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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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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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771-9951
1234
    현지어
  • 덕수궁
  • Deoksugung (Palace)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5-1 (세종대로 99)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1km
반 천 년 광화문 연가 덕수궁 돌담길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조선조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이 덕수궁에서 일어났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 이른다. 덕수궁은 원래 그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 선조25)이 일어났다.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했고 한성의 궁궐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선조가 돌아와 머물 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궁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는 1593년 행궁에서 승하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행궁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해 이전하면서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했다. 후에는 계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西宮)이라 했다. 1623년에도 경운궁을 무대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인목대비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仁祖)를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이다. 인조 역시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왕이 된 지 8일이 지나 창덕궁으로 다시 이거했고 그 후로는 별궁으로 점점 노쇠해갔다. 1773년 영조 49년에 선조를 회상하며 사배례(四拜禮)를 치른 적이 있지만 궁궐로서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종 때다. 고종은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 대사관에서 환궁할 때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향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인 경복궁을 뒤로하고 열강들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대한제국(1897)을 세웠고 경운궁도 다시 궁궐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도 잠시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일제의 탄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고, 2년 후인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가 이뤄졌다. 순종은 왕위에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이궁했고 고종이 기거하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했다. 덕수(德壽)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계승한 후 정종은 태조의 거처에 상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덕수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 후로는 상왕의 거처라는 의미를 가진 궁궐을 덕수궁이라 했다. 어떤 이유든 스스로 물러난 태조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서 내려온 고종의 처지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덕수궁 본래의 이름인 경운궁을 회복하자는 의견도 그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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