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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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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dependent newspapers ruins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서소문로11길 19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0.8km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에 폐간된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은 창간 당시에는 격일간으로 주 3회(화·목·토요일) 발행되었다. 체재는 가로 22㎝, 세로 33㎝ 판형에 전체 4면으로 이루어졌는데, 1면 머리에는 논설을 싣고 이어서 관보·잡보·외국통신을 2면과 3면의 일부에까지 실었으며, 3면에는 대부분 광고를 실었다.

광고 가운데 1/3 정도는 영문이었는데 이는 이 신문의 독자 가운데 외국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글을 전용하고 띄어쓰기를 단행한 것은 빈부를 막론하고 국민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편리하고 우수한 한글을 널리 쓰도록 하자는 목적에서였다.

이후에 창간된 대한제국 말기의 여러 민간신문들이 한글을 전용한 것도 이 신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4면은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라는 제호의 영문판이었다. 영문판에도 논설을 비롯하여 국내 관보(official gazette), 외신(latest relegrams), 국내외 소식(digest of domestic and foreign news), 독자투고(communications), 외국언론 기사요약(exchanges) 등을 실었다.

창간 당시에는 이처럼 한글판과 영문판이 붙어 있었으나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1일부터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2개의 신문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영문판은 당시의 한국사정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를 알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창간된 지 2년 4개월이 지난 1898년 7월 26일자 논설에서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는 4가지 신문의 발행부수가 통틀어 2,500부라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이 가운데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는 2,000여 부 미만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적은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신문이 창간된 다음해에 발행된 영어 잡지 〈The Korean Repository〉에 따르면 어떤 마을에서는 〈독립신문〉 1부를 가지고 적어도 85명이 돌려가며 읽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독자들은 당시의 정치와 사회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료들과 지식인, 그리고 활동적인 개화파들이었다. 따라서 이 신문의 영향력은 단순한 발행부수로서가 아니라 독자들의 사회적 비중이 높았다는 사실을 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신문은 처음에는 격일로 발행되다가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발행되었다. 이는 배재학당의 학생회가 그해 4월 9일에 창간한 〈매일신문〉이 일간으로 발행되고 있었던 데에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문판은 그대로 격일간으로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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