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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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연두막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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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 Jeju Haenyeo Anti - Japanese Movement Memorial Tower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제주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48.6km
“우리는 야학에서 선생님들로부터 근대교육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대항하는 민족의식을 자각한 바 있어. 1931년 추운 겨울에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와 함께 해녀대표 13~14명이 어업 조합 본부가 있는 제주 읍내로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육로로 가면 일본 순사에게 들킬까봐 바다로 가기로 의견을 모았지. … 먹을 양식으로는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떡 여섯 개를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머리에는 흰 수건 동여 메고 흰 저고리와 까만 치마를 입었어. … ”
위의 글은 해녀 항일투쟁에 참여한 김계옥 여사의 회상이다. 해녀들은 야학을 통해 교육을 받고 자신들을 착취하는 일제 식민지배 기구인 어업조합과 투쟁을 결심하였다. 1932년 1월 7일 부춘화(당시 25세)·김옥련(당시 23세)·부덕량(당시 22세) 등이 주도하여 벌인 1차 시위가 세화오일장에서 이루어진 이후 해녀대표들의 요구사항을 접수한 구좌면 해녀조합 지부장(구좌면장 겸임)이 1월 12일 구좌면을 방문하는 제주도해녀조합장(제주도사(濟州島司) 겸임)에게 알려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1월 12일 다시 구좌면 종달리, 하도리, 세화리 해녀들과 정의면 오조리 해녀 등 700여 명이 연두막동산에 집결해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연두막동산에 집결한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며 세화오일장으로 행진했으며, 세화오일장에 도착한 해녀들은 제주도해녀조합에 대한 불평과 함께 죽음으로써 항쟁하자고 결의하였다. 구좌면과 정의면 각 리별로 20여 명의 해녀대표를 선출, 요구조건을 결정할 즈음 정찰하는 해녀로부터 구좌면사무소를 방문했던 도사가 막 돌아가려고 한다는 정보가 있자 시위대는 즉시 그곳으로 몰려가 차를 타려고 하는 도사를 포위했다. 해녀대표와 도사의 면담 결과, 도사는 해녀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지정판매 폐지, 경쟁 입찰에 의한 공동판매 부활, 미성년자와 40세 이상 해녀조합비 면제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이날 연두막동산에 집결하여 이루어진 해녀시위는 가장 규모가 컸고 제주도사와의 담판을 통해 해녀들의 요구 조건을 일부나마 관철시킬 수 있었다.

제주해녀는 제주도 여성의 근면성과 경제적 자립성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회적 존재이다. 제주도는 물이 귀하고 땅이 척박하여 논농사는 거의 어렵고 조·보리와 같은 밭농사에 의지하여 생활해야 했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특히 시시 때때로 닥쳐오는 자연재해들은 제주도인들의 생활 경제를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나 바다 속에는 전복과 해조 등 해물이 많이 있어 이를 채취하여 생계를 영위할 수 있었고 이 일들은 주로 여자들이 담당했는데, 그들이 바로 해녀인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수십 길 바다 속에서 해물을 채취하는 어려운 노동을 여자들이 담당했다. 그러므로 해녀는 제주 경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강한 생활력을 지닌 해녀들이 바다 속에서 해물들을 채취하는 특수 기술은 세계적인 것이었으며, 그들의 진취적인 성격은 삶의 영역을 제주도 근해에 한정시킬 수가 없었다.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 제주해녀들은 그들의 활동 영역을 경상남도의 부산·울산·장산포 등지로 넓혀갔으며, 때로는 일본 또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었다. 1920년도에 활동한 해녀는 10,000여 명에 달했는데, 그중 해마다 4월부터 9월까지 부산·울산 등지로 나아가 활동하는 해녀 수는 4,000명 이상이 되었다. 당시 출가 해녀 한 사람당 채취 생산액이 평균 300원으로 총수입은 약 120만원이라는 큰 수입인 만큼 출가 해녀는 제주도 경제에 있어서 실로 생명줄이었으며, 조선 산업계에서도 중대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막대한 벌이와는 달리 해녀들의 생활상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 이유는 부모 자식을 이별하고 먼 지역으로 일하러 온 출가해녀들은 물상객주며 거간들과 고리채를 하는 일본인들, 더 나아가 일본인 해조회사 등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 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도에서는 해녀들의 권익을 옹호할 기구인 해녀조합 설치운동이 제주도 유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1920년 4월 16일에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 해녀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해녀조합장은 제주도의 행정수장인 도사가 맡았다.
그러나 제주해녀조합은 해를 거듭하면서 조합장과 담당서기 등이 상인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해녀들의 생존권을 침탈하였다. 그 결과 해녀들은 자신들의 기본적인 생존 권익을 찾기 위하여 조합에 항의하였고 마침내 격렬한 저항적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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