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朴龍圭)















▲ 이중화

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문화가 말살되는 현실을 타파하고자, <경성기략>(1918), <경주기행>(1922), <조선의 궁술>(1929) 등을 저술하여 우리의 고유문화와 문화유적이 보존되기를 염원한 학자가 있었다.



개성의 문화 유적(선죽교, 만월대, 남문의 종루, 박연폭포의 연혁)에 대해 「개성의 고적」이라는 글을 <반도시론>(1918)에 3차례 연재하였다. 「경성건설의 梗槪」(<반도시론>, 1918)라는 글에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역사(궁궐, 도성 성곽, 4대문 등)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아울러 일제 말기 7년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조선어사전 편찬에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받아 2년 3개월 이상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해방 뒤 다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조선말큰사전>의 편찬위원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되었다.



아직까지 생사확인도 알지 못한 상태에 있고,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포상하나 받지 못하였다. 이 인물이 바로 이중화(李重華, 1881∼? 호는 동운(東芸)) 선생이다. 그의 업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3·1운동 참여

이중화는 1881년 9월 26일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에 10년간 한문을 배웠다. 1899년 9월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에 입학한 뒤에 영어와 지리와 역사 과목을 수학하였다. 특히 남궁억 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1903년 6월 흥화학교를 졸업한 뒤,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흥화학교가 폐교되자, 그 해 11월 배재학당에 조선어와 역사지리 교사로 부임하였다. 주시경과 함께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배재학교에서 3·1운동 때 독립선포문을 작성하여 배포한 혐의로 그도 교사 강매, 김진호, 김성호와 학생 대표 김병호 등 18명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 이일선과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인쇄하여 외국인의 집에 배포하기도 하였다.(<배재80년사>, 1965, 448쪽.) 이후 1935년까지 배재학교에서 근속한 뒤, 같은 해 경성 여자 미술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그는 <조선의 궁술>(1929)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통해 이중화는 조선민족의 꺾이지 않는 기상을 드러내었다. 이 책은 조선궁술연구회가 조선역사학계의 권위자였던 이중화에게 편찬을 부탁하여, 그가 저술한 명저이다.















▲ 이중화, <조선의 궁술>  ⓒ 이중화



조선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활과 화살에 대해, 활쏘기에 대한 일을 방대한 역사문헌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아울러 105명에 달하는 활쏘기 명인들의 역사를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기술하였다. 삼국시대 8인, 고려시대 23인, 조선시대 74인을 다루었다. 그 가운데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인 12명을 기술하였다. 김여물, 심수경, 이순신, 황진, 김명원, 장응기, 신호, 정발, 임정식, 홍수남, 류형, 신정의 위국헌신한 활약상을 서술하였다.



예로 들면 이중화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1591년에 전라좌수사를 제수 받으니 공이 좌수영에 있으면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 공적인 업무를 마치면 날마다 장수들과 더불어 활쏘기를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중흥의 큰 공을 세웠다. 선조 31년인 1598년 노량의 해전에서 순국하니 나이가 54세이다. 시호를 충무라 하였도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서술로 이중화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참여와 일제의 탄압

이중화는 1910년 일제의 강점시기부터 그들의 강압통치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조선어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뒤, 1936년 4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8월에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의 제3회 독회에 참여하였고, 표준어 제정의 수정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에도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서울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 수감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그 때 나이가 62세였다. 일제는 환갑이 넘은 연로한 인사도 구속하여 구타하고 고문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예심종결 결정문에서 이중화가 ‘조선어학회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인 줄을 알면서도 사무원이 되어 조선독립의 목적을 위해 수행한 점과,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종사한 점이 치안유지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기술하였다.



1945년 1월 16일에 이중화는 일제로부터 1심 판결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 선고를 받았다. 형기를 모두 마친 뒤 1945년 1월에야 석방되었다.



해방 뒤 <조선말큰사전> 편찬 관여와 납북

해방 뒤 그는 다시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큰 사전에 실린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제도와 음식에 대한 용어를 그가 풀이하였다.



아울러 그는 1948년부터 국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3월 24일 조선어학회의 후원재단인 ‘한글집’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이중화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서술은 이강로의 「동운 이중화 스승」(1993)을 참조함) 1949년 조선어학회가 재단법인인 한글집을 설립할 때, 재단을 위해 경기도 부천에 있는 9,962평에 달하는 토지를 기증하였다. 1949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인사들이 조직한 십일회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 십일회 회원들의 모습(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사진은 김민희 님이 제공함.)





1950년 2월 21일 “말을 바르고 옳게 하고 글을 바르고 옳게 써서 우리의 정신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우리나라의 빛이 널리 퍼지면 우리는 다 같이 그 때에 우리가 우리의 할 바를 한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머리말」, <표준 한글사전>(이윤재 지음, 1953))이라며 우리 민족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이처럼 그는 우리민족에게 주는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겼다.



학장으로 재임 도중에, 6·25전쟁이 진행되던 1950년 7월 24일 서울 종로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었다.(인터넷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납북자 명단에 나옴.) 지금까지 생사확인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 필자는 최근 조선어학회의 항일 선열을 정리하는 도중에, 이중화 선생이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2012년 5월 25일 국가보훈처에 이중화 선생과 관련된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 등 서류를 제출하였다. 같은 해 11월 20일 국가보훈처가 요구하는 서류를 보완하여 다시 제출하였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공훈심사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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