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捕虜)와 박정희 대통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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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환 중위는 1968년 베트남전에서 포로로 사로 잡혔던 한국군 3명 중 유일한 태권도 교관으로 장교 출신이다. 그는 1967년 10월 베트남전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견될 당시에 최연소 태권도 공인 5단이었다고 한다.

그는 1968년 1월 전투 중 베트콩에게 잡혀 캄보디아 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69년 6월에 502일 만에 풀려났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보니 병적기록부가 말소되어 있었다면서 이는 전사로 처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국방부는 베트남전에 사망자나 부상자는 있어도 포로나 실종자는 있을 수 없다는 군의 방침 때문이었다고 한다.

박정환 중위의 귀환으로 군당국이 베트남전 포로를 인정하면서 그는 국방부에서 인정한 첫 베트남전 포로로 인정됐다. 살아 돌아온 박정환 중위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포로생활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박정환 회장은 현재 탬파시내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서부플로리다한인회장과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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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 ㅡ 하나님...!'



가슴에서 눈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뺨에 뜨겁게 흐름을 느끼었다.

나는 울고 있는것이다.



"컹덕!컹덕!"(안된다. 안돼!)



대령은 큰 소리로 주위를 진정시키었다.

대령을 쳐다 보았다. 이제 그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 ㅡ.

저 탄탄한 체격에 큰 눈과 입을 가진 저 이방인 녀석의 판단에 의해

이제 겨우 스물 다섯의 내 생명과, 불타는 야망이 가늠질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혼란스러울 만큼 자신이 초라하고, 서러워졌다.

대령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말고 기가막힌듯 피식 웃었다.



"너 ㅡ 살고싶지 않나?" 하고



은근하면서 무겁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예 ㅡ 살고싶습니다. 그러나 내 소신은 진솔하게 밝혔고, 나는 초급장교이니 당신들 민족에게 태권도 가르친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대령은 벙긋웃으며,

"너의 말이 옳다. 우리가 미군을 이길수없다는것도 알고있다.

그러나 미국내에서 우리와 동조하는 반전운동이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고,

미군은 지쳐 스스로 물러날것이며, 미군이 철수하는 그날은 우리의 승전보가 울리는 날이 될것이다. " 라고 말한후 좌중을 휘둘러보며, "이녀석은 다른 포로와 달리 매우 정직하다. " 고 말했다.

그는 내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와 같은 집단 속에서 철저히 애국심과 충성심, 그리고 절대 복종을 세뇌 주입받은 하나의, 부속품으로 작동하는 순진한 젊은 전사(戰士)로 여겨진듯,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동정과 의미 심장한 눈을하고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부하들에게 명하여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게하고, 손가락도 천으로 싸메게 한후 결박을 풀어주게 지시했다. (이후 지금까지 나의 이 손가락은 불구이다.)



#6



그날밤이후, 대령은 줄곳 다른포로들에게는 관심도 없이 마치 어린 혈육을 대하듯 내게 살갑게 굴었다.

태권도 시범도 시키고, 가끔은 " 너희 괴수 박정희와 네 이름이 비슷한데 너 혹시 인척이 아니냐?" 하고

내가 "네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으면 하는 짖궂은 눈치로 넌지시 물으며 여러차례 농도 걸어왔다.

그리고 종래는, 내게 살아남으려면 북한(北韓)으로 가야할것이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학탑](학습 學習)즉, 사상교육을 통해 베트남의 역사와 저들의 전쟁목적, 이념(理念)을 열정을 다해 교육시키려 들었다.

그 시간은 그의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애,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을 확실하게 체감케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가끔 내가 고문 당했던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에게 존경심을 품게되는 스스로를 깨닫고 깜짝깜짝 놀랄때도 있었다.



#7



"나는 내가 항상 염원하던 사이공 전선으로 가서 참전하는 영예로운 사명을 부여받았다. 나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나는 내일새벽 임지로 출발할 것이다.

네 생명은 내가 보장했으니 북한에 가서 네 동족에게 우리 베트남 민족의 해방전쟁의 목적과 의미를 잘 이해시켜주길 바란다. -"라는 말을 남기고 대령은 전령을 데리고 떠났다.

사이공 전선은 가장 치열한 격전지임을 잘 아는 나는, 그에대한 존경심이 더했고, 나도 대령처럼 내 조국을 더욱더 사랑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탈출해 살아 조국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갈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후 약 3개월이 지나, 소위 성역(聖域)이라 칭하는 [호치민. 루트] 즉, 캄보디아와의 국경지대에서 칠흙처럼 캄캄한 야음을 타고 수백여명의 베트콩이 주변에 우글거리는 야영 움막에서 3명의 감시병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강을 건너 캄보디아 영내로 진입했다.

다시 3명의 베트콩 추적자들과 조우하여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하고,

캄보디아 영내(領內)로 깊숙이 잠입한 이틀뒤, 캄보디아 군에 의해 생포되었다.



#8



우리나라와는 물론 미국과도 국교 (國交)가 단절된[시하누크]공(公)의 캄보디아 왕국은 대외정책을 중립(中立)을 표방하면서도 북한 중공(中共)등 공산국가들과 돈독한 국교관계를 유지하며 특히 [시하누크]공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의형제 사이로, 북한의 원조를 대량 지원받고 있어 북한으로 갈것을

캄보디아 관리들은 내게 끊임없이 종용했다.

"북한에 내 의사를 무시하고 강송(强送)하면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다." 라는 비장한 나의 각오를 인지한 이들은, 간첩죄를 적용해 6년형을 선고한후, 내 사건을 비밀로 처리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정부는 물론, 내 소속부대, 가족들도 내 행방을 알지못하는 실종자(失踪者)가 졸지에 되어버린 것이다.



#9



누가 뭐라해도 명분이야 어쨌든 우리나라는 1961년 5월16일 군사 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였음을 우리세대의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명백한 사실이다.

반반한 기간산업 시설 하나없고, 심지어는 총알하나도 자체 생산 하지못하는 후진국이었다.

봄이오면 보리고개라고 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여서, 이웃사람이나 누가 죽었다고하면 "쌀값 내리겠네..." 하고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이런세대에 아버지를 여윈 어린 다섯 동생의 장남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가야할 나는, 배고파 허기져 방바닥에 쓰러져 누운, 초점을 잃은 창백한 얼굴의 어린 동생들의 눈망울을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뼈마디 마디까지 사무치게, 잊을수없는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시고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지사의 장손(長孫)으로서의 긍지와 하늘나라의 영생(永生)의 소망이, 좌절하지 않고 바르게 살도록 나를 지켜주었으며, 그리고 그때 나에게 태권도는 나의 자존심이고, 무아(無我)의 경지로 몰입시키는 나의 전부였다.

흰색 도복을 입으면 그 순간부터 부자도 가난한자도 없고, 오직 열심히 수련한 결과의 실력만이 인정받아,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땀흘려 노력하며 열심히 수련해, 이런 절실한 마음의 부단한 심신의 연단은 내 무공(武功)을 일취월장하게 했으며, 내게 자긍심과 성취감, 그리고 행복함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10



캄보디아 군인 형무소에는 캄보디아 인, 라오스, 태국 베트남 중국, 버마 등 잡다한 인종들이 살인, 강간, 강도, 밀수, 폭력, 암살기도범 그리고 밀입국 간첩, 무기 및 마약 밀매상, 도굴꾼등의 각양각색의 죄질의 범죄자들과 공산과 민주의 이념이 다른 사상범 및 부정부패에 연루된 관리와 정치인 또한 군인출신 범법자들로 남여 1천여명이 넘는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배고픔에 영양실조에 걸리는것은 어쩔수 없지만,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부녀자들이 애들 똥귀저기 빠는, 형무소 바깥 연못의 흙탕물을 마시고 그 물 한바가지 뒤집어 쓰는걸로 샤워를 대신하며, 빈대,모기 쥐새끼들이 득실거려 밤이되면 누워있는 온몸위로 기어다니고, 낮 동안에 양철지붕과 시멘트벽은 열대의 태양열에 달구어져 벽에 손을 댈수 없을만큼 뜨거워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었다.

죄수복이란게 아예없어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상 거지꼴이된 수감자들이 각 방마다 1백여명 이상 복작거려 캄보디아 감옥은 지구상에서 사악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단테의 신곡]의 지옥도를 연상케하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죄수들이 하나둘씩 미쳐가고, 피부병이 온몸에 퍼져 깡마른 유령같은 몰골을 하고 허우적거리며 다니며 쥐와 고양이를 잡아먹는가 하면, 죽은 죄수의 사체 해부 검시후 간수와 죄수가 어울려 사체의 장(腸)을 끄집어내어 끓여먹는 끔찍한 광경도 있었지만 ㅡ,

그런 지옥에서도 인종을 초월한 따스한 우정과 인간애가 있었고,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도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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