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민족 서예사는 100년

19세기 중엽에 조선인들이 鴨綠江, 豆滿江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 본격적으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왕조 말에 조성된 기아와 빈곤 등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는 데 있었다.

朝鮮 후기 정치기강의 해이와 탐관오리의 발호, 그리고 빈발하는 民亂 등도 渡江 移住를 促發시킨 중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地理的으로 西北間島는 韓半島와 連接해 있어서 함경도, 평안도 일대의 변경 지대에서는 鴨綠江과 豆滿江을 건너면 바로 西北間島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이주 旅程이 容易하고 또한 산천지형이 낯설지 않아 西北地方의 貧民이 쉽게 間島로 이주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北間島 이주 초기 단계에서는 朝鮮人들이 두만강변의 무산․종성․회령 등지에서 渡江한 뒤 강기슭의 산골짜기를 따라 海蘭江 이남 일대, 즉 豆滿江에서 멀지 않은 분지와 산기슭에 朝鮮人 村落을 형성하였다. 그 뒤 北間島 도처에 朝鮮人 마을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朝鮮人들은 北間島에 이주 정착하게 되자 각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瘠薄한 땅을 개척하여 水田農을 실시하였던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의 龍井市 開山屯鎭 천평일대와 용정 부근 해란강변의 瑞甸大野 일대가 朝鮮人들이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예로부터 後代敎育을 남달리 중시한 朝鮮民族은 중국에 移住한 初期부터 마을마다에 書堂을 設立하고 子女들을 敎育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 朝鮮民族의 民族敎育은 迂餘曲折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發展하여 왔다. 書堂敎育으로부터 시작된 중국 朝鮮民族 敎育史는 朝鮮民族 歷史의 重要한 構成部分이다.

1883년 龍井에 最初의 書堂이 서게 되고 1887년에 黑龍江省 遼河縣에 順華書堂이 섰다. 그 후 東北三省 各地에 연이어 朝鮮民族 書堂이 設立되었다. 愛國志士이며 漢學者인 金躍淵은 敎育의 重要性을 감안하여 1901년 4월에 圭巖齋라 일컫는 書堂을 차렸다. 주로 漢學을 전수하는 구식 교육이었으나 이것이 중국 朝鮮民族社會가 갓 형성된 時期인 20세기의 첫 배움터로서 敎育史上 아주 큰 意義를 갖고 있다.


서전서숙-도편

1905년 乙巳條約이 체결되고 1910년 韓日合倂으로 일본이 朝鮮을 완전히 강점하자 朝鮮의 독립운동가들과 애국지식인들은 延邊을 비롯한 東北三省 朝鮮民族 거주 지역에 망명하여 와서 거점을 마련하고 근대적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펼쳤다.

중국에서 제일 처음 설립된 朝鮮民族 사립학교는 이상설이 1906년에 龍井村에 설립한 瑞甸書塾이었다.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비록 8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新文化運動의 불씨를 뿌려 전국에 확산되게 하였다. 그 후로 和龍縣 大立子 明東村의 明東書塾, 局子街의 光星書塾, 流河縣의 東明學校, 吉林省 永吉縣의 吉興學校등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어 민족의 교육에 앞장섰다.

不完全統計에 의하면 1916년 말까지 延邊地域에 세워진 여러 가지 유형의 사립학교는 158개였는데 그 학생 수는 3,879명이었다.

민족의 애국시인 尹東柱가 다녔던 학교인 明東學校의 전신인 明東書塾은 1908년 4월 27일에 설립되었는데 초기의 名譽塾長에 朴禎瑞였으며, 1910년에 明東中學으로 발전되어 圭巖齋를 운영하던 金躍淵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明東學校 교과목에는 성경, 국어, 한문 도화 외에도 습자과목이 있었다. 明東學校는 成立되어 중학부가 폐지된 1925년까지 무려 1,000여명의 청년학생을 졸업시켰다. 그 중 적지 않은 청년은 反日 民族 獨立運動에 참여하였으며 이름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金光振, 尹東柱, 羅雲奎 등은 모두 明東中學 출신이다.

1906년에 설립된 서전서숙은 중국 조선민족의 첫 사립학교로서 조선민족 교육사가 100년이 된 증거이며, 교과목에 <습자>과목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민족의 서예사는 교육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중국 조선민족 서예사는 1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 중국발 뉴스&정보-온바오닷컴(www.onbao.com)
관련뉴스/포토 (12)
#태그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