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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정용기 집터 - 충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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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정환직·정용기 집터 - 충효재
  • Yeongcheon Chunghyojae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북 영천시 자양면 별빛로 1538-5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46.3km
정환직·정용기 집터 - 충효재(산남의진의 父子 의병장) ... 1904년부터 일제에 강제로 합병된 1910년까지의 기간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 영국,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1905년 11월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거처하고 있던 궁궐을 일본군으로 포위하고,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내용의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조약의 승인을 거부하며 의견을 내지 않고 결정을 대신에게 위임하였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사령관과 함께 대한제국의 8명의 대신들을 일일이 부르며 조약 체결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반대한 대신은 끌려 나갔으며,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조약 체결에 찬성을 하였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르며, 이들이 찬성한 조약을 을사늑약이라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기 때문에 을사조약이라는 표현보다 ‘억지로 하다’는 의미의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 외무성이 갖고, 내정은 통감부가 관할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가적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최익현, 정환직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고,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된 군인은 전국 각지의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들의 합류로 의병들의 전투력과 조직력이 강화되었다.
의병 항쟁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의 단발령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소위 을미의병이라고 불리는 초기 의병,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이라 불리는 중기 의병,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7월의 정미 7조약 체결로 군대 해산이 이루어짐으로써 봉기하게 된, 정미의병이라 불리는 후기 의병 등 크게 3기로 전개되었다. 특히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이끌던 의병은 중기 의병과 후기 의병에 걸쳐, 경상도 지역의 의병 항쟁 중에서 규모와 활동지역이 가장 크고 넓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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