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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순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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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61-780-2227
1234
    현지어
  • 황현 순절지(매천사)
  • Maecheonsa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전남 구례군 광의면 월곡길 22-3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59.8km
구한말 삼재(三才)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 황현은 세도 정치가 한창인 1855년(철종 6)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선조 중에는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 그리고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몰락한 가문은 그가 태어난 시절에 이르면 정계에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하고 그저 시골의 유생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서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이에 호남의 유학자 기정진이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11세가 되는 해에 이미 한시를 지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서당에서 왕석보를 스승으로 하여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왕석보의 문인으로는 황현을 비롯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 이기 등이 유명하다.
20대가 되어 서울로 올라가 이건창을 찾아가 교유관계를 맺고, 그의 추천을 통해 강위, 김택영, 정만조 등 여러 명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1883년(고종 20년) 보거과에 응시하여 그의 글이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놓으니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귀향하였다.
1888년(고종 25년) 아버지의 명으로 생원회시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한 정치현실을 개탄하며 정치인을 ‘귀신같은 나라의 정신나간 사람(鬼國狂人)’이라 질타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리고 황현은 동생 황원 일가를 포함한 식솔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구례 만수동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매화나무를 심고, 개울 아래에 옹달샘을 파서 식수를 해결하였으며, 일립정(一笠亭) 등 초가집 몇 간을 짓고서 칩거하였다. 1890년에는 구안실을 지어 3,000여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함께 시를 짓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문학적으로 더욱 원숙해지고 역사가로서의 면모가 더욱 철저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명한 저술인『매천야록』및『오하기문』과 같은 대표적인 저술이 이 시기에 시작되거나 완성되었고, 후진 교육에도 전념하였다. 그는 평생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 중 1천여 수를 만수동에서 지었다.
조선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을 비롯하여, 다음해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아관파천 등 나라 안팎으로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망국을 재촉하는 사건들이 연이어서 일어나는 현실을 정직한 선비인 황현으로서는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교류하였던 김택영과 중국으로 망명하자 같이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며 『문변삼수』를 짓고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순절한 민영환 등을 애도하며 『오애시』를 짓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한편 황현은 완고한 유학자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1907년에는 문인들과 함께 근대교육을 담당하는 호양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한 황현은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느끼고 절명시 4수를 남긴 후 자결․순절하였다. 황현은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투철한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방대한 역사기록과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긴 구한말 재야지식인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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