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5
  • 언어선택
유가장촌(류자좡촌)
+
1234
    현지어
  • 刘家庄村
  • Liú jiā zhuāng cūn
    분류
  • 기관/단체/종교 > 지방정부
    주소
  • 산둥 웨이하이 루산시 乳山口镇劉家庄村二零七省道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91.9km
[중국 장보고(신라인)유적 답사기 | 황상석]

답사단은 11시 40분에 석도진을 출발,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을 지나 유산포를 향했다. 적산법화원을 중심으로 문등현(文登縣)과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에는 자치기구인 신라소(新羅所)가 들어섰을 정도로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0년 4월 29일에 김성훈 이사장 등이 세웠던 ‘유산포신라인집거유지기념비’의 행방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왜냐하면 지난해 선발대로 와서 기념비를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직접 기념비를 세웠던 김성훈 단장이 동행했기 때문에 기념비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 단장도 유산하가 흐르는 대유산(大乳山)이 바라보는 유산포의 들녘 도로변에 세웠을 뿐 정확한 지번을 몰랐다. 답사단원들은 관광버스 차장 밖 도로변을 유심히 살폈다. 김 단장은 뒤늦게 기념비를 세웠던 지역 명칭이 모평(牟平)이었음을 기억했다. 김성일 사장은 모평현이 연태시 근처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3시간 가량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다만 모평이라는 지명을 이야기 한지 채 5분도 안되어 교통표지판에 ‘牟平’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적혀 있음을 발견했다. 답사단원들은 마치 기념비를 찾기라도 한 양 환호성을 질렀다. 차를 멈추고 주변 지역을 살폈다. 그러나 기념비는 보이지 않았다. 도로 건너편에 4층 규모의 식당이 보였다. 기념비의 행방을 물어보고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한적한 시골식당인 '시온해산물주점(詩蘊海産物酒店)을 찾았다. 어부로 살고 있다는 주인은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신속하게 준비했다. 일행들은 기념비를 찾은 것처럼 흥분되어 맥주와 한국서 가져간 소주, 중국술을 섞어 마셨다. 그러나 점심을 끝나고 확인한 것은 기념비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조차 못 찾았다는 실망스런 소식이었다. 주인은 이곳에서 20년 넘게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지역을 훤히 꿰뚫고 있지만, 기념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대를 잔뜩 걸었는데 단서조차도 못 건졌으니 모두들 낙담했다. 답사단은 일단 유산포 부두로 가보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봤다. 부둣가에 도착, 주변에 사는 촌로들을 붙잡고 기념비의 행방을 물어봤지만 모두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 때 김덕수 교수가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호텔 근처에 기념비가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마지막으로 부두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어부한테 기념비의 행방을 물어보자는 의견을 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성일 가이드와 내가 그들에게 걸어가서 기념비의 행방을 물었다. 어부 중에 한 사람이 기념비가 있는 위치를 알고 있었다.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것을 부탁했다. 말끔히 차려입은 선주가 자신이 안내해주겠다고 앞장을 섰다. 부두에서 5분 여 정도 차량으로 달렸을까. 2차선 도로에서 강 쪽으로 빠지는 비좁은 길로 접어들어 3분 가량 주행했을 때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차를 멈췄다. 그곳에는 2명의 경비원들이 우리들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념비와 관련, 얽힌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한 경비원이 굳게 닫힌 철제문을 열어줬다. 답사단원들은 먼저 기념비를 발견하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10분가량 앞서 걷던 선발주자들이 일제히 숲 속에서 “찾았다”하고 외쳤다. 그렇게 행방이 묘연하던 기념비를 기적적으로 찾았다. 김성훈 단장은 한중수교 이전에 온갖 고생을 하면서 세웠던 기념비를 가슴으로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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