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공산당 서열 7위, 장가오리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자수성가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으며 선전(深圳)과 톈진(天津)의 경제부흥을 이끌었다”, “모든 일에 성실히 임하고 엄격히 처리한다”



관영 신화(新华)통신이 지난해 12월 25일 보도한 중국 공산당 서열 7위인 장가오리(张高丽) 상무위원 특집기사에서 전한 인물 소개이다.



1946년생인 장가오리(67)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시멘트 운반 노동자로 사회생활에 입문한 후, 선전시와 톈진시의 경제부흥을 이끌어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가진 것 없는 그가 중국 최고 권력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뛰어난 업무능력 덕분에 가능했다.



빈농의 아들서 정계 진출하기까지



푸젠성(福建省) 진장(晋江)의 둥스진(东石镇) 판징촌(潘径村)의 농가에서 태어난 장가오리는 부모, 선조 모두 농민으로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자랐으며 어린 시절부터 지역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인근 호수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집안 환경은 가난했지만 배움의 열망이 있었던 그는 열심히 공부한 끝에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샤먼(厦门)대학 경제과에 입학했다. 197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문화대혁명을 맞은 그는 국영기업인 시노펙(中石化, 중국석유화학)의 마오밍(茂名)석유공사에 취직했다.



신화통신은 “말보다 실천이 장가오리의 좌우명”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성실성을 높게 평가했다. 처음에 짐꾼으로 시작한 그는 한 포대당 50kg의 시멘트를 매일 나르면서 성실성을 인정받았으며 탁월한 업무능력을 바탕으로 입사 15년만인 1985년 마오밍석유공사의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1984년 석유회사 사장 신분으로 마오밍시위원회 부서기를 맡으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다음해에는 광둥성(广东省)경제위원회 주임에 임명됐다. 정계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1988년 광둥성 부성장, 1993년에는 광둥성 상무위원 겸 부성장에 임명되는 등 승진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빈농의 아들이 기업 고위직을 거쳐 정계까지 진출한 신화를 써낸 셈이다.



가는 곳마다 경제발전 이끌어내



장가오리가 ‘경제통’으로서의 능력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7년 선전시위원회 서기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장가오리는 집정 4년 동안 홍콩과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공항 확장, 지하철 및 대로 건설 등 기초 인프라 확장에 힘쓰고 화웨이(华为), 중싱(中兴) 등 민영 하이테크기업을 유치해 선전시가 하이테크 산업도시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국제화된 도시를 건설한다는 목표로 홍콩과의 합작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생태환경 보호도 중시해 선전을 산업도시이자 생태도시로 발전시켰다.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장가오리는 2001년 산둥성(山东省) 부성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5년 동안 대외무역, 하이테크 기술, 민영경제를 집중적으로 발전시켜 2006년에는 산둥성의 지역총생산(GDP)이 처음으로 2억위안(350억원)을 넘겨 중국 전체 2위의 경제중심으로 발전시켰다.



2007년 톈진시 서기로 자리를 옮긴 장가오리는 선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톈진을 빈하이신구(滨海新区), 도시지역, 교외 농촌지역 세 구역으로 나눠 상호유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 아래 외자 유치에 힘썼다. 그 결과, 2011년까지 톈진의 5년간 연평균 GDP 성장률이 16.5%, 2011년 1인당 GDP가 1만3천달러에 달할 정도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끌어냈다.



장가오리는 가는 곳마다 경제발전을 이끌어낸 실적을 바탕으로 지난해 11월 15일, 중국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간의 행보를 미뤄봤을 때 장가오리는 앞으로 중국의 금융, 재정 등 경제정책을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홍콩 언론은 장가오리가 상무부총리를 맡아 재정과 세무, 중앙은행, 금융 관련 업무를 맡을 것이라 전망했다. [온바오 박장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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