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통신 2015-4-19) 홍익희 교수는 전직 코트라 맨이다. 현혁시절 미국과 여러 유럽 다양한 나라에서 근무을 했다. 그가 30년동안 근무했던 코트라는 수출 지원업무가 가장 큰 업무다.



그런 그가 매번 부닥쳐야 하는 관문이 있었다. 유태인들이다. 무역이 있는 곳에는 그들이 있었고 그들의 벽을 넘어야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곤 했다고 말한다. 수출지원 현장에서 그가 가장 궁금한 유태인의 역사, 종교, 경제, 환율 등이 출판되어 스테디 셀러 반열에 올랐다.



그의 끝없는 집중력에서 만들어진 유태인 관련 책들 속에서 한국인들이 얻어야 하는 수많은 비밀들이 기록되어 있다.  













▲ 홍익희 교수 




아래 홍교수의 글은  미래의 오피니언 종사자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어 페북에 올라온 글을 공유한다.  



▶ 유대인 창의성의 비밀 (1) / IT 산업의 유대인들



1980년에 유대인 앨빈 토플러는 정보혁명에 의한 ‘제3의 물결’을 예견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유대인 부호들의 주된 관심사는 금융과 부동산과 유통업이었다. 당시 IT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유대인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유대인들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이 분야에서도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 분야를 유대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구글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무렵 그 많던 검색엔진 시장에서.



그들은 세상보다 딱 반보 앞서 나갔다. 성큼 성큼 앞서 나가는 천재들을 세상은 그리 반겨하지 않는다. 수많은 천재들이 비운에 사라진 이유이다. 시장은 딱 반보 앞에서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며 대중을 이끌어주는 자를 반긴다.



그들은 정보의 가중치에 착안하였다. 고객이 검색하는 정보를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검색창에 뜨게 한 것이다. 이 알고리즘을 유대인 대학원생들이 만들어 냈다. 당시 스탠퍼드 대학 박사과정생이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검색시장을 평정하였다.



재미로 하버드 여학생들의 사진을 올려 등수를 매기던 한 유대인 악동이 있었다. 이것이 발전한 게 페이스북이다. 마크 주커버그가 개발한 페이스북은 그 많던 메신저 시장에서 친구의 동정을, 그 감성을 시를 쓰듯 사진을 보듯 알려줌으로써 시장을 제패했다. 곧 중국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가 등장할 것이다. 페이스북 공화국이라고.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 북 CEO 






오라클의 탄생은 세상을 재빨리 읽은 결과였다. 래리 엘리슨은 남이 개발한 상업용 데이터베이스 시장의 미래를 간파한 것이다. 컴퓨터용 소프트웨어가 개인용뿐 아니라 상업용으로도 그 가능성이 무궁하게 확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상업용 데이터베이스를 남보다 빨리 상업화하여 세계 3위의 거부가 될 수 있었다. 기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통찰력이다. 그런데 그게 대수로운 감각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감각이 별거인 것이다. 딱 반보 앞서... 세상을 본 덕분이다.오라클의 탄생은 세상을 재빨리 읽은 결과였다.



래리 엘리슨은 남이 개발한 상업용 데이터베이스 시장의 미래를 간파한 것이다. 컴퓨터용 소프트웨어가 개인용뿐 아니라 상업용으로도 그 가능성이 무궁하게 확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상업용 데이터베이스를 남보다 빨리 상업화하여 세계 3위의 거부가 될 수 있었다. 기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통찰력이다. 그런데 그게 대수로운 감각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감각이 별거인 것이다. 딱 반보 앞서... 세상을 본 덕분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인 스티븐 볼머




엘리슨의 뒤를 잇는 유대인 부호는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인 스티븐 볼머다. 친구들은 그를 스티브라 부른다. 그는 회사 창립자도, 창립자의 친척도 아니다. 1980년 평직원으로 입사하여 1998년에 회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하버드대학에 입학하여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빌 게이츠와 절친한 포커 친구로 지냈다. 빌 게이츠는 창업 후 영업이 한계에 부닥치자 그를 떠올렸다.



당시 볼머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빌 게이츠의 요청을 받고 그가 1980년에 MS에 합류했다. 둘은 경영상의 이견으로 싸움도 불사했다. 허나 결과를 보면 번번이 볼머의 승리였다. 빌 게이츠는 경영은 볼머가 한 수 위라 인정하고 경영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훗날 빌 게이츠는 그가 있었기에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스티브가 1인자고, 나는 2인자다.” 빌게이츠가 스티브 볼머를 두고 한 말이다.





















마이크 델



델컴퓨터의 창업자 마이크 델의 성공 스토리도 어찌 보면 대단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유통업체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판다’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마이크는 18세에 대학 기숙사에서 이 아이디어 하나로 성공한 사람이다. 창업 당시에 컴퓨터를 싸게 만들 수 있었던 일화가 있다.



그는 컴퓨터 매장들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재고로 남은 구형 컴퓨터들을 대량으로 아주 헐값에 구입했다. 이른바 땡처리 물량이었다. 그런데 마이클 델은 단순히 그냥 판 게 아니라 컴퓨터 부품을 분해한 뒤 소비자들이 원하는 컴퓨터로 업그레이드하여 팔았다. 그것도 중간유통망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며 많은 이득을 얻었다. 델컴퓨터가 한 시대를 풍미한 이유이다.


















앤드류 그로브



인텔의 성공 스토리도 어찌 보면 단순하다. 앤드류 그로브는 잘 나가던 D램 사업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핵심역량을 집중한 후 성공할 수 있었다. 될성부른 떡잎에 핵심역량을 집중한 것이다. 이러한 떡잎을 알아본다는 게 대단한 안목인 것이다.



















어윈 제이콥스



퀄컴의 창업자 어윈 제이콥스도 MIT 대학교수 출신 유대인이다. 퀄컴이 개발하여 특허를 취득한 CDMA(부호분할 다원접속)는 1999년 차세대 휴대전화의 세계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이로써 1999년 이 회사의 주식이 25달러에서 520달러로 급등했다.



그 뒤 매년 거두어들이는 특허료 수입만으로 엄청난 기업이 되었다. 퀄컴을 간단하게 말하면 칩도 생산하지만 그보다는 지적재산권으로 사업을 하는 회사다. 회사가 사실상 7천 개의 실험실로 구성되어 있다. 연간 벌어들이는 100억 달러 이상 매출액의 30퍼센트 가까이가 순이익으로 남는 회사다.



디지털 이동통신은 1992년 유럽에서 GSM 방식이 제일 먼저 상용화 되었다. 1993년 일본의 PDC방식과 미국의 TDMA방식과 CDMA방식이 상용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이때 퀼컴의 CDMA 방식에 결정적으로 손을 들어준 것이 한국이었다.



우리나라가 1993년 퀄컴의 CDMA 방식을 이동통신 표준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리고 실험실 수준에 불과했던 퀄컴의 CDMA 기술을 공동 개발하여 1996년 세계 최초로 SKT가 CDMA 시스템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이 휴대전화 생산대국으로 크면서 퀼컴 매출액의 3분의 1 가량이 한국에서 발생하여 한국은 퀄컴의 최대시장이 되었다.






















블룸버그



퀄컴의 창업자 어윈 제이콥스도 MIT 대학교수 출신 유대인이다. 퀄컴이 개발하여 특허를 취득한 CDMA(부호분할 다원접속)는 1999년 차세대 휴대전화의 세계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이로써 1999년 이 회사의 주식이 25달러에서 520달러로 급등했다.



그 뒤 매년 거두어들이는 특허료 수입만으로 엄청난 기업이 되었다. 퀄컴을 간단하게 말하면 칩도 생산하지만 그보다는 지적재산권으로 사업을 하는 회사다. 회사가 사실상 7천 개의 실험실로 구성되어 있다. 연간 벌어들이는 100억 달러 이상 매출액의 30퍼센트 가까이가 순이익으로 남는 회사다.



디지털 이동통신은 1992년 유럽에서 GSM 방식이 제일 먼저 상용화 되었다. 1993년 일본의 PDC방식과 미국의 TDMA방식과 CDMA방식이 상용화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이때 퀼컴의 CDMA 방식에 결정적으로 손을 들어준 것이 한국이었다.



우리나라가 1993년 퀄컴의 CDMA 방식을 이동통신 표준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리고 실험실 수준에 불과했던 퀄컴의 CDMA 기술을 공동 개발하여 1996년 세계 최초로 SKT가 CDMA 시스템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이 휴대전화 생산대국으로 크면서 퀼컴 매출액의 3분의 1 가량이 한국에서 발생하여 한국은 퀄컴의 최대시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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