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朴龍圭)















▲ 정인승

정인승(鄭寅承, 1897∼1986. 호는 건재(健齋))은 1897년 5월 19일에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살의 나이에 용담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1등으로 졸업하였다. 1918년 상경하여 중동학교의 강습반에 들어갔다.



3·1운동 참여

1919년 봄 법률전문학교에 지원을 해놓고 입학시험을 기다리던 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필운동에서 10여명의 학생과 하숙을 하고 있었다. 3·1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였다. 이후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일제 경찰이 주모자들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분간 고향에 은신하여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여 독립선언서 1장을 접어서 버선 밑에 숨겨가지고 장수로 내려갔다. 그 해 겨울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고자 공부에 전념하였다.



1921년 4월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재학시절 스승 정인보와 선배 김윤경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확립하였다. 특히 선배 김윤경과의 교유를 통해 주시경의 국어문법 학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였다. 이것이 그를 우리말 연구에 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민족 교육 실천

졸업 뒤 전북에 있는 사립 고창고보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영어와 조선어 과목을 담당하였다. 주당 조선어 과목 시간이 일본어 시간에 비해 1/6에 불과하였기에, 과외로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조선어강좌를 만들어 가르쳤다. 조선총독부 관할의 전북 학무국이 민족정기를 가르치던 고창고보를 ‘공립’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자, 그가 동료교원 이병학, 유찬식과 함께 반대를 하였다. 이로 인해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라는 딱지가 붙어 1935년 8월에 고창고보를 그만두었다.



조선어대사전 편찬 관여

1936년 4월 1일 선배 최현배의 권유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조선어사전 편찬 업무를 맡았다. 조선어학회에도 가입하였다. 그는 7대(1937-1938) 조선어학회의 간사(출판부)를 역임하였다. 8대(1938)에서 12대(1942)시기까지 이극로와 함께 조선어학회의 간사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표지. 일제강점기에 93호까지 발행함.



정인승은 “말과 글을 그대로 지니고 지켜가고 있는 민족은 비록 남의 민족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독립이 되어 제 나라를 세울 수가 있되 말과 글을 잃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굳은 신념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그는 “궁극적으로 우리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말과 글을 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의 편찬사업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긴요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국어운동 50년」, <전북일보>, 1977, 7, 12.)



이와 같은 우리 말글의 인식을 가지고 그는 국어사전편찬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조선어대사전 편찬은 그와 더불어 한징, 이중화, 이윤재, 이극로가 전임위원이 되어 담당하였다. 그는 1942년 10월까지 명사, 감탄사, 부사 등의 어휘 풀이를 담당하였다. 아울러 1937년 6월부터 1942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을 맡았다. 1933년에 제정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대해 그도 이극로, 이희승과 함께 개정 작업에 참여하여 이를 1940년에 공표하였다. 





일제의 탄압

1942년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그도 연루되어 그해 10월 1일에 체포되었고, 함흥경찰서와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 수감되었다.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그 때 당한 고문후유증으로 왼쪽 귀가 굳어 평생 동안 짝귀가 되었다.



1944년 9월 30일 나까노 예심판사는 정인승에게 개정치안유지법 제1조 후단의 결사 가입죄와 결사 목적 수행 행위죄를 적용하여 공판에 회부하였다. 일제는 그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어학회에 가입한 점과 조선어사전 편찬 업무에 참여한 점, 기관지 <한글>을 편집한 점, 한글맞춤법 통일안 개정 작업에 참여하여 조선어학회의 목적 수행 행위를 한 점을 문제 삼았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의 1심 재판부는 정인승에 징역 2년형을 언도하였다. 1945년 8월 17일에야 석방되었다.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뒤 그는 조선어학회에 복귀하였다. 13대(1945-1946)에서 15대(1946-1949)까지 조선어학회 간사(출판부), 이사(도서부)를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말큰사전>의 발간에 헌신하여 1957년에 마지막 6권을 출간하였다. 큰사전 편찬 공로로 문교부장관 표창을 수여받았다.



그의 최대 공적은 1936년에서 1957년까지 21년간에 걸쳐 <조선말큰사전>의 편찬을 완간함에 있었다. 그가 진두지휘하여 이 사전을 마무리하였다. 이 국어대사전이 나옴으로 해서 민족문화의 금자탑이 완성되었다.















<조선말큰사전>(1947∼1957) 총 6권의 모습 Ⓒ박용규



이 사전은 16만 이상의 우리말 어휘에 대해 뜻풀이를 하였고, 3,558쪽에 달한다. <조선말큰사전>에 수록된 올림말 수를 보면, 순우리말이 74,612(45.5%)를, 한자어가 85,527(52.1%), 외래어가 3,986(2.4%)로 총 164,125 말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전의 발간으로 우리민족의 존엄을 대내외에 잘 드러냈다. <조선말 큰사전>은 뒷날 남북한 국어사전의 모범이 되었고, 국어의 발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근래에도 일부 인사들이 우리말의 70%를 한자어가 차지하고 있기에, 초중등 교과서에서 한자를 병기하여 사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침략자의 핵심기관인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어사전>(1920)에 뿌리를 둔 것이다. 침략자들은 사전의 올림말 수로 한자어를 70%나 되게, 순우리말은 고작 30%에 지나지 않게 만들었다. 침략자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한글만 사용하여도 고등 지식을 습득하는데 전혀 불편이 없기에, 우리 국민의 문자 생활에서나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할 필요가 없다.



한편 정인승은 1945년 조선어학회가 짓고 미군정청 학무국이 발행한 <한글 첫걸음>이라는 초등학교용 교과서를 편찬하는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에 문교부 학술용어 제정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3월 조선어학회의 자매단체인 한글문화보급회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전북대학 교수 겸 총장 대리가 되었다. 1952년에서 1961년까지 중앙대학 이리 분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1961년 전북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64년에서 1971년까지 건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6년 대한민국 학술원의 회원이 되었다.  



저서로 국어와 관련된 <한글독본>(1946), <표준 중등말본>(1949), <표준 옛글>(1955), <표준 고등말본>(1956), <의문 해설 한글 강좌>(1960), <표준 문법>(1968) 등을 남겼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86년 7월 7일에 서거하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