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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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시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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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주소
  •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0.9km
** 길이름 유래 :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골목으로, 근처에 남대문 시장이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스토리 : “황비서! 자동차 문 앞에 대기 시켜.”

또 시어머니 이순덕 여사의 쇼핑 병이 발작을 한 모양이다. 그녀는 시집 온 지 30년이 됐어도 여전히 비서 딱지를 떼지 못하고 산다. 올해로 90세인 시어머니의 기억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미쓰코시 백화점 문 열었지?”

“그럼요. 점심시간이 다 된걸요. 오늘은 또 무슨 쇼핑을 하시려고요?”

“흰 블라우스가 너무 낡았어. 흰 옷은 초라해서 일 년 이상은 못 입어. 이것 봐. 노루끼리 하잖아.”

“그러네요.”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입은 흰 블라우스를 만져본다. 아직 눈같이 희기만 한데 여사의 어두운 눈에는 노르스름하게 보인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백화점을 소유했던 전신 재벌 그룹과 같은 계열 회사의 대주주였던 남편 덕에 이순덕 여사는 언제든지 그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즐겼다. 그렇다고 공짜 쇼핑을 하는 것도 카드 쇼핑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은행에서 방금 발행된 빳빳한 신권으로 물건 값을 지불했는데 새 돈은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점원의 손에 건네주며 계산을 치렀다. 치매까지는 아니지만 연세가 높아져서 그런지 기억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부쩍 자주 쇼핑 나가기를 원했다. 쇼핑만 나가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 형제들을 비롯한 온 가족은 어머니가 원하면 얼마든지 쇼핑을 하도록 해드리라는 당부를 그녀에게 해왔다. 큰 쇼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블라우스, 머플러, 핸드백 정도인데 병원비보다는 싸게 먹힌다는 결론이었다.

황보영은 입사하자 곧바로 이순덕 여사의 비서로 임명을 받았다. 당시 이여사는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면접 심사에 참여했던 이순덕 여사가 그녀를 자신의 비서로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여사는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는 비상근 부회장이었기 때문에 황비서는 거의 사사로운 개인비서 역할을 담당했다. 자연스럽게 이여사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이여사의 은근한 권유에 덕을 입어 차남과 결혼을 했다. 이여사의 까다로운 성격에 2년을 변함없이 비서로 데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황비서의 성품이 얼마나 무던한지 짐작이 간다며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비서와 가정부를 거느리고 혼자 살던 이여사가 70세를 넘기면서 몸도 마음도 정신도 쇠약해지자 장남이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그 말에 이여사는 기어이 맏며느리보다는 자신의 비서였던 차남의 처와 살겠다고 우기며 황보영의 집으로 왔다. 그렇게 모신 지 20년이 되었지만 서로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 없이 고부간은 잘 지냈다.

이순덕여사는 신세계 백화점과 남대문 시장 길의 산 증인이었다.

“나는 미쓰코시 백화점이 오픈할 때 아버지를 따라 갔었어. 정말 멋졌지. 조선인은 몇 사람 초청되지 않았고 모두 일본인이었어. 내 나이 9살이었지.”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은 1930년 10월24일 오전 9시 경성의 최고 번화가인 혼마치 1정목(오늘날 충무로 1가)의 옛 경성부청 터에 화려하게 개장했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절충식 르네상스 tm타일 건물인 미쓰코시 경성점은 일본 건축가 하야시의 역작으로 부채꼴로 펼쳐진 입면에 현관 부분은 전라도산 화강석을 장식 조각해 모던한 멋을 부렸다. 이순덕여사는 공주처럼 차려 입고 꼬마 내빈으로 초청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물론 재력을 갖춘 아버지 덕이었다.

“난 그때부터 미쓰코시 백화점에 브이아이피 고객이었다니까. 돈은 아버지가 냈지만. 조선 최초의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은 드나들면서도 괜히 주눅이 드는 눈치였어. 내가 맞은편에 있는 경성우편국에서 새로 발행된 우표를 사가지고 나오면 자동차가 어느새 우편국 문 앞에 와서 서 있는 거야. 마음대로 좀 돌아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서 화가 났었다니까.”

정신이 들면 옛 추억을 더듬으며 작은 며느리에게 찬찬히 그때 거리 모습을 일러주었다.

“어머니 쇼핑 다 하셨으니까 이제 집으로 가시죠.“

“경성우편국에 가야 한다니까 왜 자꾸 집엘 가자는 거냐?”

그러다가도 깜빡 정신이 나가면 어떤 날에는 경성우편국에 가야 한다고 하고 어떤 날에는 조선은행에 들러야 한다고 하며 억지를 부렸다.

“어머니, 경성우편국이 어디 있어요? 조선은행은 또 어디 있고요?”

그녀가 영문 몰라 답답해하자 이여사는 그녀에게 오히려 야단을 쳤다.

“젊은 애가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서야 원.......이 백화점을 나서서 명동 쪽 건너편은 경성 우편국이고 시청 방향 건너편은 조선은행 아니냐? 조선은행 앞 광장은 조선 최고의 번화가라는 걸 알아야지.”

황비서는 처음에는 또 이여사의 정신이 또 오락가락 하는 줄 알고 무심히 들어 넘기다가 너무나 똑같은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이 신기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검색을 하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노인의 말이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근사한 신사들이 드나들고 서양식으로 만들어진 벤치와 카페가 있었어. 엄청나게 큰 금붕어 어항이랑 식물원이 있던 옥상 정원은 얼마나 멋졌다고.”

지방과 서울 변두리에서는 굶어죽는 자와 동사자가 속출했던 시절이었는데 비참한 서민 생활과 대비되는 미쓰코시의 소비문화를 이여사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황비서는 오히려 처녀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백화점 옆 남대문 시장이 그리웠다. 싸구려 면 잠옷 한 벌 사들고 찾아가 먹던 손칼국수며 갈치조림, 왕만두가 너무도 먹고 싶었다.

시어머니 이순덕 여사 역시 백화점에 가는 목적이 쇼핑보다도 11층 푸드 코트에 가서 맛난 음식을 먹고 식당가와 붙어있는 옥상 야외 정원에 나가서 바람을 쐬는 목적이 더 큰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화창한 봄, 가을에는 작은 분수가 솟아오르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포도 넝쿨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 포도향기를 내뿜었다.

“이 남대문 거리는 미쓰코시 백화점을 빼놓고는 말 할 수 없어.”

“그 당시에도 남대문 시장이 있었나요?”

“있었지. 미쓰코시 백화점이 오픈 되던 당시 나는 가 본 적이 없지만 ‘바로 옆에는 시장이 있다.’고 아버지께 들었어. 완전 극과 극의 소비문화가 이루어지던 곳이지. 육이오 전쟁 이후에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남대문 시장을 본 적이 있었어. 길거리 흙바닥에 채소, 곡물, 생선을 마구 놓고 파는 걸 보고 내가 ‘저걸 더러워서 어떻게 먹어.’하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았지. ‘다른 사람들이 먹고 사는 걸 더럽다고 하면 못 써. 나도 젊은 시절 저렇게 먹고 살았어. 너도 내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런 걸 사다먹어야 하는 거야.’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셨지. 아버지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어. 눈물을 뚝뚝 흘리도록 야단을 맞은 뒤부터 나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면 어느 것도 더럽다고 말하지 않았고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어.”

“어머니 아버님이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알 것 같네요.”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 준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나도 그 당시에는 섭섭하기만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야 그 뜻을 알았어. 바로 곁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신 거야.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할까봐 화를 내신 거고.”

“맞아요. 그런 엄한 아버지 교육이 있어서 어머님이 그렇게 곱게 사시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잘 챙기시나 봐요.”

대화를 나눌 때 어머님은 어느 누구보다 건강한 정신을 지닌 사람 같았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화점에서는 부유층이 사치와 허영에 들떠 신시대의 소비문화를 즐겼고 한쪽에서는 당장 입에 풀칠하기 위한 생계형 상인들이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여사가 말하는 소비문화의 차이라는 말인가? 이제 재벌 집 며느리가 된 그녀를 기어이 황비서라 부르는 시어머니의 저의가 갑자기 의심스러웠다. 흐린 기억력 때문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황비서, 여기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이 뭔지 알아?”

어느 새 그녀는 또 며느리가 아닌 황비서로 돌아와 있었다. 심사가 뒤틀린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배고프다. 미쓰코시에서 꼭 먹어야 하는 건 생선초밥이야. 너는 생선초밥 싫어하지?”

“저는 남대문 시장에 할머니 손칼국수가 먹고 싶어요. 어머니, 잘 들으세요. 여긴 미쓰코시 백화점이 아니라 신세계 백화점이에요. 순수한 한국 백화점이라고요. 그리고 저는 황비서가 아니라 어머님 며느리예요.”

그녀가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일러주자 이여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 너 왜 이러니? 황비서라고 해서 화났니? 너 안 먹는 초밥 먹자고 해서 화났어?”

이순덕 여사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다가 제 풀에 피식 웃고 말았다. 정신이 흐린 90세의 노인을 상대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싶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백화점과 시장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 남대문 시장 바로 옆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급 백화점이고 육이오 전쟁 이후의 남대문 시장은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생존경쟁의 터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 맞닿아 있는 상권을 가난한 며느리와 재벌 시어머니를 견주어 풀어 보았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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