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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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의 화신-윤봉길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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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41-339-8232
1234
    현지어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 Yunbonggil Memorial Hall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면 시량부흥길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00.8km
나라의 복이 재앙을 만남을 어찌 다 말하랴.
날뛰는 왜구 놈들이 우리 국병을 훔쳤네.
특히 그대는 오랑캐 백성 됨을 수치로 여겨
분격해 압록강 건너 임시정부에 들어갔네.
백범은 의사의 뜻에 감읍하고
황포강가에서 저격할 폭탄을 주었도다.
장황한 오랑캐 기세를 아이들 놀이처럼 내려놓고
벼락같은 폭탄 던져 의기 펼쳤네.
안중근 의사가 가신 후 그대가 또 있으니
온 나라 사람들 꿈에서 막 깨게 했도다.
이제사 고국산하 제자리 되찾으니
; 진정 선열들 중에 공적 견줄 이 없도다.
내 이제 충의사에 와보니
송백이 빽빽하고 섬돌에 꽃 가득한데
지난날 강습했던 일을 추억하니
눈물 금할 길 없어 절로 숙연해지네.



유교부식회 회원으로 윤봉길의 의사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전용욱이 광복 후 충의사 건립에 즈음하여 윤봉길 의사의 영전에 바친 한시이다.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08년 6월 21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봉길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禹儀)이며, 아호는 매헌(梅軒)이다. 생가인 광현당은 사방으로 냇물이 둘러 있어 윤봉길이 왜놈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하여 도중도(島中島)라 하며 정신 수양을 하던 곳이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을 다니던 중 공동묘지 묘표사건을 겪게 되었다. 그는 일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지’임을 깨닫고 야학을 개설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문맹퇴치는 농촌계몽을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로 여기고 자신의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해 문맹 퇴치와 경제자립 운동을 펼쳤다.
윤봉길은 자신의 사랑방에 개설했던 야학을 확대하고, 경제자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8년 2월 부흥원을 설립했다. 그는 1928년 10월 위친계를 조직하고 다음해 4월 월진회를 조직해 야학의 지속적 추진, 농가소득증대, 학예회와 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일제의 탄압과 식민지 체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929년 봄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토끼와 여우’라는 학예회를 열고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농촌 계몽 운동의 한계를 느꼈다.
윤봉길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32년 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그 해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천장절과 일본군 상하이점령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던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가와바타[河端貞次]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는 의거를 일으켰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상하이를 출발해 오사카[大阪]의 육군 위수 형무소로 옮겨졌다. 12월 18일 밤 가나자와[金澤]로 이송되었으며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시외의 미츠코지[三小牛] 육군작업장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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