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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터브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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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Harriet Tubman Memorial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뉴욕 뉴욕 10027 St. Nicholas Avenue and, Frederick Douglass Blvd,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1,044.9km
해리엇 터브먼(영어: Harriet Tubman, 본명 아라민타 로스(영어: Araminta Ross), 1822년 ~ 1913년 3월 10일)은 노예 해방 운동을 실천한 인권운동가이자 남북 전쟁 당시 활동했던 노예 폐지론자, 스파이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그는 탈출 후, ‘지하 철도’라는 반노예 운동가 네트워크와 아지트를 통해 해방 시설 열세 곳을 세워, 노예 칠십여 명을 구하였다.[1] 해리엇은 1850년부터 1860년까지 '지하 철도'의 차장으로서 남부에 들어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북부로 탈출시켰다.[2] 이후 그는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도와 하퍼즈페리를 습격할 사람들을 모았으며, 전쟁 이후에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다. 메릴랜드주 도체스터 카운티에서 태어난 터브먼은, 수많은 주인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채찍질 당하였다. 어릴 적, 그는 화난 노예 주인이 다른 노예에게 던졌던 철 아령에 실수로 맞아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로 인해 그는 평생 발작, 두통, 수면과다에 시달렸으나, 대신 꿈을 생생하게 꾸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생생한 꿈을 하나님이 계시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1849년, 터브먼은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가, 바로 메릴랜드로 그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돌아왔다. 천천히, 한 번에 한 그룹씩,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주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며, 결국 수십 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아주 은밀하게 밤에만 움직였던 터브먼(이때부터 하비루[3] 를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따르면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착취와 억압에서 구원한“모세”라고 불렸다)은 “한 번도 손님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탈출한 사람들에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곤 하였지만, 그들을 돕는 게 해리엇 터브먼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도망노예법이 제정된 때에는, 그는 도망친 노예들을 캐나다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직업을 찾아주기도 하였다.

남북 전쟁 발발 후, 터브먼은 연합군을 위해, 처음에는 요리사이자 간호사로, 그 다음은 무장 정찰병이자 스파이로 활약하였다. 전쟁에서 탐험대를 이끈 첫 여성이 된 그는, 콤바히 강을 습격하여 700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전쟁 후, 그는 은퇴한 후 뉴욕 오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노부모를 돌봤다. 병 때문에 편히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도 열심히 싸웠으며, 이후 자신의 도움으로 몇 년 일찍 세워진 흑인 양로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페렴으로 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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