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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참변 급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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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Участок инцидента Свободный
  • Svobodny incident site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아시아 러시아 러시아 676455 Amur Oblast, Svobodny, g.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536.3km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도 하는 독립운동사상 가장 처참한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극동 자유시(현재의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한인 망명 독립군들이 붉은 군대의 통수권 접수를 거부한 데에 따라 붉은 군대에 의해 포위 진압된 사건입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한인 망명 독립군 내부의 파벌 갈등입니다. 당시 한인 망명 독립군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붉은 군대와 협력하는 정책을 추구하였고, 상해파는 일제와의 독립투쟁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둘째,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입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한인 망명 독립군을 지원하는 정책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일제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한인 망명 독립군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셋째, 일본 제국의 압력입니다. 일본 제국은 붉은 군대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한인 망명 독립군을 압박하였고, 이는 자유시 참변의 발생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1년 1월부터 3월까지 간도와 연해주 각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부대들이 자유시에 집결하였고, 4월 1일에는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르쿠츠크파의 서일과 상해파의 김좌진이 공동으로 지휘하였으나, 두 파벌간의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6월 27일, 붉은 군대가 자유시에 진입하여 대한독립군단에 통수권 접수를 요구하였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를 거부하였고, 붉은 군대는 28일 오전부터 자유시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은 붉은 군대의 공격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결국 패퇴하였습니다.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약 3,000여 명의 독립군이 붉은 군대에 의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습니다. 자유시 참변은 한인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그 여파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자유시 참변의 책임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의 배신으로 참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였고, 상해파는 이르쿠츠크파의 무능과 붉은 군대의 침략으로 인해 참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책임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자유시 참변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한인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 여파는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