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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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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엄항섭 생가 터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기 여주군 금사면 노루목길 37-9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7.4km
엄항섭 생가 터(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수꾼) ... 흔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 하면 많은 이들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을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김구를 도와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계시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일파 엄항섭(一波 嚴恒燮)이시다.
엄항섭은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김구의 보좌관으로 김구와 함께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분이다. 특히 엄항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자 지킴이’로서 임시정부가 어려울 때는 몸소 돈을 벌어 임시정부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한 평생을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혁명은 무자비라 하였지만 나는 진정한 혁명은 눈물에 있다 한다. 그것은 눈물에는 참사랑이 있는 까닭이다. 말에는 거짓이 있지만, 눈물에는 거짓이 없다. 과거 우국지사들의 쓰라린 눈물이며, 예수님의 뜨거운 눈물을 분석한다면 ‘사랑’ 이외는 아무 것도 없으리라.
- 성결교회 전국수양대회 강연(1946. 4.)에서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었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 김구 선생 추모사 중에서(1949. 6.)

위 첫 번째 글은 해방 후 귀국한 엄항섭이 교회에서 ‘사랑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던 내용이고, 아래 추모사는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몸바쳐온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허망하게 죽게 되자 김구를 모시던 엄항섭이 그를 추모하며 쓴 글이다. 하늘처럼 모시던 김구의 죽음은 엄항섭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김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엄항섭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이다. 경기도 이천이나 곤지암에서 주록리계곡(또는 금사저수지) 방향(양평이나 여주 금사에서 동막골저수지 방향)로 향하다 고개 정상에서 노루목길로 접어들면 몇몇 가구들이 모여 있는 노루목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 노루목에 엄항섭이 태어난 곳이 있다. 현재 이곳은 집은 없어지고 땅만 밭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어 일반인들이 이곳이 ‘독립운동가 엄항섭의 생가 터’라고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관리는커녕 이곳을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없어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대항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어난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졌다. 일제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7개나 세워졌다. 3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며,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상하이[桑海;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각 지역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이를 4월 13일 대외에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였으며,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하였다. 또 임시정부의 행정부로 국무원(國務院)을 두었으며, 행정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인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세워져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하였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혼선이 빚어졌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정보 교환도 쉽지 않았다. 특히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 집정관 총재와는 업무 연락조차 여의치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외를 통할해 효과적으로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9월 6일 한성 임시정부와 노령 임시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어 9월 11일 통합 정부가 선포되었으며, 제1차 개헌을 거쳐 9월 15일 대통령 중심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1926년 9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 형태의 주류를 이루며 이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과는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과 이념이 달랐으므로 망명정부가 될 수 없었고,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독립국가 정부와도 성격이 달랐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바탕 위에 독립운동의 통합기구로서 조직된 임시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 등지로 옮겨가며 줄기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광복군 창설 등의 군사 활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 단체에 맡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인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로는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들 수 있는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다. 대신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 비행사 양성소, 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특히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을 때(1940∼1945)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 1945년 임시정부과 한국광복군은 국내진입작전[냅코작전; NAPKO Project]의 하나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럽게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8월 21일 실행하려던 국내진입작전은 펼쳐보지도 못하고 한스러운 8‧15광복을 맞았다.
8‧15해방은 일제가 우리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측으로부터 정식 정부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귀국마저 뜻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11월 23일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마침내 통일된 정부가 세워지지 못하고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으며, 심지어 같은 민족끼리 전쟁까지 치러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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