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당시 톈안먼광장을 가득채운 홍위병들.[사진=바이두]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문화대혁명(문혁)은 1949년 신중국 성립이후 중국의 가장 쓰라린 역사다. 문혁의 고통이 너무도 깊기에 중국인들은 아직도 '문혁'이라는 단어에 몸서리를 친다. 그들에게 문혁은 일제침략과 마찬가지로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역사다. 하지만 난징(南京)대학살이나 731부대참상 등은 기념관을 짓고 미래세대에 경고를 남기지만, 문혁은 변변한 기념관하나 짓지 않았다. 문혁이 발발한 5월16일을 기념하는 행사도 없고, 과거를 돌아보는 세미나나 학술 포럼조차 열리지 않는다. 문혁발발 50년째인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 논란거리인 역사를 직접 마주하지 않은채 분열을 막는 것은 현재 중국공산당(중공) 체제의 강점이다. 하지만 뼈아픈 역사를 역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현 체제의 한계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과거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를 극복하고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이겨낸 군사영웅이며, 중국 본토를 통일시킨 민족영웅이다. 마오는 그야말로 중국공산당의 '기둥'이자 '혼'이다. 마오가 남긴 숱한 일화, 힘차면서도 아름다운 시(詩), 절묘한 서화 등에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이 감동을 받고 용기를 얻는다. 마오가 흔들리면 중국공산당 역시 흔들릴 수 있다.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아직도 마오의 존재가 필요하다. 하지만 마오는 문혁 10년 광풍을 일으킨 주범이기도 하다.

1976년 사망한 마오에 이어 1978년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한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오와 문혁에 대한 입장표명을 두고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덩샤오핑은 문혁 4인방을 척결하고, 지난 10년동안 좌천됐던 인사들을 중용하고, 문혁당시 벌을 받았던 인사들을 사면복권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문혁의 의미를 정리해야 했고, 이는 당시 지식인들의 요청이자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중국공산당은 1981년 문혁에 대해 "당과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안겨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라는 공식 평가를 내렸다. 동시에 덩샤오핑은 "마오의 공(功)은 7, 과(過)는 3"이라는 말로 이미 사망한 마오를 보호했다. 이같은 덩샤오핑의 평가에 인민들은 수긍했다. 그리고 마오는 여전히 중국인들의 영웅이며, 톈안먼에 걸려있는 마오의 초상화는 중국 인민들을 마주하고 있으며, 수많은 인민들이 줄을 지어 마오를 참배한다.

문혁은 1966년 5월16일 중공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가 발표한 '5·16통지'로부터 시작됐다. 이를 기점으로 당시 지도부가 주자파로 몰렸으며, 어린 홍위병들이 무차별적인 극좌행동에 돌입했다. 자식이 부모를 주자파로 고발하고, 제자가 스승을 주자파로 핍박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홍위병의 학대를 못이겨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전 사회가 작동을 멈췄고 무수한 인명이 희생됐다. 문혁으로 인해 마오는 다시금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그 폐혜는 너무나도 컸다.

문혁은 마오의 가장 큰 과오이기에, 문혁에 대한 평가는 마오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마오에 대한 평가는 사회분열을 낳고, 또다른 노선투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분열을 막기위해 중국공산당은 문혁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들을 금하고 있다. 올해 문혁발발 50주년 역시 아무일 없던 듯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다만 문혁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중공의 인식은 명확하다. 문혁 50주년을 6일 앞둔 지난 10일 인민일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월 행했던 강연록을 뒤늦게 공개했다. 강연록에서 시 주석은 "지도사상의 좌경화로 문혁 10년 동란이 발생했다"며 좌경화를 경계했다. 마오를 필요로 하면서도, 마오의 잘못은 경계해야 하는 중공의 딜레마는 '마오가 필요없어질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본 기사는 아주경제 홈페이지에서 전제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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