 때 이 골목들의 남반부는 대부분이 관청과 사원이었으며, 명조로 바뀌고 나서도 큰 변동은 없었다.

청나라 초기의 난, 베이뤄구샹은 거의 황색 깃발로 채워지졌으며, 청나라 조정에서는 베이징을 병사, 평민의 성 거주지를 나눴으며, 팔기병(八旗兵)은 내성(内城)에, 한족 등은 외성에 거주케 했다. 난, 베이뤄구샹의 명칭은 건륭(乾隆) 15년에 정해졌으며, 당시는 청나라 초기였다.

청나라 초기부터 1930~40년대까지 난뤄구샹 내부의 10개가 넘는 골목 중에서 만족(满族) 양황기[청나라의 행정 단위로 이에 정황(正黃) / 양황(镶黄) / 정홍(正紅) / 양홍 / 정백(正白) / 양백 / 정남(正藍) / 양남에 팔기(八旗)를 배치] 주민들에 의해 점차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대부호 세가를 비롯해 적지 않은 가난한 시민들도 있었지만 주민들은 점차 이 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난뤄구샹 내부의 소규모 상업자들 역시 성업하기 시작해 곡물상점, 채소점, 기름상점, 돼지고기점, 양고기점, 칼국수집, 떡집, 잡화상점, 과자가게, 두부집, 건축자재소, 거적떼기집, 천막집, 철물점, 가마집, 장의사집, 병원, 약국, 도배집, 이발소, 옷가게, 신발가게, 문구점, 찻집, 전당포 등 다양한 상점들이 있다.

비록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30여 종류의 상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으며, 비교적 큰 상호의 비단가게, 찻집, 음식점, 보석가게 등은 디안먼와이다제(地安门外大街, 지안문외대가), 구러우(鼓楼, 고루)에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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