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명장, 지압장군 이야기    6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1950년 9월에서 11월에 걸쳐 국경원정을 단행한 프랑스군은 9개 대대가 섬멸 당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로서 750km의 베트 남 중국 국경지대의 모든 통제권을 상실 하고 만다.


이제 프랑스의 베트남 재정복의 꿈은 날아가 버렸다. 처음으 로 식민지 군에 패배한 프랑스는 이제 방어적인 입장이 되었 다. 그래서 프랑스의 정책은 미국의 "봉쇄정책" 즉 아시아에서 더 이상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둑을 쌓는 정책에 합 류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그 빌미를 제공하였 다. 전쟁을 베트남 내전(바오다이가 통치하는 합법적인 정부 와 호가 싸우는 내전)으로 만들고 미국을 개입 시키기 위하여 베트남 주둔 프랑스 장군인  드 라트르는 워싱턴에서 "통킹 을 잃으면 수에즈 이쪽으로는 더 이상 아무 방어망도 없다"고 발 표하였다.


이리하여 미국은 1952년부터 무상으로 9만 2천톤에 해당하는 물자를 공급하였으며 953년에는 프랑스군이 베트남에서 지출 한 비용의 40%를 미국이 물어주었다.


한편 베트남 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진영의 전초기지가 되어 버렸다. 주로 중국에서 매달 1000톤에 달하는  군사물자가 베 트남의 40만 병력을 무장 시켰으며 이로서 월맹군은 근대전과 게릴라 작전, 그리고 대규모 공격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에 프랑스는 원래 병력 2만을 15만으로 증강 시켰는데 이 병사들은 프랑스인,베트남인,모로코인,세네칼인 등으로 구성 되었고 심지어는 구 나치대원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투 자를 하였음에도 인도차이나 대부분이 월맹의 손아귀에 들어 가 있었다.


미국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참가는 1954년 3월 29일  뉴 욕의 해외 프레스센터에서 행한 아이젠하워의 "인도차이나는 전략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중요하므로 방어하지 않으면 안된 다. 인도차이나를 상실하게 되면 그외의 여러나라에도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인도차이나를 잃게되면 태국과 필리핀 은 전략적으로 포위당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동남아를 모두 잃게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위협받는 양상이 될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전쟁반대>


당시 합중국 정부는 "소련 제국주의에 지배 당하고 있는 어떤 지역에도 민족독립이나 민주적 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 신한다. 현 정세는 인도차이나 연방제국과 프랑스에 관한 합 중국의 경제원조 및 군사 물자의 제공을 요청하고 있다고 생 각한다. 목적은 이들 국가가 안정을 회복하도록 도와 그들이 스스로 평화적 민주적 발전을 추구해 나가도록 하는데 있다" 이 정책은 투루먼 대통령에 의해 구체화 된다. 그는 인도차이 나의 프랑스군 및 연방국 군대에 대한 군사원조의 증강 그리 고 그들과 긴밀한 작업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군사 사절단을 파견한다고 공표 하였다.


프랑스와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급격히 증가 하고 있음에 북베트남에 대한 소련의 새로운 관심으로 프랑스공산 당은 이 더러운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펴고 많은 프랑스 국내인들이 전쟁반대를 원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다 보니 프 랑스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이는 나중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와 마찬 가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궁극적으로 국내의 충분한 지지 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야 말았다.







<프랑스 베트남에서 철군시작>


1954,5 디엔비엔푸 전투는 중국이 인해전술을 권유하였으나 지압장군은 극히 짧은 시간에 포병부대를 비롯한 모든 물자를 집중 시켰는데 이것이 프랑스군의 예측을 무력하게 만들고   프랑스의 화력이 우세하다는 신화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략은 외교적 주도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 회담이 열리기 8일전이었다. 회담이 열릴 5월8일은 프랑스기 전투에서 항복한 다음날 이었다. 이 승리로 지구 전체의 식민주의에 조종을 울리게 되었다.


미국은 제네바협정이체결되기전인 1954.7.7 응오디엔지엠 을 귀국 시켜 수상에 오르게 하고 제네바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는 구실로 공개적으로 응오디엔지엠 에 대한 원조를 추진 시 켰다. 그후 미국과 지엠정권의 압력에 의해 프랑스는 1956년 4월 베트남에서 전면 철군을 결정 하였다.







<응오디엔 지엠>


제네바 협정에 따라 호치민은 전 베트남군을 남부에서 철수 시켜야 했다. 그러나 호치민 군대의 철수 완료 후에도 베트민 을 지지하는 수십만의 유격대원은 남아 있었다. 그들은 농촌 으로 귀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엠의 테러 정책은 즉각 테러로 보복을 당하였다.


지엠의 폭력행위는 그가 적이라고 생각한 주민을 목표로 하였 으나 베트민은 그 목표를 지엠의 앞잡이로 국한 시켰다. 그런 앞잡이들의 죽음을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까닭 에 지엠은 카톨릭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 으나 베트민은 카톨릭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지지 를 받았다. 처음에는 일련의 테러행위에 대한 보복과 그리고 보복에 대한 보복이 진행되는 형태였지만 차츰 전면 전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1955년 7월20일부터 바오다이가 지명한 응오 딘 지엠의 정부와 베트남 민주공화국 당국자들이 이 선거를 논의 하였다.  미국과 응오 딘 지엠은 협정 준수를 약속 하면 서도 거기에 서명은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제네바협정은 긴 전쟁의 한 휴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지엠은 선거를 치르기 위한 합의를 하자는 북측의 제안을 거 부하고 바오다이를 제거하고 남부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후에 베트남 남쪽의 수뇌부와 치안기구 그리고 치안행정을 장악 하 였는데 이때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을 받게 된다. 1955년 5월부터 일년간 멸공작전을 시행하여 남부공산당원의 90%정도를 제거 시켰다. 이에 호치민은 공산당원들을 지하로 잠 입하여 저항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공산당원들은 무장 세력의 확대와 반 지엠 선전활동을 촉진하였고 남부의 꾸롱 강과 극남지역은 지하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