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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산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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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山海关
  • shān hǎi guān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허베이 친황다오 산하이관구 长城西路1号 老龙头景区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677.2km
◆ 1780년 7 월 23일

◆ 연암은 1780년 7월23일, 드디어 입관(入關)했다. 입관이라 하니 좀 거북하지만, 산해관을 통관했다는 얘기다. 중국 사람에게 ‘입관’은 큰 의미를 지녔다. 저 관문 밖은 이지(夷地), 곧 오랑캐의 땅이요, 관문 안은 중화(中華)의 땅인 것이다. 그건 단순히 지리적 경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민족의 계선이자 영토의 계선이고, 문화의 계선이었다.

◆ 만리장성의 기점인 산해관에서 연암은 온갖 회포를 풀었다. 단숨에 ‘강녀사당기(姜女廟記)’ ‘장수대기(將臺記)’ ‘산해관기(山海關記)’ 세 편의 산문을 남겼다. 앞에서 심심찮게 들먹였던 역사나 전쟁의 화두가 이 세 편 글에 골고루 등장한다.

◆ ‘강녀사당기’는 열녀의 화석담(化石譚)이다. 만리장성을 쌓으러 갔던 남편이 죽자 손수 옷을 짓고, 천리를 걸어 그 유체를 찾다가 울며불며 돌이 됐다는 애절한 이야기다. ‘장수대기’는 산해관 밖 장수대의 험준하고 돌올한 외관을 그림으로써 장수의 위엄을 상징했지만 그 까마득한 층층대에 올라 벌벌 떠는 사람을 보고, 올라갈 때는 남에게 뒤질세라 올라가지만 높은 자리에 서면 외롭고 위태로울 뿐 아니라 물러설 한 치의 자리가 없는 낭떠러지에서 끝내 절망한다며 벼슬아치의 최후를 아프게 경고한다. ‘산해관기’는 점입가경이다. 산해관의 지리적 환경과 구조, 그리고 산해관 마을의 현황을 서술하지만 결론은 이제까지의 화두를 총결하는 섬뜩한 것이다.

◆ ‘오호라! 진(秦)나라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으려 했지만 진나라는 그 집안에 진나라를 망친 오랑캐를 길렀고, 서중산(徐中山) 또한 산해관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으려 했지만 오삼계라는 명나라 장수가 관문을 열어 청군을 맞기에 틈이 없었다. 천하가 지금처럼 평온할 적에 한갓 장사치나 나그네들의 힐난거리가 될 줄이야! 난들 산해관을 두고 무얼 말하랴!’

◆ 연암은 이처럼 만리의 성곽과 4층의 망루, 그리고 삼첨(三?)누각의 관문이 제아무리 웅장하고 강인해 오랑캐를 막고 오랑캐와 중국의 경계를 삼기에 넉넉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미필적인 방어용이란 담론을 펼친다.

◆ 연암은 요서회랑, 그 명·청 격전지를 조선의 필마로 달리면서 고뇌에 잠겼다. 전쟁을 처참하게 묘사하면서 명나라의 패망을 슬퍼했고, 조씨 일가 장수의 지략과 용맹을 물거품 또는 웃음거리로 보았다. 충렬을 추어올리면서 고독한 영웅과 벼슬아치를 희화화했고 심지어 만리장성 같은 성곽의 미필적 방어론도 슬며시 내밀었다. 여기서 실학자이면서도 성리학의 여운을 뿌리치지 못한 연암의 인격, 그리고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명나라를 섬기는 조선적 정서를 숨기지 못했다. [참조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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