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6
  • 언어선택
부암동길과 부침바위
+
1234
    주소
  • 서울 종로구 부암동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1km
** 길이름 유래 : 창의문(자하문)에서 부암동으로 가는 길목에 높이 15미터쯤 되는 부침바위가 있었다. 부암동과 부암동길의 명칭은 모두 이 부침바위에서 유래되었다.

** 스토리 : 고려 1232년 무렵.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는 어수선했다. 고려는 몽골과 대적하기 위해 물을 무서워하는 몽골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삼별초의 난은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이동하며 몽골침략자들과 몽골에 굴복한 개경정부를 상대로 항쟁한 난이었으나 결국 조정은 몽골과 강화를 맺어 사대 국으로 모시기에 이르렀다.

젊은이들은 몽골에 끌려가 노역을 하거나 병사가 되기 일쑤였다. 이 중 갓 결혼해 첫날밤을 치른 새 신랑도 갑자기 몽골에 끌려가 버렸다.

외동아들을 잃은 노모는 며느리를 얻었다는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아들을 잃고 슬피 울다가 자리를 깔고 병석에 누웠다. 새댁은 초야를 치른 다음날 생과부가 되어 병든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기가 막힌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인왕산 기슭에 살던 새색시는 소복으로 갈아입고 매일 뒷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

“산 산령님, 바위님,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비나이다. 간절히 비오니 제발 몽골에 끌려간 저희 서방님을 제게 돌아오게 도와주소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절을 하며 두 손 모아 빌었다. 매일 새벽마다 며느리가 어디를 가는지 궁금하여 새댁의 뒤를 밟은 신랑의 노모는 며느리의 정성에 감복했다.

“아가야, 저기 저 고개 언덕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옛날부터 영험하게도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이 있으니 이왕이면 거기 가서 소원을 빌어보렴.”

부근 산은 멋진 바위가 많고 풍광이 아름다웠으며 산 아래 백사 계곡 줄기에는 흰 돌과 세도가들의 별장들이 많았다. 어디에나 흰 바위를 휘감는 맑은 계곡물이 넘치고 갖가지의 희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곳이었다. 사대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건만 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맑았다.

새댁은 노모가 알려주는 대로 신비의 바위를 찾아갔다. 2미터 높이의 둥글넓적한 바위는 언뜻 보면 거대한 거북이 형상 같기도 하였다. 표면에는 어른 머리통만한 큰 곰보 자국이 숭숭 패여 있었다. 새댁은 시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깨끗하고 납작한 돌을 주워서 바위에 대고 본인의 나이 수만큼 문지르며 남편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돌을 자기 나이만큼 문지른 뒤 손을 떼는 순간 그 돌이 바위에 들러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떨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라고 했다. 새댁은 진심을 다해 기도를 올리고 돌을 바위에 문지른 다음 손을 떼었다. 돌은 매번 바위에 달라붙지 않고 굴러 떨어졌다.

“바위님, 바위님. 아직 제 정성이 부족해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시는 건가요?”

새댁은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돌이 붙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합장하고 바위에 절을 한 뒤터덜터덜 돌아섰다. 힘 빠져 돌아온 며느리를 보며 시어머니도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몽골에 가서 아마도 죽었는가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돌이 붙지 않을 리가 있겠니?”

노모는 실망이 깊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들 따라 죽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새댁은 그럴수록 더 기도에 매달렸다. 노모도 살리고 남편도 찾기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를 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마다 샘물을 받아 목욕을 하고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산에 올라가 바위에 돌을 문대며 기도를 드렸다. 어찌나 정성으로 기도를 다니는지 그 동네 뿐 아니라 사대 문 안에까지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드디어 임금님 귀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돌이 바위에 붙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며 더욱 기도에 매진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몇 달 째 되던 어느 날. 그날도 새댁은 몸을 깨끗이 하고 소원을 빌며 바위에 돌을 문대고 손을 떼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돌이 바위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경사진 바위 표면에 매끄러운 돌이 붙어 있다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 바위님.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이지요? 그이를 돌아오게 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새댁은 정말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나 한 것처럼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녀는 혹 노모가 실망할 일이 생길까봐 돌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대문만 쳐다보며 남편을 기다렸다. 새벽에 돌이 붙었는데 그날 밤까지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긴 하루가 흘러갔다. 그녀는 다음날 새벽 또다시 기도를 가기 위해 우물가에서 옷을 벗은 다음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았다. 그때 누군가가 인기척을 내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당황한 채 옷으로 몸을 가리며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한 손으로는 젖은 긴 머리를 말아 올리고 한 손으로는 급히 옷을 걸쳤다.

“누구세요?”

새댁은 어두컴컴한 마당에 서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남편이 돌아온 것을 직감했다.

“서방님이세요? 정말 오신 거예요?”

새댁이 울먹이며 다가섰다. 미처 닦지 못한 몸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나요. 내가 돌아왔소.”

신랑은 눈앞에 온몸이 물에 젖은 채 떨고 서있는 새댁을 큰 가슴에 품었다.

“이 추운 날씨에 매일 이렇게 목욕을 하고 산으로 기도를 하러 간 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새댁은 입속으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삶을 포기하고 몸져누웠던 노모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알고 벌떡 일어나 맨발로 달려 나와 아들을 얼싸안았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느냐?”

노모가 아들의 손을 잡고 물었다.

“이 사람이 매일 새벽마다 뒷산에 있는 바위에 가서 기도를 한다는 소문이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갔답니다. 임금님은 저 사람의 정성을 갸륵히 여겨 몽골에 그 사정을 이야기하여 저를 집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노모는 며느리의 정성이 갸륵해서 아들이 돌아왔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신랑은 이미 새댁이 정성으로 그를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고 돌아온 것이었다. 아들의 노모는 온 동네에 소박하게나마 잔치를 베풀었다. 새신랑이 돌아온 것을 본 사람들은 바위의 영험함을 실감했다. 그 동네에서 몽골에 끌려간 사람이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장정들은 물론 시집 안 간 처녀들도 몽골로 마구 끌려가던 시대였으니 자식 잃은 부모들은 돌아온 새 신랑을 너무도 부러워했다. 바위의 영험함이 입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잃어버린 자식을 기다리거나 아들을 잉태하고픈 여인네들이 바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건강을 되찾은 노모는 이제 떡두꺼비 같은 손자 하나만 안겨 달라며 또 다시 뒷산 바위에 기도를 하러 다녔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돌이 붙는다하여 ‘붙임바위(부침바위로 변형, 이후부터 부침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신랑은 모든 것을 다 알았다. 바위가 기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아내의 정성이 기적을 만들었음을.

바위에 기도를 왔던 사람들은 그곳 경치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이 있었어? 사대문이 한 걸음밖에 안되는데 정말 여긴 별천지 같네.”

산 기도를 마치고 백사 골 계곡으로 내려가 매끄러운 흰 돌과 맑은 계곡을 돌아보고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다 돌아가곤 했다.

최근 어느 젊은 아낙이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도 자식을 얻지 못해 고민하던 차에 인터넷 검색에서 이 사실을 알고 부암동으로 찾아갔다. 병원에서는 부부가 다 이상이 없다는 데도 아이가 생기지를 않는 것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부침바위(붙임바위)에 가서 기도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물어물어 바위가 있는 장소를 찾아갔지만 그곳에서 이미 바위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실망한 나머지 그 근처를 더듬다가 ‘종로구 부암동 경로당’ 건물 전면에 안내표지판 하나를 발견했다. ‘부침바위가 있던 터’라는 표지판이었다. 멀리서 그곳까지 찾아갔던 아낙은 사라진 바위가 아쉬워 표지판 앞에 한없이 서 있다가 돌아섰다. 바위에 기도를 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노력해 보겠다는 마음을 굳히면서.

※부침바위는 1970년 자하문 길이 확장되면서 없어졌고 표지판만이 남았다. 몽골에 끌려간 새신랑을 기다리는 새댁이 공들인 바위였다는 전설을 근거로 있음직한 이야기를 지었다. 생명 없는 바위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질진대 인간이 인간에게 정성을 다한다면 이루지 못할 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4.1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