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동포 등이 안중근 의사가 1908년 3~4개월 정도 머물며 사격 연습 등을 했다고 주장하는 고택이 보존됐을 당시 모습. (항일 유적지 관련 단체 제공) © News1




[뉴스1] 중국 지린(吉林)성 훈춘(琿春)시의 한 시골 마을에선 1908년 그 곳의 한 초가집에서 지내며 스스로를 단련한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당시 30세였던 청년은 그 해 4~6월 그 초가집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구상하며 주로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백발백중'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그의 사격 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지만 자신의 재능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몰랐기에 청년은 늘 손에서 총을 놓지 않았다.







3개월 동안 그 곳에 머물렀던 청년은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이다 이듬해인 1909년 10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로 건너간다.







조국에 대한 침략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 당시 조선 통감이 그 곳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하얼빈역에 모습을 드러낸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겨눈 청년은 망설임과 실수 없이 계획을 실행에 옮겨 그를 사살한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 '청년' 안중근 의사 얘기다.







안 의사가 1909년 '거사'를 앞두고 훈춘시 경신진 권하촌의 한 초가집에서 3~4개월 정도 머물렀다는 이야기는 중국 동포들을 중심으로 구전돼 왔다.







안 의사는 친척인 안동렬씨의 소유였던 그 집에 1908년 4~6월 머무르며 사격 연습 등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훈춘시는 중국 동포들의 이런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해 초가집과 그 일대를 2005년부터 '안중근 의사 유적지'로 지정하고 정비·관리해 왔다.







당초 이 고택 앞에는 안 의사 관련 유적지임을 알리는 '안중근 지사 생애'라는 제목의 나무 소재 푯말이 있었지만 중국 동포와 훈춘시 지원 아래 나무 푯말은 '안중근 의사 생애'라는 제목의 석비로 바뀌었고 초가집 안에는 안 의사의 사진과 관련 자료 등이 전시되는 등 관리돼 왔다.







중국 동포들뿐만 아니라 훈춘시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자 한 때 이곳을 찾는 안중근 의사 관련 단체와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안중근의사 숭모회의 이주화 학예팀장은 "2005년 이후 5~6년간 1년에 3~4차례 이 곳을 찾았다"며 "당시에는 숭모회뿐만 아니라 안 의사 관련 단체와 답사단이 단골로 들르는 코스였다"고 설명했다.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인 2009년까지도 대규모 방문단이 이곳을 찾는 등 발길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관광객 등 방문이 줄어들고 안 의사 관련 단체들도 관심을 갖지 않기 시작하면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내부 물품 등은 파손된 채 비치됐고 마당에는 잡초까지 무성하게 자란데다 마당 한 쪽에 세워져 있던 석비마저 누군가 훔쳐가 유적지보다는 '폐가'에 가까운 모습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항일 유적지를 발굴·보존하는 작업을 하는 한 단체 관계자는 "지난해 7월쯤 아예 허물어지다시피 한 것으로 안다"며 "관광객 등 방문이 끊긴 이후에도 중국 동포들이 관리를 해왔는데 최근 관리비용 등 800만원이 없어 관리를 포기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 중국 동포 등이 안중근 의사가 1908년 3~4개월 정도 머물며 사격 연습 등을 했다고 주장하는 고택의 잘 보존됐을 당시 내부 모습. (안중근의사 숭모회 제공)© News1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 등에 대한 지원을 총괄하는 국가보훈처도 이런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초가집이 안 의사의 거처였다는 걸 입증할 '역사적 사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지원이 힘들다는 입장이다.







통상적으로 보훈처는 이런 유적지에 대한 주장이 있을 때 학계에 고증을 의뢰한 뒤 학자들이 역사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회신해오면 지원 등을 검토한다.







보훈처는 당시 이 사안과 관련 독립기념관과 중국 옌벤대 등과 공동조사를 벌였지만 '혈세'를 이 초가집 일대 유적지 보존을 위해 지원하기에는 안 의사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료가 부족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보훈처 관계자는 "훈춘시에서 2005년 당시 정비할 때도 역사적 고증이 아닌 중국 동포들의 전언을 듣고 '보존'작업이 아닌 '복원'을 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안 의사 관련 단체와 학계 입장도 비슷했다.







안 의사 자서전 등에 따르면 1908년 4~6월 안 의사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머무른 것으로 기록돼 있고 당시 여러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훈춘 한곳에 3개월간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다만 안 의사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같은해 7~10월 안 의사가 그 초가집에 머물렀을 가능성은 전혀 배제할 순 없지만 이 또한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분석했다.'



















▲ 안중근 의사가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고택 앞에 있었던 석비. (안중근의사 승모회 제공) © News1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그 곳이 거처였다는 문헌상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당시 안 의사가 북간도로 건너간 시점, 연해주로 건너간 시점, 북간도 안에서 왔다갔다한 동선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봤을 때 훈춘에서 3~4개월 머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주화 팀장은 "초가집이 안 중근 의사 친척 중 한 명의 소유였다고는 하지만 가계도에 따르면 안동렬씨는 최소 10촌 이하에 포함되지 않은 아주 먼 친척으로 파악된다"며 집 소유주와 안 의사의 상관성을 낮게 봤다.







초가집 일대 유적지를 다시 복원하려는 최근 훈춘시의 움직임에 대해 이 팀장은 "일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중국이 외교·역사적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한·중 항일 유적지 정비 사업 차원일 수 있다"며 "아울러 중국 입장에서는 한국 관광객 유치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 나쁠 게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료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현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돼 내려온 내용인 만큼 '역사적 사실' 판단에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신운용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은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던 안 의사가 1908년 패전 뒤 7월쯤부터 홀로 유랑을 했는데 당시 정주(定住)를 하거나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사정이 안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역사 기록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구전돼서 계속 내려오는 이야기도 역사에서는 차용하는 경우가 있다"며 "사료 부족 등 이유로 한국 정부 차원에서 지원이 어려운 점은 있을 수 있지만 중국 동포나 훈춘시가 관광목적으로 지키고 보존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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