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최팔용ㆍ윤창석ㆍ김도연ㆍ이종근ㆍ이광수ㆍ송계백ㆍ김철수ㆍ최근우ㆍ백관수ㆍ김상덕ㆍ서춘 등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ㆍ8학생독립선언을 추진하였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하고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달 등 체포되지 않은 유학생들 수십 명은 2월 12일 히비야 공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2월 19일에는 최승만ㆍ변희용 등이 다시 히비야 공원에서 시위를 결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2ㆍ8독립선언서는 '한일합방'이 한국인의 뜻에 반하는 것인 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
당시 2ㆍ8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던 히비야 공원 공회당 앞은 대규모 꽃시계가 자리 잡고 있어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