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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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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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十里洼抗日斗争遗址纪念碑
  • Shílǐ wā kàngrì dòuzhēng yízhǐ jìniànbēi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헤이룽장 지시 미산시 紅山村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997.2km
미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지인 십리와에 세운 항일기념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미산현密山縣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거세지자 국외독립운동기지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그 후보지로 주목을 받은 곳이었다.

이에 1909년 이승희李承熙와 이상설李相卨은 싱카이호興凯湖 주변의 펑미산蜂密山 지역에 황무지 45방方 구입하고 백여 가구를 정착시켜 한흥동韓興洞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로 중국 정부의 영향력과 일제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였으며,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들여오는 것도 가능했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 교재를 만들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같은 해 신민회 이강李剛과 김성무金聖武, 정재관鄭在寬 등도 펑미산 일대를 답사하고 펑미산 북쪽 십리와十里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인들이 이주하고 정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개척자금이 부족하여 독립운동기지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이곳은 독립군들의 집결지가 됐다. 1920년 12월경 서일徐一(북로군정서), 홍범도洪範圖(대한독립군), 안무安武(대한국민회군)가 이끄는 독립군을 포함하여 9개 단체 3천 5백여 명의 독립군이 미산密山 평양진에 집결했다.

서일은 이들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로,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을 부총재로, 김규식을 총사령으로 선임했다.

이들은 미산에서 향후 독립군의 투쟁노선을 논의하면서 우선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독립군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1921년 1월 초 대한독립군단은 미산 당비진當壁鎭을 지나 후린현虎林縣 후터우虎頭에서 우수리Ussuri, 烏蘇里강을 넘어 러시아 이만伊曼, Iman(현 Dal’nerechensk)으로 이동했다.

1908년 이강, 1909년 김성무가 사전답사하고 1910년 3월 신민회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미루 태동실업주식 회사의 주금이 투자되어 미산에 약 300만 평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곳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실제 1911년 미주에서 5만 달러가 도착하여 토지를 매입해 5백여 가구 2천명의 마을을 만들고 민족학교인 동명학교東明學校가
설립됐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에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가 세워졌다.

미산시 당국은 기념비 건립 장소 선정과 환경조성 작업을 진행하여 십리와 뒷동산 소나무숲 안에 기념비 건립 장소를 확정하고 모금한 돈으로 진입로와 기념비 둘레 조성사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기초부분은 산둥성山東省에서 가져온 대리석을, 기념비는 스촨성四川省에서 가져온 백옥돌을 높이 2미터, 너비 1미터로 깎아 한글비문과 중국어비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

비문 내용은 중국시 당국의 공식사업임을 감안하여 신민회 지도자 안창호安昌浩 등이 미산 십리와 항일독립운동근거지 건설작업을 시작, 미주 태동실업주식회사에서 5만불을 모금, 이강· 김성무·정재관 등을 원동위원으로 파견, 토지를 매입하고 500여 가구 건립 등의 사실을 분명히 하되 용어 등은 현지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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