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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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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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وادي الملوك(Wādī al Mulūk)
  • Valley of the Kings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아프리카 이집트 이집트 West Bank, Luxor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8,657.7km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은 룩소르지역 나일 강 서안에 위치한 석회암 계곡으로서 고대 이집트 신왕조(제18왕조~제20왕조, BC 1567~BC 1085)시대 왕들의 무덤 62개소가 발굴되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km떨어진 곳에 룩소르라는 관광지가 있다. 여명의 여신을 부르는 멤논 거상 과 왕들의 계곡등, 세계 최대의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 '룩소르' 는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도시 곳곳에 파라오 시대의 유적지가 많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 테베의 남쪽 교외에 해당한다.

왕가의 계곡은 나일강 서안의 메마른 계곡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는 아멘호테프 4세가 중부 이집트의 텔엘아마르나에 천도해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 신왕국 제 18왕조(기원전 1400년경) 투트메스(Thutmose) 1세에서 제20왕조 람세스(Ramses) 11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왕의 암굴묘가 세워져 있다. 표고 450m의 알쿠른 바위산이 파라미드 형상을 한 산과 태양이 지는 나일강 서안은 죽은 왕의 매장지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대에는 타이네트(골짜기), 타세트아아트(위대한 장소)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와디알무르크(왕들의 계곡)라 불리고 있다.

왕들의 계곡은 동서로 갈리어져 있으며, 지금까지 약 60여기의 묘와 20여개의 피트(지면에서 곧게 내리 판 굴)가 발견되었다. 1922년 투탕카멘(Tutankhamen)의 묘가 발견된 이후 새로운 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새로운 묘를 찾기 위한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투탕카멘의 것으로 알려진 무덤은 제20왕조말에 대규모로 자행된 약탈을 모면했고, 후대 사람들이 왕들의 계곡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그 위치를 발견할 때까지 그대로 보존되었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은 모두 신왕국 때의 것으로, 왕들의 묘는 험한 바위산을 파고 낭떠러지의 중턱이나 아랫 부분을 파낸 곳에 세워졌다. 그리고 왕묘에 대해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 묘들은 일반적으로 계단과 경사로로 구성되는 하강 통로, 여러 개의 부속실, 전실,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 18대 왕조 시대에는 묘의 통로가 도중에 지각으로 구부러지는 직각형이 전형적인 형태였다. 제 18왕조인 이크나톤(Ikhnaton) 왕은 도읍을 아마르나로 옮겼고 그 곳의 묘는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구조는 빛의 직진성과 관련되어 태양신을 숭배하던 당시 사회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왕묘는 계속 왕가의 계곡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 18왕조 말의 호르멤헤브(Hormemheb) 왕묘 이래로 묘의 구조는 직선형으로 변해갔다. 또 제 20왕조의 람세스 4세 이후는 거대한 입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집트의 룩소르에는 왕들의 무덤인 왕가의 계곡이 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는데 귀족들의 무덤인 네크로폴리스가 그것이다.

1881년 7월, 텔엘바하리의 남쪽 낭떠러지에서 구멍 뚫린 샤프트 묘에서 놀라운 대발견이 있었다. 그 곳에는 금속기나 석제 그릇, 샤프트상 등을 비롯하여 5900점의 부장품과 50구가 넘는 미라가 발견된 것이다. 이 묘는 제 21왕조의 파누젬 2세와 그 가족을 매장하기 위하여 준비된 것으로 드러났다. 매장 후에 제 22왕조 세숑크(Sheshonk) 1세 때 신왕국 시대의 왕과 왕비 미라가 운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텔엘바하리의 묘를 발견하게 된 것은 한 도굴범의 정보 제공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그의 진술에 따르면 1870년대 초에 이 곳을 발견하여 골동품을 팔아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많은 부장품이 나돌자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더 이상의 도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경찰에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898년, 프랑스의 한 학자에 의해 왕가의 계곡에서 아멘호테프 2세의 묘가 발견되었다. 그 곳은 입구가 대량의 모래와 자갈에 의해 완전히 매몰되어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11구의 미라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 8개가 왕의 미라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텔엘바하리와 왕가의 계곡에서 2군데의 왕의 미라를 숨겨 놓은 곳이 발견되었다. 신왕국 시대 말기에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이 성행하게 되어 많은 왕의 미라가 손상을 입었다. 이 사태를 우려한 아멘 대사제가 안전한 다른 장소로 이송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묻혀 있던 수많은 부장품과 금으로 도금한 관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아멘 신관단이 왕의 미라를 옮기면서 부장품을 약탈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합법적인(?) 도굴로 얻은 금은 보화는 아멘 대사제를 중심으로 하는 테베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왕의 유체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의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즉, 겉과 속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왕들의 미라는 모두 33구이다. 그 중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거나 확정되지 않은 것은 13구의 미라이다. 그렇다면 또다른 은신처에 이 13구가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군데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왕들의 미라를 안장한 목관이나 미라를 쓴 포대에는 미라가 여러 은신처로 이동, 운반되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호르멤헤브 왕묘에는 왕의 미라가 다른 장소로 운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제18왕조 말기에서 제19왕조 초기의 왕들의 미라는 발견되지 않은 제3의 은신처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앞으로의 발굴에서 새로운 왕묘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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