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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홍주의병전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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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홍주성-홍주의병전투지
  • Hongjuseong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일대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09.7km
중기의병의 전국적 도화선:홍주성-홍주의병전투지 ...  “아! 저 일본과 병자년(1876)에 통상한 이후로 갑신년(1884) 10월의 변고가 있었고 또 갑오년(1894) 6월의 변고가 있었습니다. 을미년(1895) 8월에는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고 이어 을사년(1905) 10월에는 우리나라 정부의 대신들과 결탁하여 우리의 황제를 위협 공갈하고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국권을 약탈하고 우리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충성과 울분이 치밀어 참을 수 없어서 일본사람들을 쳐 없애고 5적들을 처단하여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의 백성들을 구원하며 종묘사직을 보존하여 군신 상하가 함께 태평을 누리고자 계획하였습니다. 병오년(1906) 봄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같은 해 4월 18일에 홍산에 모여 서천으로 들어가 총과 탄환을 취하고 남포에 들어가서도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보령을 거쳐 결성에서 자고 같은 달 26일에 홍주성을 들어가 점거하니, 총을 멘 군사는 600여 명이고 창을 든 군사가 200여 명이었으며 무기를 가지지 못한 백면 서생이 300여 명이었습니다.”


윗글은 1906년 홍주의병의 의병장이었던 민종식의 피고인 진술의 일부이다.
홍주성은 1906년에 일어난 홍주 의병이 5월 30일에서 31일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룬 곳이다.


홍주의병이란 홍성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지역 일대인 홍주문화권 내에서의 의병을 말하는 것으로,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 전개되었다. 1896년 홍주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행위에 반대하여 단발령공포 직후 봉기하여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탄압을 받았다. 홍주유생과 민중들은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1906년 의병을 다시 봉기하였으며 일본정규군과의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치렀다. 이 홍주성 전투는 을사 의병 중에 최대의 전과를 올렸으며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낳았다. 또한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폭발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1906년 제 1차 홍주의병은 3월 15일경 광수(청양군 광시면)에서 이설과 안병찬이 중심이 되어 의진을 편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홍주성 공격을 앞두고 홍주군수의 의병 동참 거절과 군대의 출동으로 청양군 화성면의 합천전투에서 출동 군대에게 패하게 되었다.
제 1차 홍주 의병이 흩어진 뒤 의병 참여자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대단하였다. 의병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각지로 흩어져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민종식 의병장은 진안, 용담, 장수, 무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전북 여산, 대천 남포를 경유하여 홍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민종식은 1906년 5월 11일 이상구, 문석환, 정재호, 이용규, 김광우, 조희수, 이세영 등과 함께 다시 일어나 홍주의병이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민종식 의병은 이후 서천·비인·판교를 지나고 남포․결성을 거치면서 5월 19일 호서의 요충지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후 홍주의병은 5월 31일 홍주성이 함락될 때까지 10여일 동안 큰 기세를 떨쳤다.
홍주의병 탄압작전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직접 지휘하였다. 통감이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홍주의병을 탄압, 해산시킬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5월 31일 홍주의병은 투입된 일제의 군경과 홍주성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새벽 2시 반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파반이 폭약을 사용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일본군 보병, 헌병 그리고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제2중대 제1소대와 제4중대 제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때 의병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결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처참하게 죽었다.
일본군은 홍주의병 탄압작전에서 희생자 83명, 체포 154명, 구식총 9정, 포 75문, 각종 소총 272정을 노획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입은 참화의 실상은 일제측 보고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전투에서 최후까지 남아서 의병들을 독려하면서 분전하였던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 등을 비롯하여 3백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윤석봉과 유준근 등 간부 78명은 일본군에 체포된 뒤 서울로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 가운데 윤석봉 이하 69명은 석방되고, 나머지 남규진, 유준근, 이식,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신보균, 최상집, 안항식 등 9명은 일본 쓰시마섬으로 끌려가 갇혔다. 또한 중군장 이세영도 그해 6월에 체포된 뒤 서울 경무청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후 그해 겨울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해도 황주의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홍주성 함락 후 살아남은 의병들은 인근 각처로 분산 탈출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재기항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소규모의 의진을 다시 편성하여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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