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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동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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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혜화문(동소문)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28-5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5km
동소문으로 불리우는 성울성곽 4소문 중의 하나 속칭 동소문으로 불리는 이문은 서울성곽 4소문 중의 하나이다. 혜화동 로타리에서 동소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자리한 이 문은 동대문과 숙정문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문은 4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4대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왕조가 한양에 천도한 후 태조 5년(1396)에 서울성곽을 축조하고 성문을 낼 때에 혜화문은 홍화문(弘化門)이란 명칭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도성 동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조선 초 성종 14년(1483)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중종 6년(1511)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한편 조선 초에는 북방의 여진족 사신의 숙소가 동대문 옆(지금의 이화여대 부속병원 자리)에 북평관(北平館)이 있었습니다. 이들 사신이 서울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문루가 있어 위용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여진족이 세운 청(淸)나라 사신이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던 서대문으로 바뀌면서부터 혜화문의 관리는 소홀해져 문루(門樓)가 무너지고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영조는 왕 20년(1744)에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게 하고, 당시의 명필인 조강이(趙江履)로 하여금 『혜화문』이라고 쓴 현판을 새로 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의 문루의 천정에는 봉황(鳳凰)을 채색으로 그린 것이 특색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문 밖, 그러니까 지금의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일대에 참새 등이 많아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이 문은 순조 16년(1816)과 고종 6년(1869)에 보수하였는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일체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퇴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핑계와 건축물이 퇴색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1928년에 문루를 헐어 내었고, 1939년에는 을지로 4가~돈암동간의 전차(電車)를 부설하면서 돌로 된 아치 성문마저 헐어 버려 조 선왕조 5백년간 의연히 서 있던 혜화문은 자취를 잃고 혜화동, 동소문동이라는 동명(洞名)만 전해 왔습니다. 혜화문이 훼손된 지 55년만인 1994년, 서울시에서 혜화문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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