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연길의 부르하통하. 사진 : 한미예
▲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연길의 부르하통하. 사진 : 한미예
 
딸애가 애완견에 물렸다.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파랗게 질린 딸애를 보노라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목줄을 묶은 강아지가 곁에 와도 섬뜩한데 이건 목줄도 없이 제멋대로 뛰놀게 풀어놓은 강아지다. 그렇지 않아도 미리 개주인한테 개를 불러가라고 했으나 사람을 물지 않는다며 안심하라고 해서 방심한 사이 벌어진 일이다. 개주인한테서 넉넉히 치료비를 받아냈지만 이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요즘처럼 개가 사람대접을 받는 시절은 종래로 없었다. 개들이 요염하게 다리를 비비꼬고 꼬리를 제멋대로 저어대며 사람 가는 곳은 다 가고 사람 먹는 것은 다 먹고 사람 하는 짓은 다하면서 좋은 아파트에 좋은 승용차를 타고 유원지, 번화가, 녹음 짙은 벤치에서 생을 즐긴다. 그저 ‘사람이 개만 같아라.’고 할 정도다.

거기다 아무데나 응가하고 아무데나 쉬를 본다. 그리고 성질나면 사람을 물어도 개한테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욕하면 눈을 잠깐 내리깔고 들은 척 마는 척 하고 있으면 그만이다. 물론 개 주인이 치료비를 지불하는 것이 관행으로 전해 내려오지만 정신적보상과 일상의 피해보상을 받는 법적구조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

요즘 연길의 부르하통하 강변은 온통 사람천지 개천지다. 온통 응가고 땅이 젖은 곳은 개가 쉬를 본 자리다. 몸에서 개고기냄새를 휙휙 풍기는 여자들이 개를 데리고 혹은 끌고 갖은 추태를 다 부리며 산책을 나온다. 여자들의 개 사랑에 목이 메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남정네가 없인 살아도 개 없이는 못 살겠다는 눈치들이다. 아마 남정네가 싫어지면 짐 싸들고 개굴로 들어갈 참이다.

한번은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쉬쉬하기에 기웃거리고 봤더니 개가 쉬를 볼 때면 꼭 아랫집 승용차타이어에 본다는 것이다. 승용차주인이 한마디 했더니 개 주인이 개가 그러는 걸 어쩌겠냐며 사과는 커녕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우박이 떨어지는 것이 자연이치인 것처럼 개가 그 집 타이어를 봐두고 쉬하는 것도 막무가내라며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개 같은 이치다.

연길의 도심은 산책할만한 곳이 별로 없다. 공원과 부르하통하 강변이 개와 개주인, 개 응가와 쉬로 장식하다보니 연길은 온통 개세상이 되었다. 개를 안고 끌고 공중장소는 물론 서슴없이 버스를 타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시민을 위한 버스가 개차가 된 것이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가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해 개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개연길’이 된 것이다.

할 수없이 근처 연변대학뒷산을 산책 겸 등산로로 정하니 과수원가로 듬성듬성 들어앉은 농가에는 온통 똥개들 천지다. 다수 애완견도 목줄이 없는데 똥개에 목줄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인적이 드물고 공기가 좋아서 좋다. 대신 등산로 입구에 몽둥이를 갖춰두고 등산할 때마다 손에 들고 개만 보이면 휘휘 휘둘러 보이고 때리는 시늉을 해 본다. 그러다 보니 한쪽 팔에 기운이 올라 수류탄던지기를 하면 영락없는 1등이다.

‘키워준 개가 문다.’는 말이 있다. 딸애를 데리고 광견병예방접종 받으러 가면 개 주인들이 사랑하는 개한테 물려서 광견병예방접종 받으러 온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랑하면 깨물어주고 싶다더니 개도 주인이 사랑스러우니까 꽉 깨물어 준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서로 깨물어주는 것쯤이야 저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생면부지의 사람을 깨물어주면 이는 당연히 불법행위이고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웃기는 것은 애완견이 집집이 있어도 ‘개장집’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개고기 값도 상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랫집에서 ‘조선족개장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날씨가 흐리터분하면 주인의 콧노래가 위층에까지 들려온다. 점심과 저녁시간이면 식당이 시끄럽게 돌아가고 개고기냄새가 코를 찔러 창문을 열어 둘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아예 애완견을 안고 와서 이판사판 개고기를 먹어댄다. 품안의 개 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오늘의 중국사회는 물질만능의 시대를 맞으면서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공허하고 사리사욕에 젖어 허탈감에 빠져있다. 그만큼 정신적 의탁이 필요하고 향락이 추구된다. 그런 빈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은 것이 애완견이다. 그러나 개를 사랑하는 마음 못지않게 타인의 생명안전과 자연, 주거환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올바른 애완견문화를 정착시킬 수 없다. 또 공포감과 혐오감을 주는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한 애완견문화는 자칫 나태와 추태의 상징으로, 품위를 떨어드리는 문화로 전락되기 쉽다.(blog.naver.com/morae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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