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쉼터 혹은 부산의 몽마르트
“전철 타는 거 공짜지, 또 밥 주지, 그러니까 공원에 나이든 노인네들이 많이 와요. 오전 11시 반 정도 되면 급식소에 줄을 좍 서요. 지하철 공짜고, 공원에 오면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친구들과 바둑도 두고, 이야기꽃도 피우니 할 일 없는 노인들이 많이 찾는 거지요.” 장세환 사진사가 말한다. 지난 날 사진을 찍던 추억과 기억 속에 간직한 옛날을 잊지 못해서인가. 공원 여기저기 바둑판을 둘러싸고 서 있거나,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고단하게 오르내리던 194계단에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공원 접근이 용이하고 무료 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소일거리가 없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공원을 찾고 있다고 한다. 유독 할아버지가 많은 공원이라 시민의 종 앞 계단에 앉아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남녀 노인이 특별해 보인다. 주로 공원 아래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르신들에 비하여, 젊은 층들은 전망대를 배경으로 공원 위쪽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그 이유는 전망대 2층에 설치된 사랑의 열쇠와 포토 존 역할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여뽕, 많이 왔으니까 쫌만 더 힘내자 으쌰 으쌰 사랑해♥ 2013. 1. 29.”
“2022년에 결혼하자, 사랑해 오늘 우리 만난 지 176일 되는 날♡ 2013. 9. 8.”
“200일 기념 부산 여행! 200년 지나도 알콩달콩♥ 행복해 사랑해♥ 2013. 10. 27.”
용두산 공원 2층 전망대에는 알록달록 하트 모양에 적은 가지각색의 사랑 사연이 자물쇠와 함께 빼곡하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하트 모양의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고 둘만의 언약을 적은 자물쇠를 꼭 채워 그들만의 이야기를 간직하는 젊은이들과 홀로 나와 소일하는 어르신들의 하루를 품고 공원의 시간이 누적되고 있다.
태양으로 상징되는 젊음과 지는 노을빛으로 표현되는 노년의 시간이 함께하는 용두산 공원에는 시와 미술 또한 공존하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유치환 시 「그리움」]
대청동에서 중앙성당을 지나 용두산을 오르는 길에 청마 유치환의 시 「그리움」이 시비에 적혀 있다. 1994년 2월 25일 조성된 이른바 시의 거리는 청마 유치환의 「그리움」 외에도 “그대 눈물 그만큼/ 그 빛깔만큼/ 세상은 그만치 살고 싶어지리라/ 한결 더 살고 싶어지리라”라고 노래한 박태문의 「봄이 오면」, 최계락의 “복사꽃 발갛게 피고 있는 길”로 시작하는 「외갓길」, “나는 곰이로소이다/ 미련히도 굼되고/ 못나디 못난 곰이로소이다”라고 노래한 홍두표의 「나는 곰이로소이다」가 공원을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밖에 장하보의 「원」, 조향의 「에피소드」, 손중행의 「세월」, 원광의 「촛불」, 김태홍의 「잊을래도」 등 총 9편의 시가 비석에 새겨져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구 대청동에서 용두산 공원으로 오르는 길이 시의 거리라면 중구 광복동에서 용두산 공원에 당도하는 지점은 미술의 거리이다. 광복동에서 194계단 대신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용두산 공원에 도착하면 만나게 되는 미술의 거리는 이른바 몽마르트를 꿈꾸며 2008년 10월 조성된 것인데, 즉석에서 초상화를 그려 주는 거리의 화가를 만날 수 있다. 부산광역시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을 벤치마킹하여 용두산 미술의 거리를 꾸몄는데, 화가 작업실과 공예품 판매용으로 설치한 일곱 개의 부스가 각양각색의 색깔 옷을 입고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있다.
몽마르트는 가파른 언덕에 불과하지만 고흐, 모딜리아니, 피카소, 로트레크 등이 가난하였던 무명의 젊은 날을 보내면서 남긴 일화들로 예술가나 여행가에겐 성지가 된 곳이다. 용두산 공원과 공원을 감싸는 중구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도 김환기, 이중섭, 한묵, 박항섭, 최영림 등 우리나라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이 피란 시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긴 곳이다. 미술 도구를 살 돈이 없었던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린 것도 이 시기이다.[부산시 인터넷 신문 『다이내믹 부산』1343, 2008. 10. 22]
용두산 공원은 광복동·동광동·대청동·중앙동 등 원도심의 재개발과 맞물려 일찍부터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공원으로의 재창조론이 거론되어 왔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원 문화의 시행은 시비(詩碑)를 초등학생 줄 세우듯 즐비하게 늘어놓는 품위 없는 설치 구도, 처음 시도와는 달리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는 등 쉽게 드러나 보이는 단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지고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전통과 현대를 모두 아우르는 행사가 특히 돋보인다. 대표적인 행사가 전통 놀이마당과 ‘용골 프로젝트’로 불리는 힙합 댄스 마당으로 볼 수 있다.
1997년 10월 문화유산의 해 전통문화 행사 ‘시민과 함께하는 부산 민속 한마당’은 부산의 무형 문화재 예능 보유자들이 한데 모인 성대한 민속 잔치로 용두산 공원 특설 놀이마당에서 꾸며졌다. 살풀이춤, 강백천류 「대금 산조」[중요 무형 문화재 제45호], 「수영 야류」[중요 무형 문화재 제43호]와 사물놀이, 민요 메들리, 「가야금 산조」[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8호], 「부산 농악」[중요 무형 문화재 제6호], 「동래 학춤」[중요 무형 문화재 제3호], 판소리, 북춤 등의 마당이 펼쳐졌다.[최학림, 「문화유산의 해, 시민과 함께하는 우리 것 알기 ‘풍성’」, 『부산 일보』]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비보이들의 힙합 댄스가 세계 무대를 석권하면서 젊은이들의 저항과 열정 발산의 상징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비보이들의 성지가 용두산 공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부산을 떠났던 비보이들이 ‘용골 프로젝트’로 다시 돌아와 2007년 4월 문화 복지 공동체인 사상프린지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산지부 주최로 공연을 펼쳤다.
마땅한 놀이 시설이 없던 시절 도심에 있는 용두산 공원은 세상에 없는 놀이 공간이었고 부푼 가슴의 청년들이 모이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자연 발생적으로 모여든 청소년 춤 모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힙합 무대, 청소년들의 야외 마당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던 지역의 열악한 현실에서 용두산 공원은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 ‘전국 힙합 메카’, ‘비보이들의 성지’, ‘용골 춤판’ 등으로 회자되는 힙합 댄스 마당은 용두산 공원의 근대성을 탈 근대적 놀이 공간으로 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문재원, 「역설의 공간: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14) 용두산 공원」, 『국제 신문』]
2007년 개최된 제9회 힙합 댄스 경연 대회는 서울·구미·포항·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팀들이 참여하여 전국적 규모를 과시하였고,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이전 종각 앞의 무대가 아닌 용탑이 있는 용두산 큰 광장에서 진행되었다.(『중구 신문』, 2007. 5. 25] 1999년 처음 시작하여 쌍둥이 가수 ‘량현량하’, 댄스 신동이라 불렸던 ‘구슬기’ 등의 스타를 배출하였던 전국 최대의 힙합 댄스 경연 대회는 비보이들의 성지 용두산 공원에서 매년 벌어져 젊은이들의 끓어오르는 에너지 발산 창구 역할을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렇게 억압과 침탈, 가난과 고단한 삶의 상징이었던 용두산 공원은 이제 젊음과 노년, 전통과 현대,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시민의 숲으로 거듭나고 있다. 부산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진 부산 타워가 오늘도 여전히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줄행랑을 치는 자동차 물결로 휘황한 부산의 원도심 거리를 굽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