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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실질적 준비자-이종일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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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3․1운동의 실질적 준비자-이종일 생가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남 태안군 원북면 옥파로 199-7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03.4km
“개화의 추세는 실로 편하지 아니하여 이 난관과 방해물을 제거하고 개화를 진행시켜 종국에는 개화이념과 이상을 성공시켜야 한다. 또 개화사상을 각계각층에 확대 보급시키려면 우선 국민 전체의 의식을 개조시키고 그 다음에 봉건적이며 낙후된 요인을 개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급선무는 이 개화사상을 전국민 각계각층에 추진시켜 신사상, 즉 실학사상을 호흡케 하고 여기에 개화사상과 연결시켜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부강과 민권의식이 더욱 내외 각국 국민의 마음 속에 신장되면 저 사람들도 역시 우리 국민들의 개화발전사상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옥파 이종일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동학과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고, 개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언론인, 교육자,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였다.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은 1858년 태안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상경하여 한학을 공부했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896년에는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 등과 함께『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과장과 보성인쇄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종일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을 갖고, 2월 초순부터 3·1운동에 참가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21,000장을 인쇄하여 한용운 3,000장, 인종익 2,000장, 안상덕 2,000장, 강기덕·김원벽 1,500장, 함태영 1,200-1,300장, 이경섭 1,000장을 직·간접적으로 배포하였다. 그는 박인호와 함께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국에 보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는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종일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옥파(沃坡), 천도교 도호는 묵암(黙菴)이다.
그는 일생을 조국의 개화 자강과 진정한 자주독립을 위해 바쳤다. 그는 실학의 영향을 받고 동학과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개화운동의 단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제국신문』의 창간을 비롯한 각종 언론 활동, 국문 보급 운동, 여성 해방 운동 그리고 교육 구국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여 각종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초기 계획 수립, 독립선언서 인쇄, 독립선언식 주도 그리고 『조선독립신문』의 발행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3․1운동으로 3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직후 또 다시 제 2의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등 굽히지 않고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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