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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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자갈치, 자갈치 아지매
사람들은 좋은 날씨가 좋은 기운을 부른다고 믿는다. 맑은 하늘이나 순풍은 모두 하늘에서 보여 주는 좋은 징조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흐린 날보다는 맑은 날에 장을 담고, 결혼을 하고, 또 자녀를 출산하기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기가 중요한 곳이 부산에도 한 군데 있다.

그날 잡힌 생선을 그날 구워 내는 식당을 만날 수 있는 매력.

갈치구이나 꼼장어구이를 주문하면 튀긴 생선이 공짜로 나오는 매력.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다양한 가격으로 소주 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 매력.

바다와 먹거리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삶의 여행지가 바로 되는 매력.

시원한 바닷바람이 여름내 달구어진 몸과 마음을 식혀 주는 것은 덤인 그곳.

부산 사람들에게 자갈치 시장은 이런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만약 부산을 찾은 외지인이 자갈치 시장을 건너뛰었다면 부산에서 헛것만 보고 간 셈이다. 6·25 전쟁과 화재 등 숱한 우여곡절 끝에 세계적인 어시장으로 성장한 이곳은 부산의 상징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수산물 시장이다. 영도 대교 바로 옆의 건어물 시장에서부터 충무동 공동 어시장까지를 통틀어 자갈치 시장이라 부른다.

자갈치 시장이라는 명칭은 이 근방에 자갈이 많아 자갈치라고 부른다는 설과 생선 이름인 갈치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정설로 받아들인다. 이곳의 일제 강점기 지명은 남빈정이었다. 옛사람들은 이곳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기도 했다. 자갈치 시장이 예전에는 파도에 닳아 예쁜 자갈이 넓게 깔린 청정 해역이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광복이 되자 일본 귀환 동포들이 먹고살기 위해 이 자갈밭에 모여들어 좌판을 놓기 시작했다. 여기에 6·25 전쟁 때 팔도의 피란민들이 가세했다.

본디 자갈치는 남포동 영도 다리부터 길게 늘어진 갯가의 부산 어패류 처리장을 이르던 말이다. 이곳 가건물들을 철거하여 1974년에 재개장했으나, 지난 1985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돼 이듬해에 재개장했고, 다시 2006년에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태어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장이 확대되면서 신동아 어시장과 건어물 시장, 노점 등을 모두 아우르게 됐다.

이곳은 다른 어시장과 다르다. 수산물에 관한 한 종합 백과사전에 준하는 집합처이며, 역사적 뿌리와 양적 규모로 볼 때도 일본 도쿄의 쓰키지[築地] 어시장과 더불어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다. 해마다 열리는 자갈치 축제의 슬로건인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처럼 연신 손님을 불러 대는 활기찬 목소리, 퍼덕이는 물고기로 엄청난 활력을 자랑하는 이만한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이 자갈치 시장을 제대로 알려면 두말할 것 없이 ‘자갈치 아지매’들부터 만나야 한다.

6·25 전쟁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이 자갈치 시장에 모여 장사를 하기 시작해 자갈치 아지매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펄떡이는 물고기들, 싱싱한 해산물들과 함께 자갈치 아지매들의 무뚝뚝하면서도 정겨운 사투리를 통한 생생한 시장의 현장감도 자갈치 시장의 중요한 매력 포인트다. 한순지씨는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싱싱한 해산물처럼 이곳을 50년이나 지켜 낸 자갈치 시장의 바로 그 자갈치 아지매다. 자갈치 봉사단인 일심회 회장 한순지씨. 시를 쓰는 자갈치 아지매로 유명하기도 한 그녀의 인생 일기가 궁금하다.
AM 1:00, 삶을 준비하는 시간
옛날 우리나라의 시간 표기법에서 오후 일곱 시에서 아홉 시까지를 1경이라고 했으니, 밤 열한 시에서 이튿날 새벽 한 시까지가 삼경인 셈이다. 삼경은 가장 깊은 한밤중을 뜻한다. 시간조차 잠든 새벽 한 시는 한순지씨의 일상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자갈치 시장의 물건을 두고 ‘살아 있으면 1만 원, 죽으면 5,000원, 소금 바르면 3,000원, 밤에는 거저’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만큼 여기에서는 ‘살아 있음’이 최고의 가치이다. 자갈치 시장 상인들이 억셀 뿐 아니라 목소리 크기로 정평이 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만큼 펄떡거리는 기운 때문이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생선의 신선도를 자랑한다. 싱싱함을 팔아야 나와 가족이 먹고살 수 있기에 이곳의 어물들은 참 절박하리만치 싱싱하다. 확실히 자갈치 시장에는 숱하게 눈에 띄는 어물전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깔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 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우리의 근현대사와 역사를 함께해 온 시장이지 않나. 오랜 역사의 부침을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해 오며 그 뒤안길의 사연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지. 한순지씨의 사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순지씨는 1939년에 일본 도쿄[東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삼 남매 중 장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양복 만드는 일을 했는데, 도쿄 대공습으로 모든 것을 잃고 급히 서둘러 귀환하게 되었다. 당시 외할머니가 여수에 살고 있어 빈손으로 뱃삯만 간신히 구해 여수로 쫓기듯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1944년 7월의 일이다.

“그 시절은 참으로 먹고사는 게 문제였던거라.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해녀 물질을 해서 다라이에 생선을 이고 장사하고, 오빠는 신문 배달에, 나는 장작을 패서 살림을 살았지. 그때 내 나이가 여섯 살이었으니 요즘은 그 나이에 유치원은 넣어 주나? 무심한 세월이었지. 그때 어머니가 일본 드나들면서 장사도 했는데 무슨 등록이 잘못되었는지, 요즘 같으면 불법 체류자처럼 돼 버린기라. 그래서 잡히서 수용소 생활을 6개월이나 했다 아이가? 말도 다 못 한다. 그래도 내가 중학교 입학하기 직전에 어머니가 한국으로 들어와서 다행이지. 나는 학교는 중학교 2학년 하다가 말았다. 그래도 우리 시절에 그 정도면 공부 많이 한 택이다”

한순지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했고, 15세 이상 되는 여성은 여성 동맹에 가입했다. 매일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산등성이를 파는 고된 작업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까지 그녀의 마음속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

1962년, 그녀는 한때 서울 양재 학원에서 재단 기술을 배워 재단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육촌 이모의 소개로 스물세 살에 부산으로 시집오게 된다. 결혼으로 그녀와 부산이 첫 인연을 맺게 된 셈이다. 당시 시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하고 1년 정도 영도에서 양재점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시대 상황 때문인지 영 재미를 못 봤고, 그러던 찰나 시어머니의 권유로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순지씨의 파란만장 자갈치 아지매의 운명이 이렇게 첫 삽을 뜨게 된 것이다.
AM 3:00, 때로는 삶을 강요당하는 시간
한순지씨가 시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새벽 두 시 언저리.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세 시 전후다. 그녀의 새벽 세 시는 어패류를 부산, 울산, 대전 등의 크고 작은 마트로 보낼 준비를 마치는 시간이기도 하다. 또 감천항에 있는 수산물 종합 가공 단지에 어패류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자갈치 시장에서 한순지씨와 비슷한 패턴의 일상을 꾸리는 자갈치 아지매는 대략 3,000명 내외이다. 부산의 힘이 이 사람들 손에서 나오는 것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앞서 말했듯이 항도 부산은 6·25 전쟁 당시 최후의 피란처였다. 그때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피란민들은 어시장이 있는 이 해변을 터전 삼아 고단한 삶을 견뎌 냈다. 어쩌다 한두 집을 제외하면 자갈치 시장에서 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아주머니들이다. 더욱이 노점상의 경우는 예외가 없다. 널빤지 하나에 고무 대야를 되는 대로 덜렁 얹어 놓고 열심히 손님을 부르는 자갈치 아지매는 그 억척스러운 생활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순지씨는 결혼한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어린아이를 눕혀 놓고 새벽 세 시면 어김없이 시장에 나왔다. 만약 아이가 아프면 근처 평화소아과에 가서 주사를 맞히고 집에 데려다 눕혀 놓고는 다시 시장으로 나왔다. 그녀가 처음 팔았던 것은 해삼, 멍게, 홍합 등이다. 196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벼로 짠 큰 가마니에 해산물이 왔다. 껍질째 오기 때문에 하루 종일 쭈그려 앉아서 그것을 까야만 했다. 처음 일이 손에 익지 않을 때는 칼에 손을 베이기도 수십, 수백 번이었다. 그녀의 자갈치 시장 생활이 본격적으로 고단해진 것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난 뒤부터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한 다라이 3,000원입니다’ 말하는 데만 이 주일 걸렸다. 첨에는 모기 소리만 했제. 말이 안 나오더라고. 나중에는 옆 아지매, 옆옆 아지매도 큰소리로 ‘여기 보이소. 싸게 드릴게’ 하는데 마음이 다급해지더라고. 그래서 나도 목을 티았지 뭐. 하아! 그러기를 한 8년 정도? 암튼 남편과 함께 장사를 했다. 남편은 중매인 노릇도 했다. 새벽에 같이 택시 타고 자갈치로 오다가 우리 택시가 고마 버스와 받았뿟다. 나는 병원에서 3개월 정도 치료받았는데 남편은 간기라. 기절할 노릇 아이가? 그래서 자갈치 사람들이 내 걱정한다고 문병 와서도 그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있었던 거라.

그때 내 나이가 서른둘이었다. 요새는 결혼이 많이 늦어져서 서른둘에 결혼이나 하나? 그때 큰애가 여덟 살, 우리 막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퇴원하고 보니 다섯 마리 강아지가 내 치마를 잡고 오글오글하는데 눈앞이 캄캄한 거라. 오만 생각을 다했다. 시어머니 살아 계시지, 아이들은 어리지. 근데 죽으라 하는데 더 죽으라 하는 일이 터졌다. 1970년도에 자갈치에 집을 지었는데 몇 개월 뒤에는 불이 난 거라. 미치고 팔짝 뛸 노릇 맞제? 그래도 또 살아지더라. 시어머니 좌판이 쪼매난 게 있었는데 이름을 ‘부영 상회’로 짓고 본격적으로 어패류를 취급했다. 내 살아온 거 말도 다 못 한다.

큰딸이 아홉 살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나? 장사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송곳에 눈이 찔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더라. 변 안과에 가니까 눈을 빼야 된다 안 하나. 앞이 캄캄해서 아이들이 아프면 들락거리던 평화소아과에 안 갔나. 원장 선생님 붙들고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그때 큰딸을 병원에 눕혀 놓고 한쪽 눈으로 경매를 해보기도 했다. 내 눈을 빼 주면 한쪽 눈으로 생활을 해야 안 되나. 연습해 본 기라. 눈이 안 맞아서 줄 수도 없었지마는. 그때 내가 장사한 거를 후회했다. 내가 집에 있었으면 아 눈이 그렇게 안 됐을 낀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한순지씨는 아는 사람에게 빌린 20만 원을 자본으로 해서 장사를 시작했다. 이자를 다달이 물어 가면서 일을 했다. 처음에는 장사 수완이 부족하니 빚이 불 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월 2만 원.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애들 교육비, 생활비, 병원비까지 들어가니 나중에는 3,000만 원까지 빚이 늘어났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조개를 하루 종일 까고, 밤 아홉 시가 넘을 때까지 손에서 칼을 놓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을 까서 정리하고 납품까지 하면 한밤중. 늦게 집에 들어오면 집은 엉망이고 제때 못한 빨래는 산더미고, 매일매일 전쟁 치르듯 살았다.

돈을 벌어도 은행을 이용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은행은 일반인과 거리가 멀었다. 또 개인에게 대출도 잘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돈이 생겨도 이 물건값, 저 물건값 지불하고 나면 저금이 힘들었다. 그래서 상인들 사이에서 계를 들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곗돈은 500만 원이었는데 1년에 한 번은 탔다. 그 돈으로 애들 중학교 보내고 생활했다. 빚은 1980년대 무렵 청산했다. 빚은 청산했지만 아이들이 고등학교, 대학에 들어가면서 저축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아들 둘이 군대를 가게 되어 그 아래 자녀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큰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같이 일을 도왔다. 자갈치 시장에는 한순지씨처럼 자식에게 가업을 전수하는 사례가 많다. 시장판을 거닐다 보면 스물쯤 되어 보이는 젊은 층부터 팔순까지 아지매들의 층도 넓다. 그래도 주축은 30~40대. 이들 중에는 부모에게 장사 터와 수완을 물려받은 경우가 절반을 넘는데, 타인들은 고된 장사 일을 배겨 내질 못해 물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단다. 한순지씨의 경우도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함께 그녀를 도와 도매를 하고 있다. 그녀의 경우는 모자 관계지만, 옛날 자갈치 아지매들의 대부분은 그 딸들에게 넉넉한 인심과 함박웃음을 물려준다. 모녀가 대를 이어 수십 년 시장을 지켜 온 경우, 자갈치 아지매들은 시장의 상징이자 부산 어머니들의 다부진 기질을 보여 주게 된다.

“재혼은 무슨, 꿈도 안 꿔 봤다. 애 다섯 키우다 보니 무슨 여유가 있어야지. 그리고 애가 다섯이나 딸려서 그런지 중매가 들어오지도 않더라. 첨에는 생활이 너무 고달프니까 먹고사느라 그런 생각은 못 해 봤고, 장사하고 봉사 활동하다 보니 여유가 없어서도 못 해 봤다. 이래저래 한평생 다 보냈다.”
AM 5:00, 삶이 궤도에 오르는 시간
자갈치 시장의 개장 시간은 오전 다섯 시. 이 시간부터 시장은 활력을 띤다. 상인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설렘으로, 손님은 남보다 빠르게 싱싱한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한 기대로 자갈치 시장은 싱싱해진다. 이 시간을 전후로 보통 경매가 시작된다. 경매는 새벽 네 시 삼십 분에서 일곱 시까지 진행하지만 물건이 적으면 한 시간 내에 끝나기도 한다. 경매사의 소리에 따라 중매인이 신호를 주면 경매사가 판단해서 처리한다. 턱없이 가격이 높거나 낮은 경우는 드물다.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가격을 높여서라도 확보한다. 물건을 많이 사는 사람은 판로나 거래처가 많다는 뜻이다. 건물 옆 잠수기 조합에서 경매를 하는데, 일반인도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다.

자갈치 어패류에는 서른다섯 명의 중매인이 있는데 한순지씨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6번을 지키고 있다. 원래는 마흔 명 정도의 중매인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절차가 워낙 복잡해서 가족에게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중단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서른다섯 명 정도 남아서 경매를 한다. 그녀가 초창기에 소매를 할 때는 가게 이름을 부영 상회로 했는데, 도매할 때부터 부영 상사로 바꾸었다. 올해 쉰두 살이 된 큰아들이 실제로 가게를 이끌어 가고, 이제 그녀는 뒷방 늙은이라고 겸연쩍어 한다. 큰아들은 어느새 중매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한순지씨는 소매를 하면서 알게 된 유통 관련 사람들과의 인맥을 기반으로 하여 1975년 이후 지금까지 도매에 집중하고 있다. 그녀와 큰아들, 종업원 한 명이 전부지만 남편을 통해 알음알음 배운 중매인 활동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중매인은 내부 일을 알아야 하고, 손으로 숫자를 표시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자격증은 없지만 장사 경력, 해물 감별 능력 등을 보면서 껴 주기도 한다. 그녀가 남편에게서 배워 이 일을 해 왔듯이 이제 아들이 물려받게 될 것이다. 작은아들은 작년부터 합류하여 중매업에 종사하고 있다.

“수산물 거래는 물고 들어오는 것이라 판로, 물건 공급 등에서 연줄이 좋고 돈줄이 좋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신용 떨어지면 헛방인 거라. 주문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구해 줘야 한다. 그때에 진짜 단골이 생긴다고 보면 된다. 도매는 거래처가 중요하다. 거래처를 잡는 특별한 방법은 신용이라고 생각한다. 물건 조달할 때 신용이 있으면 물건이 적을 때도 우리 쪽에 먼저 보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저금을 못했다. 돈 모아서 산지에 물건값 먼저 보내 줬다. 대금 결제를 제때 해 주는 것이 신용이다.

그 덕에 오랫동안 거래를 계속하고 있다. 삼천포 분들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래하고 있다. 한 30~40년 됐지? 이리저리 바꾸면 안 된다. 갠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그 집에 좋은 일 있으면 화환도 보내 주기도 한다. 내가 어렵게 살았어도 신용은 안 잃고 살았다. 우리 일은 첫 손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수걸이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아나? 우리는 이걸 억수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첫 손님한테는 좋은 물건을 주고, 또 넉넉하게 주고. 이게 첫 손님을 맞는 원칙이다. 첫 손님이 마음이 상하면 하루 종일 찜찜하다 아이가. 나는 운수도 인심에서 난다고 생각한다.”

한순지씨는 점점 장사 규모가 커지면서 자녀들을 돌봐 줄 사람도 두면서 시장에 나올 수 있었다. 자갈치 시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 점점 가속이 붙어 1980년대에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면서 최대 호황을 맞게 되었다. 그녀도 장사하면서 가장 신이 난 시기를 1980년대로 꼽는다. 그때는 노점도 별로 없었고, 노점이라고 해도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물론 노점에서 장사하는 것도 전통 시장으로 허용해 주었다.

그 시절 한순지씨는 일주일 한 번씩 아이들 학교에 들러 선생님과의 면담을 자처했다. 담임 선생님한테 혹시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부담 갖지 말고 지체 없이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른 아이들과 같은 일이 생겨도 그녀의 아이들은 애비 없는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 없는 티를 안 내려고 일요일에는 성지곡 수원지 등에도 데리고 다니면서 놀아 주고, 국제 시장에서 다섯 명 옷을 한 보따리 사서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보는 대로 믿는다 아이가. 땟국물 줄줄 흘리고, 초라하게 입고 다니면 누가 좋아하나?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이나 받지. 그래도 우리 애들이 다 착하게 잘 자라 줘서 그기 제일로 고맙다.”
AM 7:00, 삶이 고이는 시간
보통의 직장인이 출근 준비를 하는 시간에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는 것이 한순지씨의 일상이다. 아침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가 자갈치에 손님이 가장 몰리는 시간이다. 자갈치 시장에는 500여 개의 점포가 있다. 기존 건물보다 평수도 늘었지만 점포 수는 비슷하다. 도매와 소매의 숫자도 비슷한데, 도매는 바깥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

한순지씨는 5년 전부터 활어를 취급하는 사람에게 점포를 세를 주고 있다. 그 이유는 1996년 IMF의 충격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갈치 시장의 1980년대의 호황은 1990년대 초반부터 기세가 꺾이다가 급기야 IMF를 기점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특히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던 상인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빚을 많이 진 사람도 속출해서 입에 겨우 풀칠만 한다고 아우성인 실정이다. 한순지씨처럼 도매를 하는 사람은 고정 거래처가 있어서 그럭저럭 생활을 하는데, 소매만 하는 사람들은 손님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 더 고생스럽다.

“장사가 안 될 때, 그래서 IMF 때 봉사 모임 일심회도 만들었다 아이가. 어려울수록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회원은 한 70명 정도 된다. 어렵게 살아온 시절을 생각해서 이웃을 돌아보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정신없이 살 때는 생각도 못 해 봤다. 그래도 시국이 어렵고 나도 나이 들고 하니까, 뭐 달리 생각해 보면 벌이가 예전만 못해서 그렇지 장사하기는 많이 편해졌다. 예전에는 조개를 일일이 손으로 직접 깠다 아이가. 징글징글했다. 이제는 산지에서 조개나 홍합을 모두 까서 보내오니까 얼마나 수월한지 모른다. 홍합이나 굴 껍데기를, 10킬로짜리를 열 개 스무 개씩 까 봐라. 몰라, 잡생각 떼어 낼 때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

자갈치 시장 일심회는 원래 자갈치 봉사단에서 출발했다. 자갈치 봉사단은 1970년대에 결성되어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다가 자갈치 시장 토박이 상인인 원로들의 모임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는데, 그것이 일심회다. 이제 자갈치 봉사단은 신구 교체를 이루어 젊은 상인들을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다.

“봉사는 장사하는 중간중간 짬을 내 나간다. 내 같은 경우는 직원이 있으니까 내가 봉사 가면 직원이 자리를 지키면 된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큰 버스를 대절해서 간다. 예전에 강원도에 큰 산불이 났을 때나 전라도에 폭설이 내렸을 때는 일손도 돕고 위로도 해 주러 안 갔나. 강원도 화천 철책선에 근무하는 특공 부대 군인들 위문 방문할 때는 우리 시장에서 붕장어를 엄청시리 장만해서 갔다. 젊은 아들이 나라 지킨다고 죽을 고생하는데 늙은 우리가 그런 거라도 해야 안 되겠나. 영도구에 있는 복지관에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어패류나 음식을 보낸다. 그리고 경남 밀양에 있는 오순절 평화의 집도 방문하고, 연말에는 재부산강원도 청장년회와 함께 복지 시설 장애인들과 독거노인들을 초청해서 사랑 나눔 송년회를 열기도 했다.

예전에는 돈 많이 벌어서 밤마다 돈 세는 재미가 짭짤했다. 라면 상자에서 1,000원짜리, 5,000원짜리, 만 원짜리 구분해서 세는데 세상에서 돈 세는 것만큼 재미난 것도 없는 기라. 근데 이제는 애들도 다 컸고 결혼도 다 했고, 아들에게 월급 200씩 받고 그러고 보니 사는 게 이게 다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2000년 자갈치 축제 때 ‘가슴이 따뜻한 자갈치 아지매상’을 받기도 한 그녀는 ‘일심회가 전국을 찾아 봉사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회원들의 한결같은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겸손해 한다. 앞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좀 더 살피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단다.
AM 9:00, 삶에 기대는 시간
일반 직장인의 평균 업무 시작 시간이 오전 아홉 시. 이 시간은 새벽녘에 더 활기찬 삶을 사는 자갈치 시장이 한숨 돌리는 시간이다. 상인들은 제각각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긴다. 한순지씨도 마찬가지다. 오전 열 시 이전에 물건을 도매가격으로 모두 처분한다. 이즈음은 커피를 마시고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며,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듯이 연습장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녀는 자갈치 시장의 작은 시인이다. 그녀는 시 낭송회에서 형식과 격식을 떠나 가슴에서 묻어나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소재로 작품을 발표하곤 한다.

오르고 또 오르던 길은 어디일까/ 오직 가야 할 길은 한길뿐인데/ 마음을 비워서 걸어가야지/ 서로서로 사랑하고 인내와 노력으로/ 행복한 길이 되기를…….

지난 4월 재부산강원도 청장년회 주최로 열린 제8회 음악과 함께하는 시 낭송회에서 발표한 한순지씨의 시 「삶의 길에서」의 일부분이다. 양장 재단사로 일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해도(海圖)에도 없는 인생 항로에 접어든 그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오직 그 하나의 집념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저 오르는 것만 알고 위로, 위로만 내달렸다. 그러나 이제는 칠순을 지나 팔순을 바라보면서 삶은 그저 잔잔하고 흘러가기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 의미를 잡아 보자는 생각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중학교 과정을 채 마치지 못한 회한도 자리 잡고 있다.

“지금에 와서 검정고시를 치는 것도 엄두가 안 나고, 장사도 해야 하고. 처음에는 장부 귀퉁이에 끄적거려 봤는데 그게 위안이 되더라고. 그래서 손자들한테 노트 몇 점 얻어서 시인들이 보면 비웃을 시를 쓴다. 뭐 어떠노. 이렇게 만족하면서 사는 기지. 그래도 내가 딸들은 공부를 많이 시켰다. 큰딸은 부산대 영문과 나왔다. 둘째 딸은 경성대 나오고. 요즘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만 우리 때는 여자가 많이 배우면 드세서 시집도 못 보낸다고 공부도 많이 못했다. 우짜겠노. 우리가 시대를 더럽게 타고난 거를.”

한순지씨는 소망이 있다면 시집을 내 보는 거란다. 정식 시 공부를 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써 놓은 시가 대략 시집 한 권 정도는 묶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래서 시장 상인들에게도 한 권씩 주고 싶다고 한다.
AM 11:00, 삶이 준 달인의 시간
손님이 적다. 이 시간부터 점심이 조금 지나는 시간까지는 대개 가정주부들이 찬거리 한두 개를 사 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럴 때 대부분의 난장 상인들은 어패류를 손질하거나 정리한다. 자갈치 시장에서는 대부분 정해진 품목만을 취급한다. 쉽게 말하면 전문 분야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한순지씨의 경우 주로 패류만을 취급한다. 그러나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어패류 소비가 다른 계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덥기 때문에 시원한 마트를 이용하니 시장 출입 빈도가 낮고, 외식이 잦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하기야 더운데 불 옆에 땀 흘리면서 음식 장만하고 싶은 주부가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상인들은 여름 시즌 3~4개월 정도는 적자를 각오한다. 가을, 겨울이면 어패류를 사다가 국이나 찌개로 해 먹으니 그나마 만회가 된다고 위안하면서.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갈치 시장 내 상인들은 웬만한 전문 수산학자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한순지씨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패류, 특히 패류 전공이다. 패류는 식품으로서의 조개 종류를 이르는 말이다. 연체동물이 여기에 속한다. 패류는 주로 바위나 모래, 개펄이나 해초 위와 나뭇잎, 낙엽 속, 돌담 속에서 서식하는데, 한국에는 약 560종이 있다고 한다. 그녀가 옛날에 가장 많이 팔았던 것은 홍합이다.

“지금은 개조개나 홍합살이지만, 옛날 홍합과 지금 홍합은 차이가 많이 난다. 크기도 다르고 가격도 열 배 차이가 난다. 옛날 10원이 지금 100원이니까. 지금은 홍합이 적게 팔리는 편이지. 요즘은 제사용이나 쓰지 어디 쓰나? 울산 사람들은 홍합이 보약이라고 다려도 먹고 죽으로도 쓴다고 하더라. 전복 다음이 홍합이다. 영양가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지. 지금은 양식 담치 알 깐 게 많이 나간다. 홍합은 원래 붉은색이라고 생각하는데 흰색도 있다. 보기에는 붉은 것이 좋아 보이지? 근데 맛과 영양은 흰색이 더 많다. 삶아서 먹어 보면 흰색이 맛있다는 거를 단박에 알게 된다.

홍합은 지금은 충남에서 내려온다. 예전에는 여수, 삼천포에서 왔는데 지금은 거의 나지 않고 태안에서 오는 홍합이 알이 좋다. 거제나 통영에서 나오는 건 크기가 잘다. 홍합은 수입산이 거의 없다. 자갈치 시장에서도 국산을 취급한다. 나는 수입산은 아예 쓰지도 않고. 개조개는 수입이 많다. 중국에서 많이 수입되는데 국산은 여수, 충남, 삼천포, 거제 등지에서 많이 들어온다. 개조개도 역시 충남에서 들어오는 게 제일 좋고, 거제나 삼천포, 여수는 알이 별로 없다.

전복은 완도에서 주로 온다. 구입할 때 몇 백 킬로미터씩 차로 오는데 주로 양식장에서 가져온다. 옛날에는 자연산 전복도 많았는데 요즘은 아주 귀하다. 특별히 작정하지 않으면 구하기도 어렵고 비싸서 잘 팔리지도 않는다. 옛날에는 전복을 육지에서 키웠는데, 지금은 전부 바다에서 키우니까 양식이 자연산이나 다름이 없다고 보면 된다. 전복을 셀 때 쓰는 말은 ‘미’다. 그러니까 상자에 숫자가 많다는 것은 크기가 그만큼 잘다는 뜻이겠제? 전복은 5미, 6미가 제일 크다. 6미는 1킬로에 5~6마리 들어가고, 보통 5~10미는 선물용으로 나가고 13~15미는 마트용이다. 라면에 넣어 먹는 것은 40~50미지. 우리 상회에서는 주로 20~30미 정도까지만 취급한다.

150킬로 주문하면 미에 따라서 다양하게 가져와야 한다. 5미, 10미, 20미 등이 주고, 40~50미는 필요 없어도 구색을 맞추어야 하니까 가져오는 편이다. 보통 1톤에서 1톤 반 정도 싣고 온다. 양식장이 한정되어 있어서 더 가져올 수도 없다. 모자라면 주변에서 변통하고 남으면 물에 담가 놓는다. 활어는 금방 죽지만 전복은 조금 다르다. 전복은 여름 때 복날에 특히 많이 팔린다. 가리비는 홍합, 개조개, 전복 외에 특별히 팔리는데 일본에서 들어올 때가 있고, 중국산도 있다. 국산은 통영에서 어쩌다가 가끔 나오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참소라는 제주도에서 보름에 한 번 들어온다. 이외에 소라, 바지락 등이 있다. 우리 상회는 패류 이외는 전혀 취급 안 하는데, 멍게는 패류가 아니지만 주문이 들어오면 구해 준다.”

우리 속담에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갈치 시장 상인 50년차인 한순지씨는 패류 취급학 박사에 버금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수련이란 정형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자신만의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순지씨의 삶의 노정은 수련으로 빛나는 진주를 잉태한 그녀가 취급하는 조개일지도 모를 일이다.
PM 5:00, 삶이 내일과 맞닿는 시간
저녁 시간에는 손님들이 별로 없다. 내일 장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소매일 경우 오전에는 가격대로 팔지만, 오후 네 시가 넘으면 양을 더 주는 방식으로 물건을 처분한다. 한순지씨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불문율이 값을 깎아 주기보다는 물건의 양을 더 주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는 것으로, 생물을 취급하다 보니 재고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손님 입장에서는 가격을 깎지 않아도 많이 받았다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막내까지 결혼을 시키고, 2000년에 들어서면서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손주들 재롱 보고, 애들 생일 챙기고, 집안 대소사도 챙기고, 여유가 생기면 은혜 입었던 시절 지인들과 여행도 다니고, 또 장사하면서 친구 된 사람들과 밥도 지어서 먹고 봉사도 다니고. 이런 일들이 이제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장사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거는 이웃 상회와 싸워 본 적이 없다는 거다. 아무래도 남들보다 많이 팔려는 욕심이 있다 보니 남의 손님도 뺏고 싶고 그런 거 아이가. 그런데 나는 욕심내서 장사를 하지는 않은 거 같다. ‘인내’와 ‘신용’이 내가 장사하면서 항상 머리에 새기는 말이다. 옆 사람이 잘 판다고 시기하지 않고 친절하게 손님 섬기면서 기다리고. 장사는 기다리는 게 반이다. 어디 장사만 그렇겠나. 못 기다려서 망치는 일이 인생에서 얼마나 많더노? 내가 20년 거래처를 남한테 뺏긴 적은 있다. 그래도 그 일로 특별히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때 너무 속이 상해서 위장병을 얻기는 했는데, 장사하면서 창자 썩는 거야 다반사니까. 그냥 기다리고 내 거래처랑 손님 관리 잘하고 그라먼 되더라.

신용은 맞춰 주고 지키는 기다. 태풍이 며칠씩 오면 물량을 못 맞추니까 주문량을 다 못 보낸다 아이가. 그래서 혹시나 날씨가 안 좋아질 때쯤이면 그 전에 물건을 좀 더 확보해 둔다. 그걸로 신용을 유지했다. 태풍에도 물량을 맞춰 주면 얼마나 고맙겠노? 안 그렇나?”

한순지씨는 전쟁터 같은 시장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체념’이란다. 거래처는 언제 나가떨어질지 모르고 손님은 언제 발길이 끊길지 모른다. 열 번 잘해도 한 번 삐끗해서 마음이 상하면 그 다음부터 찾지 않는 것이 사람 마음인데, 그것을 원망하고 자책하면 끝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리에 맡겨, 오면 반갑고 안 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버릇을 들였단다. 단골과의 약속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녀는 지금까지 계를 모아서 단체 여행만 다녔지 혼자 여행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로 살기 위해 ‘여자’를 포기한 ‘자갈치 아지매’ 한순지씨는 어느새 ‘자갈치 할매’가 되어 버렸다.

“내일 뭐하냐고? 내일 뭐하겠노? 또 나와야지. 그것도 순리고.”
PM 8:00, 시간을 활용하는 시간
저녁 여덟 시는 자갈치 시장의 모든 일정이 파하는 시간이다. 점포는 문을 닫고, 활기찼던 시장에는 비린 정적이 내린다. 여기까지가 한순지씨의 인생을 중심으로 한 자갈치 시장의 일기이다. 오늘도 좋은 일기였다. 맑다고 다 좋은 일기일까. 마음가짐에 따라서 좋은 일기도 되고 나쁜 일기도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 한순지씨와 마찬가지로 매뉴얼에 없는 시간대를 살고 있고, 또 살아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이 있고, 정이 있고, 희망이 있는 자기만의 삶의 시장에서 투자한 것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지지 않으려는 지루한 게임을 계속해 왔을까? 오늘 우리가 시장에서 배운 것은 시간에게 져 주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는 거다. 참고 기다리면 지나간다는 말이 적어도 자갈치 상인 한순지씨의 일기로 충분히 공감을 얻는다. 그녀의 삶이 녹아 있는 자갈치 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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