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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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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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동명왕릉
  • Tomb of King Tongmyong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아시아 북한 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 용산리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74.8km
북한의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에 위치한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으로, 1974년에 발굴 조사되었고, 1993년에 개건(改建)되었다.

전 동명왕릉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으로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제령산 서쪽 끝의 소나무가 우거진 구릉 위에 있다. 1974년에 발굴 조사되었고 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改建)되었다.

동명왕릉 뒤에는 온달장군묘를 비롯한 10여기의 고구려 무덤이 분포하고 있고, 앞에는 정릉사지(定陵寺址)가 있다. 왕릉은 2단의 돌기단 위에 사각추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기단식적석총으로 기단돌의 높이는 1.5m이고, 현재 남은 봉토의 높이는 6.5m인데, 원래의 기단은 2단 이상이고 봉토 또한 1m정도 더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명왕릉의 돌 윗면에는 턱을 지어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였다. 이 무덤은 고구려 무덤형식인 적석총과 석실봉토분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서, 돌무지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바뀌는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 주위에는 동명왕릉의 봉분 주위에는 기단에서 사방 5m 정도로 강자갈을 깐 묘역이 있다.

무덤의 내부는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서 널길(연도: 羨道)·앞방(전실: 前室)〕·널방(주실: 主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석실(石室)이다. 앞방 중앙에는 길이 235㎝ 정도의 널길이 달려 있다. 각 방의 사이에는 돌문을 달았다. 앞방은 바닥에 큰 돌을 깔았는데 널방보다 4㎝ 낮다. 벽은 150㎝×60㎝ 정도 크기의 다듬은 돌을 2단, 3단으로 쌓았다. 동서 양쪽벽 밑부분의 바닥과 같은 높이에 감(龕)이 있다. 널방은 정방형 평면에 꺾임천장 구조로 44개의 석재로 쌓고 그 사이는 석회로 메꾸었다. 벽체는 2단으로 쌓았다. 바닥에는 두께 17㎝와 25㎝ 되는 2장의 큰 화강암판돌을 깔았다. 그 밑에는 105㎝ 깊이까지 5층으로 삼화토와 숯층을 엇바꾸어 쌓아 배수장치를 하였다. 천장은 5계단으로 돌을 쌓아 올리고, 꼭대기를 큰 판돌로 덮었다. 벽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동쪽 벽의 일부와 천장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널방에는 고구려 벽화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풍속화나 사신도(四神圖)가 아닌 직경 12㎝의 연화문(蓮花文)을 벽면과 천장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4.2㎝)으로 약 640개(추정 복원) 정도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무덤 바로 앞 3만m나 되는 능사터에는 “능사(陵寺)”라고 새겨진 그릇과 기와들이 출토되었는데, 고구려에서 능은 왕의 무덤을 뜻하므로 이 절이 왕릉을 위해 지은 절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무덤의 규모와 사용된 석재, 벽화의 내용, 묘역 등을 함께 살펴볼 때 이는 왕의 무덤이 틀림없으며, 이것은 5세기 초인 427년에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 함께 옮겨 온 동명왕의 능인 것으로 단정할 수 있다는 것이 북한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고분과 길림성(吉林省) 환인현(桓仁縣) 미창구(米倉溝)에서 발견된 장군묘(將軍墓) 사이에 규모, 사용 석재, 벽화주제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이다. 즉 장군묘의 퇴화형 앞방이 사라지고, 널방을 장식한 몇 가지 무늬들이 활짝 핀 연꽃으로 대체· 통일된다면, 전 동명왕릉을 미창구 장군묘의 발전형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 두 개의 무덤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장군묘와 같은 대형 석실분이 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갑작스럽게 환인에 조성된 것은, 고구려 왕실이 개입하였고 왕의 의도가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미창구장군묘 역시 시조왕릉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전호태,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