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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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적산관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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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石岛赤山景区
  • Shídǎo chìshān jǐngq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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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산둥 웨이하이 룽청시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11.2km
일행은 적산대명신과 장보고전기관, 적산법화원과 관음분수쇼, 엔닌관 등의 순서로 둘러보기로 했다. 적산풍경구에는 크게 10개의 존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관광객들의 이목을 끄는 시설물은 단연 적산대명신과 관음분수쇼이다. 엄밀히 따지면 적산풍경구의 핵심은 장보고전기관과 적산법화원이지만, 풍경구의 초입에 있는데다 규모가 왜소하고 진입로가 넓지 않는 탓에 관람객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특히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적산법화원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의 사찰로 만들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관광객들은 경내 진입도 하지 않고 적산명신상 등 인기가 있는 곳으로 가버리기 일쑤였다. 적산법화원에서 왼쪽 야트막한 산꼭대기에 세워진 세계 최대 규모의 적산대명신의 뒷모습이 눈길을 끌기 때문에 관광객의 발걸음이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적산그룹은 왜 신라명신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적산명신상을 만들었을까? 적산명신(赤山明神) 또는 신라명신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태산부군(泰山府君) 설이다.

민간신앙에서는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여기로 돌아와 생전의 행위를 놓고 선과 악의 재판을 하는 태산(泰山)의 신을 태산부군(太山府君)이라고 부른다. 즉, 인간은 사후에 태산(泰山)으로 돌아가며 太山府君이 귀신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둘째, 신라명신은 신라인이 집단이주할 때 모시고 갔던 神이라는 설이다. 육국사(六國史)에 따르면 신라(新羅)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숭봉(崇奉)하던 신을 가져 왔다고 적혀 있다. 셋째, 장보고의 화현(化現)으로 보는 설이다. 이 說은 일본불교의 성산(聖山) 히에이산(比叡山, 848m)은 신라계 고승들의 활동 근거지였던 오토모노무라(大友村) 마을과 연관이 있다. 이 마을은 고대 신라인들의 집단 이주지였으며 오늘날의 지명은 사카모토(坂本)다. 와세다(早稻田)대 불교미술사학과 야마모토 쓰토무(山本 勉) 교수는 “오토모노무라는 신라인들의 유서 깊은 고장”(<日本國寶全集> 1960)이라고 지적했다. 야마모토 교수 외에도 여러 명의 저명한 학자가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사카모토에서는 신라인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最澄,767∼822)의 생가 쇼겐지(生源寺)가 유명하며 자각대사 (慈覺大師) 엔닌(圓仁, 794∼864)과 지증대사(智證大師) 엔친(圓珍, 814∼891)이 당나라 유학승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신라명신을 만났던 인연이 있다. 월간중앙,『일본천태종 수호신은 ‘신라묘진(新羅明神’ 』,2012년 9월호

엔닌은 귀국 직후 엔랴쿠지에 적산궁을, 864년 제자들에게 신라명신을 모실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엔닌의 제자들은 888년 교토 수학원이궁 근처에 적산선원을 각각 창건, 신라명신을 모셨다. 엔친도 사카모토의 미이데라역 근처에 온조지(園城寺) 또는 미이데라(三井寺)를 만들고 신라명신을 모시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을 세웠다. 고 최인호 작가는 신라명신을 장보고 대사로 주장했다. 이처럼 엔닌은 천태종을 전승하는 대사로서 불법 수호신으로 신라명신을 모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적산명신은 재해를 막아주고 장수를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지장보살의 화신이며 장보고를 상징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김성훈 단장은 거대한 적산대명신을 둘러보는 것조차 심한 자괴감이 든다며 관람을 포기했다. 그는 입구의 초대형 벽면에 적산대명신을 소개하는 글을 몇 번이나 읽더니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적산법화원의 식객이었던 엔닌의 이름은 두 번이나 적혀 있는데, 정작 주인공인 장보고대사의 이름은 빠져있다”며 “ 이 또한 역사의 왜곡 ”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장보고전기관의 입구 벽면에는 ‘명신복우사해(明神福佑四海)요 장군체교삼방(將軍締交三邦)’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해석하자면 “명신이 복을 사해로 나눠 주고 장군이 세 나라를 교제하도록 연결해줬다” 라는 뜻이다. 장보고전기관의 입구에서 만났던 우화청(宇華靑) 부장은 “이곳은 장보고대사의 영토이니까 명신=장보고를 동격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장보고전기관과 엔닌기념관 등의 자리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차별을 두고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엔닌기념관의 위치는 관음분수쇼와 가까운 거리에 배치했기 때문에 분수쇼가 끝나면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엔닌기념관으로 가도록 동선을 짰다. 반면 장보고전기관의 입구는 적산대명신으로 가는 큰 길 옆에 조그만 길을 따라 200m 가량 들어가야만 광장이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또한 전기관은 장보고대사 동상 뒤편의 건물과 중앙 건물 3개 층에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반면, 엔닌기념관은 독립된 건물 4개동에 이해하기 쉽게 전시기획을 꾸며 놓았다. 이는 일본 측에서 돈을 제공하면서 입지선정 등 꼼꼼하게 체크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켰던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이번 적산법화원 방문이 2000년에 이어 세 번째다. 그 때는 (재)장보고기념사업회가 초․중․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장보고유적답사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인솔교수로 왔던 적이 있다. 이번 답사에서도 1994년 7월 24일 세계한민족연합회(회장 최민자 성신여대 교수)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휘호로 새긴 ‘장보고기념탑’과 2007년 4월 2일 영성시를 방문한 김종식 전 완도군수의 기념식수 등을 비롯한 다양한 기념비들이 잇달아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장보고(신라인)유적 답사기 | 황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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