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서열 6위, 왕치산















▲ [자료사진] 국무원 왕치산 부총리

시진핑(习近平) 총서기 취임 후, 중국 사회에 대대적인 부패 척결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부정부패 혐의로 중국 기관에 체포돼 조사받고 있는 지방 관료들이 몇십 명에 이르며 인터넷에 관료 부패가 폭로되면 신속히 조사에 들어가 면직, 파면되고 있다.



이 같은 부패척결 폭풍의 중심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이하 중앙기율위)가 있다. 중앙기율위는 당의 감찰기구로 당 관료의 부패를 조사하는 기관이며 한국으로 치면 감사원에 해당한다.



당 서열 6위인 국무원 왕치산(王岐山) 부총리는 지난해 11월 15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중앙기율위 서기로도 임명됐다. 시진핑 총서기가 취임 후 열린 첫 정치국 집체학습연설에서 “부패가 만연하면 당도 국가도 망한다”며 부패 척결을 강조한 상황에서 왕치산을 중앙기율위 서기로 임명한 것은 그만큼 그를 부패 척결의 최고 적임자로 신뢰함을 의미한다.



왕치산 부총리 겸 중앙기율위 서기는 중국 정부가 위기에 닥칠 때마다 해결사로 투입돼 왔으며 매번 난제를 해결해 당 지도부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소방대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기 국면이나 난제를 확실히 진화했다.



역사학도에서 ‘소방대장’이 되기까지

1948년 7월 산시성(山西省) 동북부에 위치한 톈진현(天镇县)에서 태어난 왕치산은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1969년 산시성 옌안현(延安县)으로 하방(下乡) 활동을 하게 됐다. 이 곳에서 3년간 있으면서 서민 생활을 경험했으며 활동 중에 만난 혁명원로인 야오이린(姚依林)의 딸 야오밍산(姚明珊)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다.



왕치산은 부인과 함께 1971년부터 73년까지 산시성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역사에 흥미를 느껴 시베이(西北)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해 4년간 역사를 공부한 후, 다시 산시성박물관에서 3년간 일한다.



1979년부터는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는 등 역사학도로의 길을 걷던 그는 1979년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된 장인어른 야오이린의 영향으로 1982년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6년 동안 농업분야 발전을 위한 연구를 담당한다.



그 후, 1988년 중국농촌투자신탁투자공사 총경리로 기용되면서 금융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왕치산은 10여년 동안 건설은행 부행장, 인민은행 부행장, 인민건설은행장, 건설은행장 등을 역임하며 금융통으로 변신한다.



이 과정에서 왕치산은 1989년 건설은행 부행장 재직 시절, 상하이 및 선전(深圳)증권거래소와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설립, 1994년 건설은행장 재직시 미국의 모건스탠리와 협력해 중국 최초의 투자은행인 중국국제금융유한공사를 설립하는 등 금융 분야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겼다.



왕치산의 능력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초 광둥성(广东省) 부성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다. 당시 광둥성 정부에서 운영하는 투자은행인 ‘웨하이(粤海)’와 ‘광궈투(广国投)’가 아시아 전역에 닥친 금융위기로 인해 파산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두 은행이 납부해야 할 채무 규모만 1천억위안(17조원)이었다. 신화통신은 “왕치산에게 있어 당시의 문제는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왕치산은 국제회계사무소인 KPMG에 자산 심사를 맡기고 골드만삭스를 광둥성 재정고문으로 초빙해 은행의 재조직을 맡겼다. 이 과정에서 8백여개의 지방 중소 금융기구를 구조조정하거나 폐쇄하고 '광궈투'를 파산시키는 등 각종 자구책을 뚝심 있게 밀어붙여 3년여만에 채무를 말끔히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왕치산은 이 때 '불 끄는 소방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국무원 경제체제 개혁판공실 주임으로 승진한다.



왕치산의 ‘문제 해결’ 능력이 또 한번 주목받은 것은 지난 2003년 4월 베이징 전역이 ‘사스(SARS)’로 인해 혼란에 빠졌을 때다.



하이난성(海南省) 서기로 부임한 지 5개월 밖에 안 됐던 그는 베이징시 시장으로 부임됐다. 사스 정국을 해결할만한 적임자로 공산당은 그를 지명한 것이다. 그는 부임 첫날 시 곳곳을 직접 시찰해 방역 실태를 점검한 후, 회의를 소집해 “군대에 농담은 없다”고 관계자들에게 일갈하고 모든 정보를 사실대로 공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중국중앙방송(CCTV)와 인터뷰를 자청해 “모든 유언비어를 없애겠으니 날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부임 19일만에 전염병 신규 발병자 숫자가 감소했으며 한달 후에는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신화통신은 “왕치산은 부임 후, 6개월만에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다”며 그의 노력을 높이 평했다.



또한 베이징올림픽 조직위원회 집행주석, 상하이엑스포의 조직위원회 주임을 맡아 두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 준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2007년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된 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무역 불균형을 이유로 사사건건 트집잡는 미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위안화 무역결제 비중을 높여 위안화 국제화 기틀을 마련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경제 소방대장’에서 ‘부패 소방대장’으로

경제 분야에서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준 왕치산은 중앙기율위 서기로 임명돼 중국 사회의 고질병 중 하나인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왕치산은 지난해 11월 15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8차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18차 1중전회)’에서 다른 상무위원들은 빨간색 넥타이를 맨 반면 왕치산 혼자만 푸른색 넥타이를 맸다. 언론은 “왕치산이 서슬 퍼런 반부패의 칼날을 휘두르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한 것”이라 분석했다.



또한 왕 부총리는 중앙기율위 서기 취임 후 가진 첫 업무회의에서 “부패 청격은 당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엄중한 정치투쟁”이라며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엄중히 다스리고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시스템을 확고히 갖춰나갈 것”이라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30일 베이징에서 부정부패 방지 분야의 학자 10여명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고 공직자 재산신고제를 비롯한 반부패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왕치산은 좌담회 말미에 "많은 학자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책들을 보고 있지만 전기 자본주의 시대의 작품도 한 번씩 읽을 필요가 있다"며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알렉시드 토크빌의 19세기 저작인 ‘구 제도와 프랑스 혁명’이라는 책을 추천했는데 이 책은 순식간에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왕치산의 행보에 중화권 언론과 외신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그가 중국이 위기 때마다 보여준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 때문이다. [온바오 박장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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