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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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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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신계사
  • Singyesa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아시아 북한 북한 강원도 고성군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63.0km
신계사터(국보급 제95호).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외금강에 있는 절터. 금강산 4대절간의 하나였다. 519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십 차례 보수와 개건을 거듭하면서 내려왔다. 신계사는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주는 절간으로서 장안사와 표훈사, 유점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큰 절’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광복 후 신계사를 외금강박물관으로 구성하고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건축술과 유물들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난 6·25전쟁시기 폭격에 의하여 대부분 건물들이 소각되었으며 현재 당간지주와 3층탑만이 남아 있다. 조선 말기 신계사에는 대웅전과 만세루,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 최승전 등 15채의 건물과 3층탑, 당간지주 등이 있었다. 신계사는 대웅전과 만세루를 통하는 남북 중심축이 설정되고 뒤의 대웅전구역과 앞의 만세루구역으로 나누어 배치되어 있었다. 대웅전구역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에는 3층탑이 놓이고 동쪽에는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서쪽에는 나한전(영산전), 어실각이 일정한 사이를 두고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만세루구역에는 만세루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향로전과 부속건물이, 서쪽에는 최승전과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남북으로 중심축을 설정하고 좌우대칭으로 건물들을 놓는 것은 북한 절건축에서 이미 삼국시대부터 써 내려온 배치형식의 하나였다.

신계사의 기본 건물인 대웅전은 1597년에 다시 세운 것을 그 후 1887년에 대보수한 것이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12.45m), 측면 3칸(7.54m)이며 기둥 사이의 거리는 정면에서 가운데칸은 5m, 양쪽칸은 3.72m이고 측면에서는 다 같았다. 기둥은 보기 좋은 배흘림기둥이었다. 대웅전에서 특히 우수하게 해결된 것은 나무조각장식이었다. 두공은 바깥 9포, 안 13포로서 외금강의 유점사 능인보전의 두공과 함께 북한에서 가장 높이 짜 올린 것의 하나였다. 두공은 정면과 후면의 가운데칸에는 3개씩, 그 좌우 옆칸들에는 2개씩 놓여 있었고 측면에는 매 칸마다 1개씩 놓여 있었다. 바깥의 제공은 활짝 피어난 연꽃과 피기 시작하는 꽃봉오리를 서로 엇바꾸어가면서 짜올렸는데 그 솜씨가 매우 세련되고 섬세하였다.

건물 안의 두공에는 연꽃봉오리와 연잎 등을 새겨 만발한 연꽃송이들이 거꾸로 드리운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기둥 윗면에는 큰 용조각이 붙어 있었다. 기둥을 휘감은 용은 윗몸통을 액방에서 한번 다시 뒤틀어 불쑥 내밀었다가 평판방에 목을 붙이고 아랫몸통을 집안으로 뒤틀어 기둥에 서리서리 휘감은 모습이 매우 박력있게 보였다. 한 마리의 용을 안에서 틀어올려 기둥 위를 뚫고 밖으로 나오게 한 기발한 구도와 기교, 조각술은 당시 나무조각술의 수준을 잘 보여주었다.

9포의 두공으로 떠받든 합각지붕은 하늘을 향하여 가볍게 들리고 용마루, 박공마루, 추녀마루 등이 모두 완만하게 휘여 집이 한결 아름다워 보였다. 대웅전은 화려한 금단청을 입혀 눈부신데 비단무늬에 연꽃무늬, 인동덩굴무늬와 여러 가지 기하학적무늬, 구름무늬, 용무늬 등이 보기 좋게 배합되어 있었다. 특히 두공의 생김새에 맞게 연꽃봉오리와 잎사귀들을 서로 엇바꾸어가면서 그려놓은 것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두공사이벽에는 세련된 필치로 부처와 여러 가지 주제의 단청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신계사는 훌륭한 예술적 기교와 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의 하나였다.

신계사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연어의 산란철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개울을 메우면서 올라오는 연어떼를 잡았다고 한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견지에서 이것을 참을 수 없는 일로 여긴 어느 한 주지가 동해의 용왕에게 요청하여 연이어 여기까지 거슬러 오르지 못하게끔 지시를 떨구게 하였다. 그다음부터 신통히도 신계천에만 물고기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본래 새 ‘신(新)’자에 시내 ‘계(溪)’자로 쓰이던 ‘신계’가 귀신 ‘신(神)’자에 시내 ‘계(溪)’자로 변하게 되였다고 한다. 『금벽록』4천, 『신계사지』에는 본래 신계사는 귀신 ‘신(神)’자와 닭 ‘계(鷄)’자로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계사에 있던 한 중이 새벽마다 목욕을 하고서야 부처 앞에서 불공을 드리는 것이 너무도 정성스러워 이에 감동된 부처가 새벽이면 절의 남쪽 돌벽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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