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회 연구위원, 이극로연구소장 박용규(朴龍圭)















▲ 박용규 소장


일제강점기 전국을 찾아다니며 일제 법정에서 변론을 잘하여 수많은 애국지사와 애국청년의 목숨을 구한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에 항거하며 우리말과 글을 사수하는 한글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햇수로 4년간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해방직전에 풀려난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일제시기 배우고 싶어 하는 고학생들의 단체인 갈돕회를 위해 서울 동숭동에 기숙사를 마련하여 6천 5백여명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 자매단체로 여자 고학생 상조회를 만들어 주고 그 회관을 지어 여학생들을 공부하게 한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해방 이후 수석대법관, 검찰총장, 초대 법무부 장관,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한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이 분이 바로 대구 출신의 애산 이인 선생입니다.  애산 이인(1896. 9. 20~1979.4. 5.)은 대구 출신 인물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애국지사이기에, 그분이 남긴 발자취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학자들에게 연구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말과 한글을 지켜온 독립운동단체요 반일성향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에 대해 지난 20년간 연구해온 역사학자인 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이인 선생이 남긴 위대한 업적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항일변론을 통한 독립운동















▲ 이인 선생

이인 선생은 크게 세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항일변론을 통한 독립투쟁, 조선어학회를 후원한 항일투쟁,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이인은 일제강점기 항일변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인은 1896년 9월 20일에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생가의 방벽에는 아버지 이종영이 써놓은 “이탈리아의 세 영웅을 본받고, 제비와 참새와 같이 나 한 몸의 편안함만을 꾀하지 말라”라는 가훈이 적혀 있었다. 이 가훈을 보며 이인은 우리나라를 중흥하는 일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신돌석 의병장의 참모로 활동하였던 김수농 선생이 세운 달동의숙에서 4년간 학업에 전념하였다. 스승으로부터 역사, 지리, 세계사, 수학 과목 뿐 만 아니라, 총 사용법까지 익혔다. 수업시간에 이인은 스승을 통해 강렬한 민족혼을 전수받았다. 그 뒤 경북실업보습학교 2년을 마친 뒤에, 1912년 45원을 손에 쥐고 무단가출하여 일본에 유학을 갔다.



1914년 일본 대학의 법과를 졸업한 뒤에 다시 1916년에 메이지 대학 법과 2년에 편입하여 1918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그가 법률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은 동기는 억울한 우리 민족을 구해보자는 의분과 어떻게 해서든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자는 생각에서 비롯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김양수, 김도연(뒷날 제헌국회의원, 국회부의장)과 절친하게 지냈다. 서민호(뒷날 광주시장, 국회의원, 국회부의장)도 만났다. 이들과 조선어사전 편찬 후원회원으로 함께 활동하였다.



1923년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해 5월에 개업하였고, 그 해 7월에 의열단 사건을 맡았다. 의열단은 혁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이후 일제시기에 독립운동에 관련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변론을 맡았다. 허다한 무료변론도 해주었다. 음식과 의복까지 차입시켜주었다. 이후 20년간 매년 50-60여건, 그 가운데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상사건만 총 1천여 건을 변론하였다.



일제법정에서의 그의 변론은 피고인의 형벌을 줄이는 일반적인 변론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히 독립운동가 변론은 그 자체로 독립투쟁이었다. 일제가 제일 싫어한 독립운동가들은 경찰서의 유치장과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으로 인해 사망에 이른 경우가 허다하였다. 변론은 독립운동가의 생명을 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형량에도 변호사의 변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컸다. 감옥을 나간 독립운동가가 다시 독립운동 전선에서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항일 변론은 법정과 신문과 잡지를 이용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혁명을 촉구하는 역할도 하였다. 법정에 참여한 방청석에게, 그리고 변론이 게재된 신문과 잡지를 읽은 우리민족 구성원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었다. 이인은 자신의 변론이 조선독립의 기초 공작이었다고 밝혔다. 일제 법정에서의 일제 판검사와의 변론투쟁은 합법을 최대로 활용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인은 일제의 법률로 저들을 비판하여 항일변호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 가운데 특히 정의부 군사위원장인 오동진, 통의부 독립군인 이응서,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등의 변론을 맡았다. 고려 혁명당 사건, 수원고농 흥농사 사건, 광주 학생 운동, 창원 소작쟁의 사건, 원산 총파업 사건, 형평사 사건 등을 변론하였다.



항일 변론으로 그는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27년 12월 고려혁명당 사건 변론에서 이인이 ‘일본이 동양평화라는 미명하에 한국을 합병하였으나, 일본의 조선 식민 정책은 양두구육(羊頭狗肉)과 흡사하다.’라고 말하자, 일본인 재판장은 그의 변론을 중지시켰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변론 때에 학생들에게 ‘이 정신 이 기백을 길이길이 잊지 맙시다.’라고 격려하여 일본인 형무관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1930년 5월 수원고농학생들의 흥농사 사건을 변론할 때에 ‘일본이 한민족을 노예시하고 차별하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 양부모(일본인)의 학대에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양자(학생)는 친부모(한국인)를 그리워 할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굶주리면 먹을 것을 찾게 되고 결박당하였을 때는 자유와 독립,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양심적 발로이고 역사적 필연이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이 변론을 미우라라는 일본인 검사가 문제를 삼아 이인을 구속하겠다고 법석을 피웠다. 사이토 총독은 그에게 6개월간의 변호사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래서 그에게 ‘사상변호사’라는 칭호까지 생겨났다.



1927년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유학중인 김법린에게 여비로 쓸 2백불을 몰래 보내주어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여하게 해 주었다. 김법린(뒷날 3대 문교부장관)은 독일에 있던 이극로와 함께 이 민족대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조선통치를 비판하였다. 1935년에 조선변호사회 회장을 지냈다.



조선어학회를 후원한 독립운동



다음으로 이인은 우리 민족을 영구히 지키고자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보급해온 조선어학회를 후원하는 독립운동을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 내내 지속하였다.



1935년경 이극로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 후원회에 이인도 장현식·이우식·민영욱·김양수·김도연·서민호·신윤국·임혁규·김종철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에 후원한 임혁규가 남긴 자료에 의하면 이인도 1937년에 100원, 1938년도에 100원을 조선어사전편찬기금으로 납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어학회사건 예심종결 결정문에 의하면 1939년과 1940년에도 도합 2백원을 사전편찬기금으로 냈다. 그는 조선어학회가 ‘말’과 ‘글’과 ‘얼’을 되찾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조선어학회는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없어지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없어진다고 보았다.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을, 일본글이 아닌 우리글을, 일본 얼이 아닌 우리 얼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우리민족에게 가르치고 있었다고 그는 평가하였다. 너무나도 옳은 판단이었다.



1935년 3월 이극로의 구상으로 출현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1대 관장은 김성수, 2대 관장은 이인)에 그도 감사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은 가난한 조선의 학자들이 출판비가 없어 조선의 민족문화를 향상시키는 좋은 책을 내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이인은 1938년 1월 부친의 회갑 축하비용 1,200원을 이극로에 제공하여,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서 김윤경의 저작 [조선문자급어학사] 1천부를 출판하도록 지원하였다.



아울러 1937년 그도 이극로가 추진하던 양사원 건립 계획에 이우식, 안호상과 함께 찬동하여 참여하였다. 양사원은 다가올 독립국가에서 활용할 인재를 미리 양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조직한 학술연구기관이었다. 이인이 앞장서서 양사원 설립 인가를 얻고자 하였으나, 끝내 일제로부터 허가를 얻지 못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 때 그도 연루되어 1942년 11월 10일 서울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조선어학회가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인사 33인을 체포하여 탄압하였다.



이인은 함흥경찰서 유치장과 함흥감옥에서 수감되었다. 일제 형사로부터 두들겨 맞아서 앞니 두 개가 빠지고 양쪽 귀가 다 찢어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을 일제 형사가 강제로 뒤로 젖히는 바람에,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사이가 죽 찢어졌다. 이후 그의 귀는 쪽박귀가 되었고, 손가락을 완전히 펴지 못하게 되었다. 아울러 일제로부터 비행기 태우기와 ‘아사가제’라는 고문도 받았다. 특히 후자는 두 다리를 뻗은 채 앉혀놓고 목총을 두 다리 사이에 넣어 비틀어대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동안 보행이 부자유스러울 만큼 다리를 상하였다.



함흥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1천 2백여명의 재소자 중에 매일 영양실조로 11명씩이나 사망하였다. 식사로 썩은 콩깨묵 한 조각에 반찬이라고는 미역줄거리 한 점만 주기에, 그는 일본인 간수에게 “너무 음식이 적고 오랜 기간 동안 굶주림에 지쳐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라고 말하자, 그 자는 “일반인들도 먹을 것이 없는데, 너 같은 일본의 역적에게는 그것도 많다.”라는 질책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와 한글운동 동지들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기아로 생존하기가 어려운 지경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인이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후원한 점과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도서출판을 지원한 점과 양사원의 건립을 협의한 활동이 일제에 의해 드러나, 일제로부터 1심 판결로 1945년 1월 16일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고 석방되었다. 함흥지방법원 니시다 재판장은 판결 직후 “당신(이인)에게 이 정도는 약과다. 그동안 법정을 다니며 무료 변론한다고 쫓아다니며 얼마나 귀찮게 굴었느냐”고 대놓고 힐난했다고 한다. 재판관은 그를 가리켜 ‘조선통치에 커다란 암적 존재’라고 말하였다.



석방 뒤 그는 경기도 양주군 은봉면 덕정리에 있는 농막에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독립국가에서 사용할 국호와 국기와 국화를 구상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애국운동



이인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닦는데 기여하였다. 해방 뒤 미군정시기에 특별 범죄 심사 위원장 겸 동재판장, 수석대법관, 대법원장 서리, 헌법 기술 위원회 부위원장, 검찰총장, 국학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검찰총장 재직시 조선어학회사건 관계의 수만 페이지 기록을 챙겨 금고 안에 잘 보관했으나 6·25전쟁 때 그만 소실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제헌국회의원, 초대 법무부장관,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위원장, 법전 편찬 위원회 위원장, 국회의원, 헌법위원, 한글 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초대 정부 조각 구성 때 그는 가인 김병로를 대법원장으로 추천하여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1949년에 조직된 십일회의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60년 4·19혁명 때에 시위학생들을 1천여명이나 집에 숨겨주고, 총에 맞아 부상당한 40여 명에게 응급 치료를 해주어 ‘학생의 부모’라는 존칭까지 받았다. 그때 부상을 입었다가 나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수십명의 의아들이 생겨났다는 일화를 남겼다.



같은 해 4월 20일 김병로, 서상일 등 13인과 이승만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68명과 같이 이승만의 하야와 체포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냈다. 그는 서상일과 대표로 이 경고문을 내각에 전달하였다. 이처럼 그는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1964년 7월 함석헌, 김홍일 등과 함께 한일협정의 시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6년 9월 함석헌, 김홍일, 신숙 등과 함께 부패한 관료와 악덕재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972년 5월 그는 “우리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개척해야 합니다. 시기의 빠름과 늦음은 있을망정 통일은 되고 맙니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합니다. 제부모형제는 반드시 다시 결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일문제에 관한 한 독일에서 배워야 합니다.”라고 절규하였다.



정부는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건국대학교에서는 일제시기의 변론 활동과 해방 후 건국 공로를 기려 1976년 2월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민족사적 위상



생애를 정리하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인 선생은 정말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글을 기고하여 대한민국이 올바르게 발전하도록 일관되게 지적하면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한글학회를 위해 자신이 평생에 걸쳐 마련한 돈과 집을 기증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한 직접적인 동기는 민족학회인 한글학회가 재정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고자 함에 있었다.



그는 1976년 8월 15일 효자동 집을 팔아 자신은 조그만 집을 사고 남은 돈 3,000만원을 한글학회 회관 건립 기금으로 기증하였다. 기증할 당시에 이인은 “나는 이미 팔십이 넘었으니, 집이 클 필요도 없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우리의 ‘얼 말 글’이 발전되고 보급되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를 계기로 2억원의 모금 운동을 벌여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지금의 한글학회의 회관을 지을 수 있었다. 한글학회 회관을 건립하는 데는 대구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께서 지원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79년 4월 5일 작고하기 전에, 이인은 자신이 살던 강남구 논현동 28의 22번지 소재 2층집(시가 1억 1천만원)도 한글학회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하여, 장남 이옥이 그해 7월 기증식을 가졌다.



이처럼 그는 한글학회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애산 서거 후 자손들은 유산을 모아 ‘애산 학회’를 설립하여 매년 논문집을 간행하고 있다. 실로 애산 이인 선생과 그 자손은 애국지사의 전범이요 그 자손들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이인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이런 이인 선생을 고향인 대구에서 선양하는 기념사업을 한다고 하는 것은 대구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애국선열의 고귀한 발자취를 잊지 않음이 후손들의 의무이다. 이인 선생의 호가 ‘애산’이듯이, 제2의 애산이 대구뿐만 아니고 한반도 전체에서 수만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국토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 국토를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과 한글 사랑에 헌신해온 이인의 업적은 영원할 것이다. 나라를 잃은 시기에는 항일독립투사로서, 나라를 되찾은 시기에는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매진한 건국 공로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실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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