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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요람, 동화학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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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의열단의 요람, 동화학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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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남 밀양시 내일동 내일동 477번지 밀양택시 자리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78.9km
가네무라 오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시각으로 이 학교는 폐교되었다. 학도들은 즉시 귀가하라.”

전홍표 교장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학교의 학도들아, 잊지마라. 이 학교에서 배운 정신을!”

학생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때 최수봉(후에 의열단원 최초로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이 앞으로 나아가며 벽력같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동화의 학우들이여, 울지 말자! 눈물은 약한 자의 것, 실패한 자의 것이다!”

김원봉(후에 의열단 단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모두 일어나 세 분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자. 그리고 오늘은 잊지 말자고 엄숙히 다짐하며 <학도가>를 부르자.”

두 학년이 합반인데다 책상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어 교실이 비좁았지만 학생들은 스승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세 사람의 스승은 두루마기 깃을 여미며 학생들의 절을 받았다. 학생들의 <학도가>를 부르며 교실을 나가면서 동화학교는 일제에 의해서 폐쇄되었다.


밀양지역은 ‘의열투쟁의 메카’이다 황상규․김대지를 막후로 하여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그 중심이었다. 특히 전홍표가 대한제국 초기 군관청에 설립한 동화학교는 김원봉․윤세주․최수봉 등 의열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밀양지역은 밀양강과 낙동강의 의해 충적된 비옥한 토지 때문에 개항 이후 낙동강과 경부선을 통한 일본인들의 내륙 진출이 러․일전쟁 이전부터 추진된 지역이다. 대규모의 일본인 농촌이민이 추진되는 등 일본인 식민회사와 대지주의 토지 침탈이 이른 시기부터 가속화되었던 곳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밀양강과 낙동강의 범람을 막고자 조성된 수리시설을 토대로 대규모 토지를 경영하였다.

경부선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 가곡동에 일본인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점차 삼문동을 거쳐 밀양강을 넘어 밀양 읍내까지 영역이 확장되었다. 밀양지역은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내륙 물류 거점지역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밀양 읍내에는 일본인 회사, 상점 등이 진출하고 있었다. 경남에서 일본인거류지가 있었던 부산과 마산을 제외한 내륙지역 중 통영, 진주, 밀양에 일본인 진출이 가장 많았던 점도 이 때문이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이른 시기 밀양지역에서 철도역을 중심으로 농촌지역으로 진출했으며 점차 읍내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조선인과 갈등이 생겼다. 그 결과 밀양지역에서도 3․1운동이 대대적이고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화학교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통해 청년을 교육하고 자주독립의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동학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단체인 연무단을 조직하였으며 의열단 조직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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