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로운 운무에 휩싸인 루산


중국 장시(江西)성에 위치한 루산(庐山)은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다. 중국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번 다녀온 사람은 루산을 잊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루산의 안개를 잊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루산에는 안개가 흔하다. 산허리마다, 도시 골목마다, 맑은 호숫가마다 습습한 안개가 가득하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대를 에둘러 싼 안개는 도시 전체를 전설로 만든다.


북쪽으로는 주강(九江)을 통해 창장(长江)과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넓은 호수인 파양호(鄱陽湖)가 있다. 창장과 파양호 사이의 너른 평원에 불쑥 솟아있는 루산은 강과 호수와 산이 어울린 명산으로 꼽힌다. 루산의 유명한 운무(雲霧)는 창장과 파양호에서 대량의 수분이 증발하여 공중으로 올라와 고산의 찬 공기와 부딪쳐 만들어내는 것이다.









▲ 루산의 운무는 마치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끔 만든다


루산에 구름이 끼는 날은 1년 중 약 190일 정도라고 하는데, 여름철에 가장 많은 구름이 형성된다. 여름철 운무는 산정상 부근에 형성되는데, 여러 봉우리에는 항상 구름이 피어올라 날이 개었다가 흐렸다가 하면서 변화무쌍한 운무를 형성한다. 이에 비해 가을에는 수분이 응결되는 위치가 여름보다 낮아져서 산허리에 구름이 형성되어 또 다른 운치를 느끼게 한다.


루산의 구름은 어떤 때는 가벼운 연기같이 피어 오르고, 어떤 때는 한 필의 비단같이 허공에 떠 있고, 어떤 때는 말(馬)이 치닫는 형상을 이루기도 한다. 또한 어떤 때는 암봉을 휘감아 돌아 그윽한 선경을 이루고, 어떤 때는 폭포 같은 폭포운(瀑布雲)을 형성하는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루산의 운무를 일러 주자(朱子)는 “구름의 처음과 끝을 누가 알겠는가?”(雲誰究始終)라 했고, 청대의 황종희(黃宗羲)는 “루산에서는 비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구름이 소리를 내고, 구름속은 바다속 해초 같다”고 삼기(三奇)라 일컬었다.


루산의 이같은 변화무쌍한 운무는 많은 문인들을 사로잡았다. 시인 도연명 (陶淵明, 365~427)은 루산을 배경으로 평생 시작에 몰두했다. 요산의 북쪽 기슭은 현재 주장시인데 당시에는 쉰양(浔阳)이라 불렸다.






365년 쉰양의 시상이라는 마을에 유명한 시인인 도잠, 도연명이 태어났다. 젊었을 때 관리가 된 도연명은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났다. 이때의 심정을 서술한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유명하다. 도연명의 시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음주(饮酒)’20수 가운데 제5수를 보면,


結廬在人境 마을 안에 엮어 놓은 오두막집
而無車馬喧 시끄러운 수레 소리 들리지 않네
問君何能爾 어찌 그럴 수 있나 생각하니
心遠地自偏 마음이 멀면 사는 곳도 외지다오
採菊東籬下 동쪽울타리 밑에서 국화 꺾어드니
悠然見南山 그윽히 보이는 남산
山氣日夕佳 산기운이 석양에 아름답고
飛鳥相與還 나는 새들도 무리 지어 돌아가누나
此中有眞意 이 가운데 있는 참뜻
欲辯已忘言 설명하려고 하나 이미 말을 잊었도다


인경이란 사람이 사는 마을을 뜻하는데, 마을 안에 오두막집을 지었지만 방문객이 오가는 시끄러운 마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들고서 그윽히 남산을 바라보았다...이 남산은 주장시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니 곧 루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400년 정도 뒤인 815년 시인 백거이 (白居易, 772~846)가 장주(江洲) 사마(司马)로 좌천되어 이곳에 왔다. 재임기간 중에 그는 루산 향로봉 아래에 초당을 지었다. 초당이 완성되었을 때 백거이는 ‘초당(草堂)에서’라는 시를 지었다.






▲ 백거이(白居易)


日高睡足犹慵起 해가 높이 떠도 일어나기 귀찮고
小阁重衾不怕寒 이불 겹쳐 덮으니 추위도 모르겠다
遗爱寺锺奇枕听 유애사 종 울리면 베개 괴어 귀 기울이고
香炉峰雪拨廉看 향로봉 내린 눈은 발을 젖히고 바라본다
匡庐便是逃名地 이곳 루산은 이름 피해 살 만한 곳
司马仍为送老官 사마 벼슬, 늙을 녘을 보내기 안 족하랴
心秦身宁是归处 마음과 몸 편하면 내 살 곳이니
故乡何独在长安 어찌 고향이 장안 뿐이랴


장주 사마로 좌천된 백거이의 마음은 약간 비뚤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의 장관은 자사(刺史), 차관은 장사(长史)로 사마는 그 다음 직급) 하지만 그는 특별히 장안만이 고향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이곳 루산 같은 곳이야말로 돌아가야 할 땅이라고 말했다.


이백이나 두보의 시가 지식인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백거이의 시는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백거이가 복숭아꽃을 노래했다는 화경(花径)은 지금도 루산의 명소가 되고 있다. 화경의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해방 뒤인 1961년에 만들어진 인공연못으로 ‘여금호(如琴湖)’라고 한다.









▲ 루산의 백거이 초당,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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