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무관의 책사'로 불리는 왕후닝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무관의 책사'



지난 6월, 시진핑(习近平)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인 왕후닝(王沪宁)을 두고 한 말이다.



왕후닝은 25명의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중 유일하게 어떠한 보직에도 임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시 주석 취임 이후 모든 해외 방문에 동행했을 뿐 아니라 중국 국내 일정에도 빠지지 않고 수행해 시 주석의 최측근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왕후닝은 3대 국가주석을 보필한 유일한 인물이다. 왕후닝은 지난 1995년 장쩌민(江泽民) 전 국가주석에 의해 중앙정책연구실 팀장으로 발탁된 후, 현재까지 중앙정책연구실에 소속돼 있다. 그는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胡锦涛)의 '과학적 발전관' 등 지도이념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진핑이 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 제시한 '중국의 꿈(中国梦)',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이 강조한 '신형대국관계' 모두 왕후닝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꿈'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뜻하며 '신형대국관계'는 중국과 미국이 과거 강대국들처럼 갈등하지 말고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감을 의미한다.



WSJ는 "왕후닝은 지난 10년간 중국의 국내 및 외교 정책을 설계하고 중국 공산당 인사와 중국 정치 연구가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고 평가했다.



어릴 떄부터 지독한 독서광

1955년 10월생 왕후닝(68)은 산둥성(山东省) 라이저우(莱州)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철학과 정치서적을 좋아했으며,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고 한다. 1974년 여름, 왕후닝은 상하이사범대학의 간부외국어 훈련반에 진학해 3년간 프랑스어를 배웠다. 이 과정은 당시 외교 최전선에서 근무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졸업 후, 외교가의 길을 걷지 않고 상하이 푸단(复旦)대학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졸업한 후,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조교를 거쳐 29세인 1984년, 푸단대학 국제정치학 부교수로 승진해 중국 최연소 부교수가 됐다. 교수를 역임하고 1994년에는 푸단대 법학원 원장으로까지 승진했다.



왕후닝은 자신을 소개할 때 "전 독서인(读书人)일 뿐입니다"고 말할 정도로 지독한 독서광이기도 하다. 1971년 중학교를 졸업한 왕후닝은 건강 때문에 집에서 독학해야 했는데, 당시 집에서 손에 잡히는 책은 모두 읽었다.



왕후닝은 홍콩 문회보(文汇报)와의 인터뷰에서 "비록 특별히 가치 있는 책은 없었지만 당시 두 가지 좋은 버릇을 갖췄다"며 "하나는 보편적이고 사소한 일이라도 조리 있게 분석하는 요령을 체득한 것이며 둘째는 책 읽는 습관을 스스로 갖췄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교에서도 그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유명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푸단대 학생들은 "문과 건물 6층의 한 방은 큰 태풍이나 번개가 쳐도 불빛이 꺼지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 곳은 바로 왕후닝 교수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컴퓨터실이었다"고 말했다.



198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 대학생 중국어 변론대회에서 왕후닝의 지도 아래 우승을 거둔 장창젠(蒋昌建)은 스승에 대해 "교수님은 연구실을 '공장'이라고 불렀다"며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는 그는 하루 14시간씩 쉬지 않고 '공장'에서 일할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왕후닝은 1988년부터 2년간 방문학자 자격으로 미국 아이오와대학과 UC버클리에서 유학을 해 미국 정치에 대해서도 이해가 높다.















▲ 공식 석상에 나타난 시진핑의 옆에는 언제나 왕후닝이 있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국가주석의 핵심 브레인

이처럼 학자의 길을 걷던 왕후닝이 중앙에 발탁된 것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그의 사상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상하이 당서기 재직시절 왕후닝을 알게 된 장쩌민 전 주석은 왕후닝의 "사회 통합 유지를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다", "심화된 경제개혁은 반드시 강력한 정부의 힘에 의지해 추진해야 한다" 등 신보수주의적 관점에 동의했고 1995년 그를 중앙으로 발탁했다.



중앙정책연구실은 공산당 중앙 직속기관으로 중앙정치국의 정치이론, 정책 등은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당 최고 브레인 기구이다. 정치조 조장으로 임명된 왕후닝은 장쩌민을 보좌하며 그의 '3개 대표론'을 완성했다. 이 이론은 공산당이 선진 생산력(자본가), 선진문화 발전(지식인), 광대한 인민(노동자ㆍ농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쩌민 전 주석은 2000년 2월 광둥성 가오저우(高州)를 시찰하면서 '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3개 대표’ 정신을 견지해야 한다"며 '3개 대표론'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장 주석은 이 이론에 근거해 2001년 여름 중국 공산당 창당 80주년을 기념한 연설에서 민간기업인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어 9월에 열린 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3개 대표론'을 지지하는 결정을 채택시켰다. '3개 대표론'은 2002년 11월 열린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헌장에 삽입됐다.



2002년 장쩌민의 퇴임과 함께 그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승진했다.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집권 시기 초기에는 찬밥 취급을 받았지만 후진타오 지도부의 '과학적 발전관' 등 이론적 토대를 만들며 신임을 얻었다.



지난 2003년 7월 28일,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 연설에서 처음 제기한 '과학적 발전관'은 종래의 경제발전 지상주의에 의해 빈부격차가 심화됐고 환경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학적 발전관'은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헌장에 정식으로 삽입됐다.



후진타오 전 주석이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발표한 보고 역시 왕후닝의 지도 하에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새 지도부에서도 그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시 주석이 총서기 취임 후 발표한 '중국의 꿈'은 왕후닝의 감독 관리 하에 쓰여졌으며 시 주석의 주요 행사에 거의 빠짐없이 밀착 수행하고 있다.



중국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지인 중국신문주간(中国新闻周刊)은 "왕후닝은 지난해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서 3개 국가주석을 보필하고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발탁되는 역사적 선례를 만들었다"며 "그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상승했으며 새 지도부에서도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할 것"이라 평가했다. [온바오 박장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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