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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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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현지어
  • 庆兴郡
    분류
  • 기관/단체/종교 > 지방정부
    주소
  • 북한 함경북도 경흥군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621.4km
함경북도 북동부 두만강연안에 위치해 있는 군. 북부는 경원군, 서부는 회령시, 남부는 청진시 청암구역ㆍ나선시와 접해 있으며 동부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동북지방과 마주하고 있다. 남서(녹야리)~북동(신아산리) 간의 거리는 54km이고, 북서(안길리)~남동(철주리) 간의 거리는 20km이며, 면적은 940여 ㎢로서 도 전체면적의 5.92%를 차지한다. 현재 행정구역은 1읍 6구 10리로 되어 있으며 군 소재지는 경흥읍이다.

고려시기와 조선 초기, 경원군 지역과 함께 공주(孔州), 공성(孔城), 광주(匡州)라 하였는데, 모두 곰골 또는 검골의 이두식 표기로서 ‘검은골’이라는 뜻을 나타냈다. 이는 예로부터 이 지대에 석탄이 많아 땅의 빛깔이 검은 것과 관련된다. 한편 추성(楸城)이라고도 하였는데, 가래나무가 많은 것과 관련하여 가래나무 ‘추(楸)’자로 표기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조선왕조는 공성을 왕조의 조상과 연맥하여 ‘경사스럽고 흥성할 곳’이라는 의미에서 경흥이라 하였다. 1977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 가는 고장이라 하여 경흥군이라 개칭하였다.

경흥군 지역은 원시사회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주변에서 굴포문화로 특징지어지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많은 유적,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기』 등 옛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경흥군 지역에는 읍루, 숙신, 예맥, 말갈, 부여 등 부족국가가 있었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판도에 속하였다.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패망한 뒤 한때 당나라에 예속되었다가 신라문무왕 9년 발해국이 건립되면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소속되었다.

발해가 멸망해서부터 고려 말기까지 몇 세기에 걸쳐 경흥군 지역은 줄곧 이민족의 판도로 흥망을 거듭하였는바, 926년(태조 9년)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된 후에는 요나라에 예속되어 있었고, 1125년(인종 3년)에는 금나라의 속지로 되어 있었으며 1234년(고종 21년)에는 원나라의 지배 하에 있었다. 오랫동안 영역을 이곳에 미치지 못했던 고려는 1368년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패망한 틈을 타서 두만강 하류지역까지 판도를 확장하였으며 경흥군 지역은 지금의 경원군을 합쳐 1390년(공양왕 2년)에 동북면 공주(孔州)로 되었다.

1398년(태조 7년)에 북방의 행정구역을 분정할 때 공주를 경원(慶源)으로 개칭하고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다. 1409년(태종 9년)에 읍치를 고성에서 현재의 경원(경원군) 용당근처의 소다로(蘇多老) 책성(柵城)으로 옮겼다. 1410년(태종 10년) 2월 여진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4월에 치소를 경성(鏡城)으로 옮겼다. 1411년(태종 11년)에 경원진을 폐지하고 그 후 1417년(태종 17년)에 경원부를 현재의 부령군 부거(富居)로 복귀하여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435년(세종 17년)에 지난날 공주에 소속되어 있었던 현재의 경원군을 분리하여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하였고 1437년(세종 19년)에 공성현을 경흥군(慶興郡)으로 개칭하였다. 1443년(세종 25년)에 성을 확장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459년(세조 5년)에 읍치를 무안보로 옮겼다. 1476년(성종 7년) 아오지에 만호진을 설치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실시하면서 경성부 경흥군으로 되어 읍사(邑社), 무이사(撫夷社), 아오지사(阿吾地社), 신안사(新安社), 해정사(海汀社), 서수라사(西水羅社), 조산사(造山社) 등 7사를 두었고, 1년 후 다시 13도제를 실시하면서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되어 사를 폐지하고 읍면(邑面), 고면(古面), 신면(新面), 서면(西面), 노면(蘆面), 상면(上面), 하면(下面), 해면(海面), 신해면(新海面), 안화면(安和面) 등 10면을 개편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경흥군 읍면·신면·고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경흥면(慶興面)을, 경흥군의 고면, 노면의 각 일부와 신면을 병합하여 노서면(蘆西面)을, 경흥군 상면과 하면을 병합하여 상하면(上下面)을, 경흥군 해면과 노면 일부를 병합하여 웅기면(雄基面)을, 경흥군 신해면과 안화면을 병합하여 신안면(新安面)을 각각 신설하고 종성군 풍해사를 경흥군 풍해면(豊海面)으로 개편하여 6면을 관할하였다.

1936년에 웅기면을 읍으로 승격하였고, 신안면과 풍해면을 통합하여 나진부(羅津府)를 신설하여 관하에 1읍 3면을 두었으며, 1947년에 웅기읍이 다시 면으로 강등되면서 경원군의 유덕면(有德面)과 종성군의 화방면(華方面)을 흡수하여 경흥면, 상하면, 웅기면, 유덕면, 화방면, 노서면 등 6면을 관할하였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전 경흥군 아오지면(阿吾地面), 유덕면의 전체 리와 경흥면의 7개 리, 화방면의 4개 리, 경원군 아산면(阿山面)의 10개 리, 회령군 팔을면(八乙面)의 1개 리를 통합하여 경흥군을 구성하였는데, 아오지면의 신아오지리·농경리·신농경리·회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경흥읍(慶興邑)을 신설하고, 경흥면의 오봉리 일부와 아오지면의 아오지리·용연리를 병합하여 아오지리(阿吾地里)로, 아오지면의 송학리·삼봉리·명룡리를 병합하여 송학리(松鶴里)로, 경흥면의 경흥리·원정리를 병합하여 원정리(元汀里)로, 아산면의 아산리·산서리·백안리·신아산리를 병합하여 신아산리(新阿山里)로, 화방면의 화운리·녹야리를 병합하여 녹야리(鹿野里)로, 아오지면의 귀락리·송상리·회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귀락리(貴洛里)로, 화방면의 사탄리·금송리를 병합하여 금송리(金松里)로, 아산면의 백동리·하면리·송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동리(栢洞里)로, 아산면의 차동리·장평리·최치리·송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평리(長坪里)로, 유덕면의 죽기리·용막리·고사리를 병합하여 죽기리(竹基里)로, 경흥면의 하회리·은계리·청학리를 병합하여 하회리(下檜里)로, 유덕면의 가현리·창평리, 아오지면의 오봉리를 병합하여 오봉리(梧鳳里)로, 유덕면의 박상리·지경리·학동리를 병합하여 박상리(朴上里)로, 유덕면의 장안리·대동리·녹야리·소랑리를 병합하여 장안리(莊安里)로, 아오지면의 태양리·용성리를 병합하여 태양리(太陽里)로, 경흥면의 하여평리와 오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여평리(下汝坪里)로 각각 개편하였으며, 동시에 회령군 팔을면 용성리(龍城里)를 흡수하여 1읍 17리를 관할하였다.

1958년에 귀락리 일부 지역이 경흥읍에 흡수되었고, 1961년에 아오지리 일부가 분리되어 용연노동자구(龍淵勞動者區)가 신설되었고, 백동리가 장평리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용성리 전체가 녹야리에 편입되었고, 1965년에 오봉리가 노동자구로 승격되었으며, 1977년 9월 경흥군이 은덕군으로 개칭되면서 경흥읍도 은덕읍(恩德邑)으로 되었다.

1981년 6월에 아오지리가 학송리(鶴松里)로 개칭되고 같은 해 10월에 장안리가 안길리(安吉里)로 개칭되었으며 1983년 9월에 선봉군의 철주리가 은덕군에, 은덕군의 원정리, 하회리, 하여평리가 나진-선봉시 선봉군에 각각 편입되었다. 1987년에 송학리가 분리되어 명룡노동자구(明龍勞動者區)가 신설되었다. 1990년에 박상리가 양덕리(暘德里)로, 1991년 11월에 죽기리가 송산리(松山里)로 선후 개칭되었으며 1993년에 원정리, 하회리, 하여평리가 나진-선봉시 선봉군에 이관되면서 선봉군의 철주리(鐵柱里)가 은덕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12월에 은덕읍의 일부로 농경노동자구(農耕勞動者區)를 신설하였고, 귀락리의 일부가 은덕읍에 편입되는 동시에 은덕읍의 일부가 귀락리에 흡수되면서 귀락리가 노동자구로 승격되었으며, 학송리의 일부가 용연노동자구에 편입되었고 용연노동자구 일부가 학송리에 흡수되면서 학송리가 노동자구로 되었다. 2006년 현재 행정구역은 1읍(경흥읍), 6구(귀락노동자구, 농경노동자구, 용연노동자구, 명룡노동자구, 오봉노동자구, 학송노동자구), 10리(금송리, 녹야리, 송산리, 송학리, 신아산리, 안길리, 양덕리, 장평리, 철주리, 태양리)로 되어 있다. 경흥군 소재지는 경흥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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