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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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피탈을 순국으로 항거-홍범식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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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홍범식 집(일완홍범식고택)
  • Hongbeomsik Birthplace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임꺽정로 16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10.1km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이 글은 금산군수로 있던 홍범식이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 한국병합이 발표된 날 목을 매어 자결하며 아들인 홍명희에 남긴 유서의 일부이다.

홍범식은 1871년 7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양반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호는 일완(一阮)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였다. 조부 홍우길은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부친 홍승목은 이조참의, 병조참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며, 충효의 의리와 절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익혔다. 그리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로 하고, 사람을 맞이하는 데는 후덕하게 하며, 성정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유교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02년에는 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혜민원 참서관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일제의 침략과 국권 피탈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는 매우 비분강개하였다고 한다. 홍범식은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태인군에서는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 죽는 일이 많았다. 군수로 부임한 그는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힘썼으며 일체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시행하는 등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
1909년에는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는 등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일제의 한국병합이 추진되던 때였다. 현역 육군대장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0년 7월 통감으로 부임하여 오자마자 곧 바로 총리대신 이완용과 한일병합에 관한 협의를 시작하였다. 8월 16일 이완용에게 「한일병합조약」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8월 18일 각의와 8월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 민족의 거족적인 저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미루면서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공포케 하였다.
홍범식은 「한일병합조약」의 조인 소식을 듣고,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는 자결,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다. 8월 29일 저녁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자결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