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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정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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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0-6525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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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正阳门
  • zhèng yáng mén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베이징 베이징 둥청구 前门大街前门大街北端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953.0km
◆ 1780년 8월 1일

◆ 8월1일 북경의 정양문 앞에 발을 디딘 연암은 높이 솟은 패루와 누런 기와가 파도치는 구중궁궐과 맞닥뜨렸다. 단순 건축물이 아니었다. 이 땅에 붉은 모자와 말굽 모양 소매를 걸친 청인들이 정권을 창출한 지 어언 4대, 건륭(乾隆)이란 배를 띄운 지 45년, 그들은 18세기를 뒤흔들어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아니 청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실재 정권이요, 세계에 그 영향을 촉발하는 실세다. 비록 만주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이지만 중국의 21대 왕조 3000년의 역사에 당당히 몸을 꽂고, 그 유구한 역사공간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에는 필시 어떤 법술과 심법(心法)이 있을 것이라고 연암은 믿었다. 연암은 북경의 먼지 속을 다만 스치고 지나가는 한낱 과객이 아니었다.

◆ 연암은 조국의 조야하고 교조적인 성리학파들이 여태 고집하고 있는 복명(復明)의 실체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청나라의 실재와 실세에 대해 역사에 묻고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연암은 그 심법으로 ‘유정유일(惟精惟一)’을 들었다. 사전적으로는 ‘하나로(專一) 정진(精進)하다’의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풀이하면 일관성·통일성·불변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서경’의 ‘대우모(大禹謨)’편에서는 ‘오직 하나로 정진함에는 성실하게 중용을 잡을지어다’라고 했다.

◆ 일관과 통일, 불변의 원칙 운용에 있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그 전제로 삼은 것도 주의할 만하다. 연암은 ‘유정유일’의 심법을 성인의 역사에서 찾았다. 곧 요·순으로부터 홍수를 다스린 하우, 정전(井田)제도를 세운 주공, 학문을 편찬 정리한 공자, 이재(理財)를 밝힌 관중의 업적이 유정유일의 선례라 했다. 연암의 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 이전의 전설, 즉 무명의 성인이나 역사에서 왜곡되거나 역사의 비판을 받은 그 모든 실재의 역사와 심지어 모방된 역사까지 일관된 역사, 통일된 역사로 간주했다. 매우 섬뜩한 실학자의 사안(史眼)이다.

◆ 연암은 문자가 창조되기 전에 중국 역사의 기초를 다지고 수정한 무명의 성인들의 심력과 총기를 기억하길 바랐다. 그뿐만 아니다. 심술(心術)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서 우인(愚人)으로 지목된 이가 있다. 연암은 그들이 음탕한 마음과 영리한 기교로 재앙의 두목이 되고 우부(愚夫)의 탈을 썼지만 천지를 뒤흔들 만한 업적으로 천하를 통일했음을 환기시켰다. 바로 옥과 구슬로 궁궐을 지은 걸, 주를 비롯 만리장성을 쌓은 몽염, 천하에 곧은 길을 닦은 진시황, 천하의 법과 제도를 통일시킨 상앙 등을 그 예로 들었다.

◆ 또 한 가지 있다. 역사의 모사력(模寫力)이다. 춘추 때 육국(六國)은 걸과 주를 욕하면서도 그들의 경궁요대(瓊宮瑤臺)를 모방하다 장화대(章華臺)와 황금대를 지었고, 진시황의 아방궁은 장화대와 황금대의 윤곽을 모사했다. 그리고 한(漢)나라의 미앙궁(未央宮)은 아방궁의 재판이다. 그것들이 어느 날 잿더미가 되건만 계속 되풀이했고, 공사할 때는 짐짓 모르는 척하다가 뒷날에야 고래고래 꾸짖는 버릇마저 되풀이했다. 연암의 ‘열하일기’ 기록과 일치한다. 특히 연암이 보았던 이태백의 편액이 지금도 걸려 있다.

◆ 결국 정양문에서 구중궁궐과 그에 비해 개미처럼 미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다볼 때, 황성은 비록 우부나 화수(禍首)의 불명예를 둘러썼지만 그 역량과 재주, 지혜가 진천동지할 만한 철권의 정치와 역사의 모사력의 결합체라고 연암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역사는 굳이 성인의 가르침대로 선행의 집단에 의해서만 계승되는 것이 아니었다. 화하(華夏)의 민족이 아닌 이적(夷狄)이라도 요·순의 도를 이어받고, 후세 제왕의 학문이 성인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 역량과 재지를 다한다면 3000여 년 중국 역사의 연장선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 말하자면 걸, 주, 몽염, 진시황, 상앙 등의 제도 통일력도 유정유일의 방법에 지나지 않다고 긍정했다.

◆ 거기다가 성인은 일찍이 도(度), 양(量), 형(衡)을 규제해 역사를 통일했다. 둥근 것은 그림쇠에, 모난 것은 곡척에, 곧은 것은 먹줄에 맞도록 각각 규제했다. 꼼짝 못하게. 이런 법칙이면 천하를 한 수레바퀴처럼 몰고 갈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연암은 힘주어 말했다. “(그 법칙을) 천하에 적용하면 천하가 이를 지키고, 심지어 걸·주에 적용해도 걸·주가 지킬 수밖에.”

◆ 이는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일지라도 중국의 ‘유정유일’을 준수해서 오늘의 실체를 이뤘다는 긍정이며 동시에 청나라가 중국의 국통(國統)을 이었다는 연암의 선언인 셈이다. [참조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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