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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나는 용두산 공원 사진사
현재는 일본과 중국 등 외국 관광객과 타지 여행객 및 부산 사람들의 놀이공원과 여가 활용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용두산 공원은 여느 공원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용의 머리를 닮아 용두산이라 불렸던 이곳은 1678년(숙종 4) 왜관이 설치되어 번성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일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신사가 있었으며 8·15 광복을 맞으면서 신사가 헐리고 6·25 전쟁 때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의 판자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 후 대화재로 피란민 판자촌이 불타 없어지자 나무를 심고 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 공원’으로 불리다가 4·19 혁명 이후 다시 용두산 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시절과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용두산 공원에서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며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을 포착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는 모두 70세를 넘긴 용두산 공원의 지정 사진사들이다.
194계단의 용두산 공원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사 계단에/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 버렸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꽃피던 용두산/ 아~ 아~ 용두산 엘레지[고봉산 노래 「용두산 엘레지」]

언론 보도 기사 및 현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결과[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학술 심포지엄, 문재원·변광석의 「로컬의 표상 공간과 장소 정치: 용두산 공원의 재현과 의미」]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내지는 부산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용두산 공원을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용두산 공원은 부산 타워와 꽃시계가 있는 원도심의 관광지일 뿐 아니라, 여느 공원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과 영도 대교, 40계단 이야기 못지않은 사연을 간직한 부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용두산 공원은 처음부터 시민의 편의를 위하여 세워진 공원이 아니라 몇 백 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겪은, 지난한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현재는 일본과 중국 등 외국 관광객과 타지 여행객 및 부산 사람들의 놀이 공원과 여가 활용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용두산 공원의 사연은, 영화 속 장소로도 등장하고 유행가 가사에도 등장하면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중구 동광동 인쇄 골목에 위치한 40계단 못지않다. 그 사연은 계단과 석벽의 낙서로 남아 세월의 더께를 입고 일부 남아 있을 뿐 새로운 시설물과 정비 사업으로 포장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용두산 공원에 아직 남아 있다. 바로 용두산 공원의 지정 사진사들이다.

이제 모두 70세를 넘긴 노 사진사들은 아직도 꽃시계 앞에 선 새신랑과 새색시 모습을 담은 광고판을 앞에 놓고 추억을 간직하려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사진기 안에서 언제나 꽃시계의 꽃처럼 화사하고 밝게 웃는 이들은 청춘이다. 그들은 오늘도 여전히 용두산 공원에서 무심히 흐르는 시간을 카메라에 봉하고 있다. 찰칵!
내 이름은 1번 사진사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나…….” 부산 호텔을 지나 용두산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을 벗어나자 어디선가 가을 노래가 울려 퍼진다. 가빠 오는 숨도 잊은 채 노래 한 소절을 따라 부르는데, 멀리 가을빛에 물들어 가는 공원 광장의 키 큰 나무들이 바람에 손을 흔들며 화답한다. 눈을 돌려 흰 구름에 뒤덮인 푸른 하늘의 가슴을 쿡 지르고 서 있는 부산 타워와 그 아래 언제까지나 나라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듯 우뚝 솟아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본다.

꽃시계 속의 빨간색 시침과 분침이 긴요하게 만나는 찰나 어깨동무한 두 어르신들의 미소가 ‘찰칵’ 하는 셔터 소리와 함께 카메라에 봉해진다. 꽃시계 앞에서 찍은 사진 속에 부산 타워와 이순신 장군 동상이 일직선을 이루며 오늘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용두산 공원의 삼총사이며 상징이다.

“웃어요! 하나 둘, 손 떼고 아저씨 빠지고 아줌마 혼자, 자아아~ 우서요오~ 석 장해서 만 원, 금방 만들어 줍니다.” 한 쪽 다리를 구부리고 카메라 든 몸을 땅에 낮게 숙이는가 하면 허리를 오른쪽으로 최대한 기울이고 왼쪽 다리를 옆으로 길게 뻗기도 하고……현란한 몸동작으로 관광객의 추억을 카메라에 포착하는 노 사진사에게로 모두의 눈길이 쏠린다.

“하 와 유!” 눈길을 떼지 못하는 내게 노 사진사가 인사를 건네며 나무 아래 의자로 바삐 향한다. 방금 찍은 사진기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3분 만에 사진을 완성시켜 준다는 앙증맞은 프린터기에 꽂는다. 공공칠가방 안에 보물처럼 들어앉아 있던 프린터기가 어둠 속에 감춰졌던 오늘의 추억을 느리고 비밀스럽게 뱉어 낸다. 용두산 공원의 10번 김성극[71세, 중구 동광동 거주] 사진사가 웃으며 또 하나의 추억이 기록된 사진을 관광객에게 건넨다. 만추의 공원에 깔린 낙엽을 방석 삼아 삼삼오오 모여 앉은 어르신들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국 관광객들로 보이는 여자 셋이서 여기저기 사진 찍기에 바쁜 공원의 오후.

1973년부터 용두산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는 용두산 공원의 공식 1번 사진사 이상훈[77세, 중구 영주동 거주] 씨가 관광객들을 눈으로 쫓으며 처음 일을 시작하였던 시절을 반추한다. “중학교 학생들도 이상훈이라고 불러야 되고, 이름 부르기가 뭐 하잖아요. 그래서 사진사 30명이 번호를 정해서 그 번호를 부르게 된 겁니다. 고유 번호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번호는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고유 번호 1번을 가지고 있는 이상훈씨는 사실 원조 1번 사진사는 아니다. 처음 1번을 배정받았던 사진사가 10년쯤 하고 난 뒤 그 뒤를 이어 이상훈씨가 번호 1번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현재 용두산 공원에서 활동하는 사진사는 모두 6명이다. 일이 제일 많을 때인 봄에는 사진사 두 명이 더 나와 반짝 일을 하고 들어간다고 한다. 오전과 오후에 교대를 하고 자리 역시 매일 바꿔 가며 앉는데 부산 타워 앞 광장을 빙 둘러 안희제 흉상, 꽃시계, 이순신 장군 동상, 용 조각 앞이 그들의 지정석이다.

“사진 찍어 애들 대학 보내고 했는데……스마트폰으로 찍고 이제는 부탁하는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장세환[75세, 서구 남부민동 거주] 씨는 1988년에 용두산 공원에서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인과 둘이 사는 살림에 그만하면 됐다 싶었는데 올해는 부쩍 수입이 줄었다고 한다. 그래도 다른 사진사들에 비하여 수입이 나은 편이다. 편안해 보이는 인상이 한몫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사로 활동하던 한 사람은 아들이 부산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카이스트도 보내고 그랬어요. 옛날에는 흑백이고 자기 손으로 현상해서 인화하고 약간의 기술도 있어야 했지. 내가 즉석카메라 시대지, 지금까지 썼던 카메라는 한 열 개 정도 돼요.”라고 그는 덧붙였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주차된 관광차가 꽤 많다. 어디서 오는 관광객이냐고 이상훈 사진사에게 묻자 중국 사람이 제일 많이 오고 호주나 미국에서도 온다고 이야기한다. 이상훈 사진사와 대화하는 사이에도 관광버스가 두 대 더 들어온다. 많이 올 때는 버스 댈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말투로 보아 중국 관광객인 듯하다. 외국 관광객이 오면 수입에 변동이 좀 생기느냐고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온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안 찍어요. 관광이니 준비를 다 해 가지고 오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사진 찍는 걸 엄청 좋아하나 봐요. 자기들끼리 엄청 찍어요.” 쓸쓸하게 한숨을 내쉬며 관광버스 쪽으로 눈을 돌리는 사진사를 바라보는데 또 다시 어디선가 유행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바아보야~ 다시 돌아올 수 없겠니. 내 마음도 몰라주는 바보 바보야~.”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을 찾기 위하여 두리번거리는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디론가 걸어가는 어르신들 사이로 허리춤에 걸린 작은 카세트가 보인다. 트로트 리듬을 따라가기 위하여 발걸음을 바삐 옮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는데, 우연의 일치처럼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진사의 마음을 달래 주려는 듯 연신 “바아보~”를 외치는 유행가 가사에 슬그머니 웃음이 번진다.

“돈 많이 버는 날이 좋지요.” 어떤 날이 제일 좋으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다.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이 오면 돈이 된단다. 고객 확보를 위하여 태종대 해운대에서는 5,000원 하는 사진을 여기에서는 4,000원에 찍어 준다고 한다. 부산 타워 앞 광장에 또 한 대의 관광버스가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노 사진사가 사진 광고판을 들고 일어선다.
용두산 공원의 비가(悲歌)
부산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찍은 사진 한 장씩은 모두 가지고 있다는 추억의 장소. 그 장소를 한눈에 보고 싶어 용두산 공원의 부산 타워 전망대로 발길을 옮긴다. 새롭게 칠을 하고 단장한 타워의 몸체가 눈부시게 하얗다. 하얀 거탑 같은 부산 타워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엘리베이터 위쪽 전광판에 지상으로부터 멀어진 수치인 숫자 ‘120’이 찍힌다. 맑은 유리창을 통하여 높은 가을 하늘, 그 아래 병풍처럼 펼쳐진 산이 강을 감싸며 돌고 있다. 산복 도로, 자갈치 시장, 남항 대교, 영도조선소, 남부민동 부산공동어시장,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건물들과 미니어처 같은 자동차들의 행렬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두 손에 쓸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전망대 밑 세상을 휘감고 덧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상황과 시절에 따라 이름과 형태를 달리하며 세월을 견딘 용두산 공원. 부산의 중심지에 우뚝 서 있는 용두산 공원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었는데, 부산 타워가 있는 용두산 공원은 타지인들에게 부산의 상징 중 한 곳으로 인식되는 장소이다. 또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가족들의 놀이공원으로 사랑받는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의 아픈 상처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용두산의 옛 이름이 초량소산(草梁小山)이었던 시절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인의 왕래와 무역을 허가하였는데, 두모포 왜관에서 옮겨 온 왜관을 산의 이름을 따서 초량 왜관이라 불렀다. 왜관 설치 후 번성하였던 이곳은 개항 이후에는 일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6년 10월 공원 준공일에 용두산 신사를 공원 정상으로 옮겼는데 공원 정상에 자리 잡은 신사는 용두산 공원의 상징이 되었다. 신사를 증설하고 그 지위와 품격을 높여 신사와 공원이 정비되고 난 뒤에 용두산은 식민지 행정 당국인 부산부와 각종 관변 단체들이 주도하는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를 기리는 초혼제, 일본군 승리를 기리는 전승 축하회 및 거류지제, 어대전 행사 등 각종 집회가 열렸다. 공원 정상에 자리 잡은 신사는 형식만 갖춘 것이 아니라 신사에 대한 예를 갖출 것을 강요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민족정신을 침탈하고, 일본의 정서를 이식하려는 야욕을 그대로 드러냈다.

“전차를 타고 지나가다 가도 ‘용두산 신사 앞!’이라는 차장의 고함이 떨어지면, 전차 안의 승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용두산을 향하여 큰절을 해야 했다.”[김열규, 「내 부산 옛 둥지」(『부산 일보』, 2011. 6. 27)] 부산 시민들이 용두산 공원에 들어선 신사를 향하여 절할 것을 강요당했던 치욕의 세월을 김열규 선생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민족정신을 훼손시키던 일본의 용두산 신사 참배는 8·15 광복을 맞으면서 신사가 헐리고 나서 정지되었다.

용두산 공원의 수난이 그것으로 멈춘 것은 아니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임시 정부가 들어선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공원 일대에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한 손에는 연탄 한 장을 새끼에 꿰어 들고 다른 손에는 쌀 한 봉지를 들고 고개 숙여 걷던 40계단의 고달픈 가장 모습이 용두산 공원의 194계단에서도 펼쳐졌다. 판자와 가마니로 엮어 만든 학고방에서 늙고 병든 시신이 실려 나가고 새 생명이 태어났다. 먹지 못하여 앙상한 어린아이와 아낙들이 일용할 하루의 양식을 이고 져 나르며 남루하고 버거운 삶을 견뎌 나가던 장소가 된 것이다.

의지할 곳 없는 그들의 버거운 생활을 마감시킨 것은 열심히 일한 뒤에 오는 풍족함이 아니었다. 1954년 일어난 대화재는 피란민 판자촌을 모조리 태우고 용두산을 벌거벗은 민둥산으로 만들었다. 화재 후 용두산 일대는 정비되어 공원 지대로 다시 전환되었다. 공원 지대로 전환된 용두산 공원이 온전한 시민의 공원으로 옷을 입기까지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어야 하였다. 1955년 12월 22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 시절 대통령의 호를 따서 만든 우남 공원이 들어서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 공원의 명칭이 다시 ‘용두산 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되찾은 이름, 용두산 공원
용두산 공원은 왜관과 일본 전관 거류지, 신사가 들어선 공간, 피란민들의 생의 터전, 우남 공원 등 시대에 따라 여러 이름과 역할을 담당하다가 1960년 4·19 혁명 이후 1962년 다시 용두산 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일제의 억압과 독재 권력의 그늘을 벗어나 비로소 시민이 주체가 되어 참여할 수 있는 온전한 공원으로 재탄생되었던 것이다. 용두산 공원이 이름을 되찾으면서 시민의 쉼터로 가꾸고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시민의 성금으로 건립된 4·19 기념탑과 1997년 시민의 헌금으로 세워진 시민의 종은 용두산 공원이 시민의 숲이고 쉼터라는 방증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용두산 공원은 이민족에 의해 성지가 손상당하면서 민족정신까지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고, 독재 정권에 의해 호국과 충성을 강요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과 가난 속에 버거운 삶을 영위하였던 피란민들의 눈물과 한숨이 고스란히 묻힌 자리이며 화마에 휩싸이는 참사를 치르기도 한 지난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한때 곰솔이 울창하여 송현산으로도 불렸다던 용두산 공원은 이제 야자나무로 단장하고 외국인 및 타지의 관광객들을 맞이하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관광 명소로의 대두, 부산 타워와 공식 사진사의 출현
이름과 역할을 달리하면서 세월의 무게를 견뎌 온 용두산 공원의 더께가 벗겨진 것은 1973년 부산 타워가 세워지고 나서부터였다. 타워가 들어서고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로 발돋움하면서 관광객들이 자연히 늘어나게 되었고, 여행의 흔적을 남기려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용두산 공원의 공식 사진사도 출현하게 되었다.

타워를 구경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 수가 늘어나고 그에 발맞추어 다녀간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이들도 늘어났다. 궁여지책으로 부산광역시는 적정 인원을 정하여 용두산 공원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시가 정한 적정 인원은 30명이었다. 용두산 공원의 사진사에게 배정된 번호는 사실 시에서 준 자격증 번호가 아닌 30명의 사진사가 모여 임의로 정한 번호라고 한다.

나이 어린 사람들도 명패의 이름을 보고 부르는 것도 불편하고 자꾸 호명되는 것이 마뜩잖아 번호를 붙이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처음 1번을 배정받은 사진사는 10년쯤 사진사 노릇을 하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돈도 웬만큼 벌어 사진사 일을 내려놓게 되었고, 지금의 이상훈 사진사가 그 번호를 물려받아 현재까지 일을 하고 있다. 그 당시 그가 자격증을 받기 위하여 지불하였던 값은 판잣집 한 채였고 사진사로 활동하기 위하여 구입한 카메라는 쌀 한 가마니 가격이었다고 한다.[『문화 일보』, 2011. 11. 30]

“얼마쯤 돈을 벌어 학생들 졸업 사진 찍어 주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돈을 좀 모았다 하면 자꾸 일이 생기고…….” 이상훈 사진사의 꿈은 학생들 졸업 사진 찍어 주는 사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돈을 좀 모으게 되면 큰일이 터지곤 해서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꿈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지금까지 큰 불만 없이 지냈다는 말을 들으니 노 사진사가 지금까지 불만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사진기만 들이대면 모두 다 웃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웃는 얼굴을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기 때문에 그 웃음에 감염되어서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지 않았을까’라는…….

“30년 전만 해도 신혼부부가 이곳에 엄청 많이 왔어요. 제주도로 여행 가는 신혼부부들이 들러서 가기도 하고 오면서 들르기도 했어요. 중간 지점으로 들르곤 하였던 거지요.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까지는 여기 신혼부부가 많았어요. 그때는 벌이가 좀 됐어요. 나한테도 최상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사진사가 30명 있을 때였지요.” 이상훈 사진사가 말하였다.

“아주 오래 전에는 찍은 사진을 가정집에 배달해 주기도 했어요. 그때는 바쁘긴 엄청 바빴어도 돈이 좀 되니까 좋았어요.” 동구 수정동에 거주하는 박상준[70세] 사진사의 말이다. “오른쪽 어깨에는 칼라 카메라, 왼쪽 어깨에는 흑백 사진기, 목 앞에는 폴라로이드를 걸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랬어요. 흑백을 젤 많이 찍었지요.” 이상훈 용두산 공원 1호 사진사가 덧붙였다. 카메라를 세 대씩이나 들고 다니던 그 옛날의 사진사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지금 무언가를 열심히 쪼아 먹는 비둘기를 구경하거나 바둑 두는 노인들의 무리에 섞여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친구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다가가 둘이 서 있는 모습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하는 노 사진사를 바라본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터지는 소리와 행복해 하는 그들의 모습을 오늘도 느껴 보고 싶은 심정이리라. 그의 손에 들린 사진 광고판에는 꽃시계를 배경으로 수줍은 듯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분홍 한복 차림의 새색시와 신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양복 차림의 새신랑이 빙긋 웃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빛바랜 사진 광고판을 바꾸지 않는 노 사진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본다.
시민의 쉼터 혹은 부산의 몽마르트
“전철 타는 거 공짜지, 또 밥 주지, 그러니까 공원에 나이든 노인네들이 많이 와요. 오전 11시 반 정도 되면 급식소에 줄을 좍 서요. 지하철 공짜고, 공원에 오면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친구들과 바둑도 두고, 이야기꽃도 피우니 할 일 없는 노인들이 많이 찾는 거지요.” 장세환 사진사가 말한다. 지난 날 사진을 찍던 추억과 기억 속에 간직한 옛날을 잊지 못해서인가. 공원 여기저기 바둑판을 둘러싸고 서 있거나,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고단하게 오르내리던 194계단에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공원 접근이 용이하고 무료 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소일거리가 없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공원을 찾고 있다고 한다. 유독 할아버지가 많은 공원이라 시민의 종 앞 계단에 앉아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남녀 노인이 특별해 보인다. 주로 공원 아래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르신들에 비하여, 젊은 층들은 전망대를 배경으로 공원 위쪽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그 이유는 전망대 2층에 설치된 사랑의 열쇠와 포토 존 역할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여뽕, 많이 왔으니까 쫌만 더 힘내자 으쌰 으쌰 사랑해♥ 2013. 1. 29.”

“2022년에 결혼하자, 사랑해 오늘 우리 만난 지 176일 되는 날♡ 2013. 9. 8.”

“200일 기념 부산 여행! 200년 지나도 알콩달콩♥ 행복해 사랑해♥ 2013. 10. 27.”

용두산 공원 2층 전망대에는 알록달록 하트 모양에 적은 가지각색의 사랑 사연이 자물쇠와 함께 빼곡하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하트 모양의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고 둘만의 언약을 적은 자물쇠를 꼭 채워 그들만의 이야기를 간직하는 젊은이들과 홀로 나와 소일하는 어르신들의 하루를 품고 공원의 시간이 누적되고 있다.

태양으로 상징되는 젊음과 지는 노을빛으로 표현되는 노년의 시간이 함께하는 용두산 공원에는 시와 미술 또한 공존하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유치환 시 「그리움」]

대청동에서 중앙성당을 지나 용두산을 오르는 길에 청마 유치환의 시 「그리움」이 시비에 적혀 있다. 1994년 2월 25일 조성된 이른바 시의 거리는 청마 유치환의 「그리움」 외에도 “그대 눈물 그만큼/ 그 빛깔만큼/ 세상은 그만치 살고 싶어지리라/ 한결 더 살고 싶어지리라”라고 노래한 박태문의 「봄이 오면」, 최계락의 “복사꽃 발갛게 피고 있는 길”로 시작하는 「외갓길」, “나는 곰이로소이다/ 미련히도 굼되고/ 못나디 못난 곰이로소이다”라고 노래한 홍두표의 「나는 곰이로소이다」가 공원을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밖에 장하보의 「원」, 조향의 「에피소드」, 손중행의 「세월」, 원광의 「촛불」, 김태홍의 「잊을래도」 등 총 9편의 시가 비석에 새겨져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구 대청동에서 용두산 공원으로 오르는 길이 시의 거리라면 중구 광복동에서 용두산 공원에 당도하는 지점은 미술의 거리이다. 광복동에서 194계단 대신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용두산 공원에 도착하면 만나게 되는 미술의 거리는 이른바 몽마르트를 꿈꾸며 2008년 10월 조성된 것인데, 즉석에서 초상화를 그려 주는 거리의 화가를 만날 수 있다. 부산광역시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을 벤치마킹하여 용두산 미술의 거리를 꾸몄는데, 화가 작업실과 공예품 판매용으로 설치한 일곱 개의 부스가 각양각색의 색깔 옷을 입고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있다.

몽마르트는 가파른 언덕에 불과하지만 고흐, 모딜리아니, 피카소, 로트레크 등이 가난하였던 무명의 젊은 날을 보내면서 남긴 일화들로 예술가나 여행가에겐 성지가 된 곳이다. 용두산 공원과 공원을 감싸는 중구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도 김환기, 이중섭, 한묵, 박항섭, 최영림 등 우리나라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이 피란 시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긴 곳이다. 미술 도구를 살 돈이 없었던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린 것도 이 시기이다.[부산시 인터넷 신문 『다이내믹 부산』1343, 2008. 10. 22]

용두산 공원은 광복동·동광동·대청동·중앙동 등 원도심의 재개발과 맞물려 일찍부터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공원으로의 재창조론이 거론되어 왔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원 문화의 시행은 시비(詩碑)를 초등학생 줄 세우듯 즐비하게 늘어놓는 품위 없는 설치 구도, 처음 시도와는 달리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는 등 쉽게 드러나 보이는 단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지고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전통과 현대를 모두 아우르는 행사가 특히 돋보인다. 대표적인 행사가 전통 놀이마당과 ‘용골 프로젝트’로 불리는 힙합 댄스 마당으로 볼 수 있다.

1997년 10월 문화유산의 해 전통문화 행사 ‘시민과 함께하는 부산 민속 한마당’은 부산의 무형 문화재 예능 보유자들이 한데 모인 성대한 민속 잔치로 용두산 공원 특설 놀이마당에서 꾸며졌다. 살풀이춤, 강백천류 「대금 산조」[중요 무형 문화재 제45호], 「수영 야류」[중요 무형 문화재 제43호]와 사물놀이, 민요 메들리, 「가야금 산조」[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8호], 「부산 농악」[중요 무형 문화재 제6호], 「동래 학춤」[중요 무형 문화재 제3호], 판소리, 북춤 등의 마당이 펼쳐졌다.[최학림, 「문화유산의 해, 시민과 함께하는 우리 것 알기 ‘풍성’」, 『부산 일보』]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비보이들의 힙합 댄스가 세계 무대를 석권하면서 젊은이들의 저항과 열정 발산의 상징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비보이들의 성지가 용두산 공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부산을 떠났던 비보이들이 ‘용골 프로젝트’로 다시 돌아와 2007년 4월 문화 복지 공동체인 사상프린지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산지부 주최로 공연을 펼쳤다.

마땅한 놀이 시설이 없던 시절 도심에 있는 용두산 공원은 세상에 없는 놀이 공간이었고 부푼 가슴의 청년들이 모이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자연 발생적으로 모여든 청소년 춤 모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힙합 무대, 청소년들의 야외 마당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던 지역의 열악한 현실에서 용두산 공원은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 ‘전국 힙합 메카’, ‘비보이들의 성지’, ‘용골 춤판’ 등으로 회자되는 힙합 댄스 마당은 용두산 공원의 근대성을 탈 근대적 놀이 공간으로 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문재원, 「역설의 공간: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14) 용두산 공원」, 『국제 신문』]

2007년 개최된 제9회 힙합 댄스 경연 대회는 서울·구미·포항·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팀들이 참여하여 전국적 규모를 과시하였고,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이전 종각 앞의 무대가 아닌 용탑이 있는 용두산 큰 광장에서 진행되었다.(『중구 신문』, 2007. 5. 25] 1999년 처음 시작하여 쌍둥이 가수 ‘량현량하’, 댄스 신동이라 불렸던 ‘구슬기’ 등의 스타를 배출하였던 전국 최대의 힙합 댄스 경연 대회는 비보이들의 성지 용두산 공원에서 매년 벌어져 젊은이들의 끓어오르는 에너지 발산 창구 역할을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렇게 억압과 침탈, 가난과 고단한 삶의 상징이었던 용두산 공원은 이제 젊음과 노년, 전통과 현대,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시민의 숲으로 거듭나고 있다. 부산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진 부산 타워가 오늘도 여전히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줄행랑을 치는 자동차 물결로 휘황한 부산의 원도심 거리를 굽어보고 있다.
오늘도 꽃시계는 돈다
“언제 한 번은 중늙은이가 오더니 증명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난 그런 거 안 찍는다고 동네 사진관에 가서 찍으라고 했더니 동네에 사진관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합디다.” 이상훈 사진사가 말하였다. 고단하게 오르던 194계단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지상으로 이동시켜 주는 에스컬레이터로 바뀌었듯이, 약간의 설렘과 긴장을 품게 하던 동네 사진관과 필름 카메라가 사라진 자리를 기다리지 않아도 바로 볼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삭제할 수 있는 초스피드 사진관과 디지털 카메라가 대체하고 있다. 세월을 따라 사라진 것이 어디 이뿐이랴.

“오래 했던 사람은 벌써 세상 떴어요. 이제 우리도 곧 가요. 내년에는 여기 앉아 있으려나 없으려나 몰라요.” 장세환 사진사의 말이다. “성지 공원에도 40명이 있었는데……금강 공원, 범어사도 없어지고……해운대는 한 사람 있고……사진사가 모두 사라졌어요.” 이상훈 사진사가 덧붙였다.

깊어 가는 계절, 커다란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공원 길을 뒤덮고 있다. 유난히 독했던 지난여름 짙은 녹음의 자리를 울긋불긋 단풍이 차지하고 있다. 계절이 잃어버린 녹음의 자리에 단풍이 찾아오듯 말없이 흐르는 세월을 따라 용의 머리를 닮아 용두산이라 불린 산의 꼬리, 용미산 자리에 현재는 거대한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작은 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와 몇 겹 접힌 쪽지 하나 물어다 점을 쳐 주던 새점 할머니도 사라지고 사방 환하던 풍경 앞에는 거대한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하늘을 뭉텅 잘라먹고 있지만, 여전히 하얗고 빨간 꽃들로 수놓인 용두산 공원 꽃시계의 분침과 시침은 오차 없이 갈 길을 향해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축대에 새겨진 일본 글씨, 신사가 있을 때부터 놓였던 계단, 대화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축대의 돌이 역사의 아픈 흔적으로 남아 있는 용두산 공원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우뚝 솟은 부산 타워와 꽃시계를 배경으로 환한 웃음 짓는 추억의 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간직하게 될 것이다.

“언제까지 할지 모르지만 죽는 그날까지 지금까지 해 왔던 이 일을 열심히 하는 거지요. 내가 찍어 준 사진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 보는 낙으로요.” 용두산 공원의 1호 사진사 이상훈씨가 들려준 말이 내내 뒤를 따라온다.

근대 역사 문화관, 보수동 헌책방 골목, 자갈치 시장, 국제 시장, PIFF 광장, 국제 여객 터미널, 40계단 문화 관광 거리 등 역사와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용두산 공원 일대는 2008년 관광 특구로 지정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외피와 역할을 달리하며 현재에 이른 용두산 공원을 찾아 내국인을 포함한 외국 관광객의 발길이 더욱 더 잦아질 것이다. 그에 발맞춰 용두산 공원은 세월을 지나는 동안 그랬듯 드나드는 사람들의 손과 발길에 따라 수많은 변화를 거듭할 것이다. 변화의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듯 말없이 시절을 응시하고 있는 용두산에 하루를 마감하는 노을이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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