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 언어선택
강화의병 전투지-전등사
+
  • +82 32-937-0125
1234
    현지어
  • 강화의병 전투지-전등사
  • Jeondeungsa Temple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3.8km
강화의병 전투지-전등사(일제의 군대 해산에 맞선 강화의병)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 영국,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의병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을미의병이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를 내세웠다면, 을사의병은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907년 일제는 열강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때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일제가 가장 서두른 것은 한국군의 해산이었다. 비록 허약해진 한국군이었으나 그래도 군대인 만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무장해제를 시킨 것이다. 1907년 8월 서울의 시위대의 해산에서 시작하여 진행된 한국군대의 해산은 곧 애국군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1908년 강화에서 이능권을 위시한 의병의 활동이 계속되자, 일본은 같은 해 10월 용산 주둔 일본군 제6사단 예하의 제13연대 70여 명의 병력을 강화로 투입하였다. 10월 30일부터 31일 이틀간 전등사에서 일본군과 이능권 부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능권 부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읍내로 철수한 일본군은 11월 1일 다시 전등사에 출진하였으나, 이미 의병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43.8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