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 언어선택
창의문길
+
1234
    주소
  • 서울 종로구 궁정동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1km
** 길이름 유래 : 창의문이 자하문이라고도 하는 것은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생긴 속칭이다. 창의문은 장의문이라고도 했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 스토리 : 풍수지리(風水地理)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의 의미를 해석해보자면 풍(風), 수(水), 지(地), 리(理). 즉, 바람과 물과 땅의 이치를 뜻하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 알아야할 이치라는 것이다. 특히 농업을 나라의 근간으로 생각했던 조선에서는 농사에 영향을 미치는 바람, 비나 물, 지형 등이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궁궐을 건축할 때도 풍수지리에 근거하였으며, 도성의 사대문에도 풍수지리의 영향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경복궁 서편인 창의문의 의(義)는 오행으로는 금(金)이고 방위로는 서쪽을 나타낸다. 창의(彰義)는 서쪽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지붕 위에 닭 조각이 있다. 이것은 창의문 밖의 지세가 지네 모양이기 때문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하여 도성을 지키고자 한 방편이었다. 풍수지리는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활용되었지만 반정 등의 정치적인 일에 이용되기도 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치욕을 기억하며 외교 분야에서 비범한 역량을 발휘했다. 만주에서 성장하여 중원을 차지한 후금, 즉 청나라와의 평화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을 배반하고 청과 교류를 한 것은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요소로 작용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광해군은 순리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급기야 광해군이 즉위를 하며 정치적 발판을 잃은 서인들을 중심으로 반정의 불씨가 싹텄다.

1623년 3월의 어느 날 밤, 반정의 기운은 소리 없이 내려온 땅거미처럼 은밀하게 도성 외곽에 닿아있었다. 반정의 주축이었던 이귀, 심기원, 김자점 등이 병력 600여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을 점거한 것이다. 이귀는 동료들과 함께 도성으로 진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창덕궁을 일시에 기습하기 위해서는 성의 외곽을 돌아 창덕궁과 가장 가까운 혜화문으로 진입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이서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것은 안 될 말이오!”

회의실 밖에서 힘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전 강계부사 김류였다. 이귀가 그를 알아보았다.

“김장군이었군요.”

“네, 소신 김류, 방금 도착했습니다.”

김류가 이귀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 김장군, 혜화문으로의 진입이 불가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종 때에 풍수 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아 손상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비록 왜란 때 경복궁은 불타 없어졌으나 경복궁의 팔이라면 도성의 팔과 같으니 오른팔을 먼저 꺾어 놓는 것이 여러모로 우리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오른 팔이라면 숙정문을 말하는 것이오?”

이귀가 묻자 김류가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괄이 나섰다.

“숙정문이라면 창덕궁과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도성 문이 깨어졌다는 소식이 우리보다 먼저 창덕궁에 도착할 것입니다.”

“어차피 광해는 술에 취해있을 것이오. 창덕궁과의 거리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소.”

김류가 반박했다. 이귀는 망설였다. 다시 이괄이 말했다.

“거사를 목전에 두고 허황한 풍수지리 이야기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어찌 풍수지리를 허황되다 하시오.”

너무나 확신에 찬 김류의 말에 이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장군, 확신이 있으시오?”

김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수지리의 이치는 우리가 이고 있는 하늘과 딛고 있는 이 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왜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중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만 ‘之’자를 넣어 4자로 지어 붙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김류의 다소 엉뚱한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동대문은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습니다. 경복궁을 세 방향에서 둘러싸고 있는 주산 현무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면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합니다.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습니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았습니다. 또 현판엔 ‘흥인지문(興仁之門)’라 하여 다른 문은 모두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습니다. 흥인(興仁)이라고 이름 한 것은 흥(興)은 번창한다는 뜻이 있고, 인(仁)은 오행으로 목(木)이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내니 동쪽이 흥하여 허함을 막으라는 풍수적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귀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김류는 쐐기를 박으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풍수적으로 부족한 땅의 기운을 인위적으로 보충해주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합니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리라 하여도 한두 가지 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남향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궁궐에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이것은 병향(丙向)은 오행으로 큰불을 상징하는 양화(陽火)인데다 궁궐 정면에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의 관악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악산의 화기를 한강수가 차단해준다고는 하지만 역부족하여 수성(水性)이 강한 물짐승인 해태상을 대궐문 앞에 관악산을 바라보게 하여 세운 것입니다. 또 남대문의 현판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하여 다른 문과 다르게 세로로 세웠는데 관악산의 화기를 화기로 제압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맞불을 놓는 거지요. 숭례문(崇禮門)에서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나타냅니다. 즉 숭례(崇禮)는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의 문자가 됩니다. 또한 글씨를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 때문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게 함으로서 불은 불로 막겠다는 의도를 강하게 보여준 사례입니다. 도성을 세우고 문의 이름을 지으면서도 풍수지리를 고려한 선조들의 뜻을 새긴다면 그 누구도 풍수지리가 허황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쯤 들으니 이귀는 오히려 김류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좋소, 김장군의 말에 따르기로 합시다.”

이곽이 반발하며 나섰다.

“말은 그럴듯하나 그래도 혜화문으로 진입하는 것이...”

이귀는 지휘체계를 잡아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이곽의 말을 잘랐다.

“지금부터 김류 장군을 이번 거사의 대장으로 삼겠소. 모두 그의 말에 따라야 할 것이오!”

그렇게 정해지자 아무도 더 반발할 수 없었다. 이곽도 매우 못마땅했지만 입을 다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김류가 이끄는 반정군은 창의문을 깨트리고 도성으로 진입했다. 도성의 오른팔을 꺾은 것이다. 아무리 장사라도 오른팔을 쓰지 못하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였는지 반정군의 진입소식이 반정군보다 창덕궁에 먼저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광해군은 전혀 대처할 수가 없었다.

반정은 성공으로 끝났고 이귀, 김류, 심기원, 김자점, 이괄 등 반정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정사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해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후에 김류는 인조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날 밤 이귀와 김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곽은 결국 공신들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3일 천하 끝에 목이 잘려 생을 마감했다.

풍수지리설 덕에 반정이 성공했는지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분명히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창의문을 선택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자연을 따르는 것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순리를 따르는 자는 두려울 것이 없다. 창의문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어떤 길이 순리를 따르는 길인지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 역사에는 김류가 풍수지리설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순리에 따르려고 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언제나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제시하기보다는 모든 일을 원만히 해결하려고 노력하였기에, 인조의 절대적 신임 속에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4.1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