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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기장 도예, 사라진 우리 그릇을 빚는다
4대째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부산광역시 기장군 중심부에서 꽤 멀리 들어가는 장안읍 좌천리의 어느 한적한 국도변에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자그마한 공방이 하나 자리를 잡고 있다. 시간마다 울리는 동해 남부선 열차의 소리를 들어가며 열심히 발 물레질을 하는 이는 이곳에서 ‘상주요’라는 도예 공방을 운영하며 기장 도자기의 옛 흔적을 찾아가는 도예 작가 효봉(孝峰) 김영길이다.

경상북도 문경 출신으로 조선 전통 가마를 3대째 계승하며 평생 도자기만 만들어 온 사기장 도봉(道峰) 김윤태 선생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그는 4대째 도공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증조 할아버지부터 시작한 도공의 길이 자신에게까지 이어졌다. 그의 외가도 비록 외숙부가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끊어지게 되었지만, 그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관요가 폐지된 이후에도 계속 작업을 해온 도예 집안이다. 손재주와 작품을 만들어 내는 안목은 다 이런 집안 내림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아버지 대까지는 문경에서 대대로 도자기를 만들다 상주를 거쳐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상주요’라고 공방의 이름이 지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하다. 아버지가 작업을 할 당시에는 생활 자기보다 일본 사람들의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찻사발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찻사발의 판매처가 부산이다 보니 자연스레 부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975년,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기장에 터를 잡았다.

굳이 부산까지 와서 왜 하필 기장이었을까? 기장은 흙이 좋고 나무가 많아 도자기를 굽기에 좋은 지역이라는 것을 그의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다. 사실 기장 지역에 그릇을 굽던 가마터가 많이 있다는 사실은 지역 사람이라면 꽤 많이 들어본 이야기였다. 이렇게 시작한 기장 지역에서의 도예 작업이 거의 40여 년 동안 이어지게 되었다.

김영길은 중·고등학교까지 기장에서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처음 일본에 유학을 간 것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도자기 공부로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 이삼평[?~1655]이 일본에 조선 가마를 처음 지어 일본 도자 문화를 꽃피운 사가 현[佐賀縣] 아리타 시[有田市]의 아리타요업대학을 졸업하는 등 일본에서 9년을 머물렀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 더 평가하고 가치를 높게 산다. 이런 이유로 일본인들이 김씨의 작업장을 찾아와 도예 작업을 체험하기 위해 몇 주일간 생활하며 함께 땀을 흘리는 경우가 잦다.

그가 일본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1996년 말에 기장으로 돌아오면서부터 가업을 잇게 되었다. 하지만 귀국 후 2~3년 동안은 작업 방향을 잡지 못하여 방황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가마터를 직접 찾아 나서게 되었고, 상장안 분청사기 가마 유적에서 자신의 도예 인생을 잡아 줄 ‘비짐눈’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짐눈이란 그릇을 가마에 넣기 위하여 서로 쟁여 놓을 때 그릇이 서로 붙지 않도록 포개어 쌓는 사이에 괴는 콩알 크기의 흙뭉치를 말한다. 600여 년 전 도공의 지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비짐눈을 발견하고 과거의 도공이 실체가 없는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는 데에 전율을 느꼈다. 몇 백 년 전 누군가도 그러하였듯 자신도 그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그 길을 밟아 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학문적으로는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흔한 물건으로 버려지는 비짐눈이 그에게는 옛 방식을 따라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열쇠가 되었다. 그릇을 만들어 내는 몇 백 년 전 도공의 흔적을 통하여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간 도공과 교감을 나누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 그의 작업장에는 수백 개의 비짐눈이 쌓여 있다. 몇 년 전에는 비짐눈에서 채취한 지문들을 의뢰하여 동일 인물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하였다. 신기하게도 기장 지역에서 나온 비짐눈의 지문과 이곳에서 10㎞ 이상 떨어진 울산에서 나온 비짐눈의 지문이 일치하는 결과가 나왔다. 한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기장과 울산을 이동하며 작업을 해 왔다는 것이다.

이즈음 기장 지역 도자기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따로 작업장을 마련하였다. 그가 같은 지문의 비짐눈이 나온 울산 근처로 작업장을 마련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에 김영길이 받은 감동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김윤태 선생은 평생토록 옛날 임진왜란 전후의 찻사발 제작 작업만을 고집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은 기술들을 중심으로 기장 지역 가마터에서 발굴된 자기들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기장 지역 곳곳의 흙을 조사하여 정리하고 있는데, 기장에서 도자기가 되는 흙만 해도 200여 종이 된다고 한다.

이와 함께 기장 지역 가마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이제 그에게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기장 지역 가마터를 가 보면 예전에 사용한 흙과 유약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것들을 분석하여 정리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유물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 전시실에 보관되기보다는 도예가들이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긴다면 기장 지역 도자기 문화를 계승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장안사 근처에 새롭게 도예촌이 건설되고 있다. 그는 기장 지역 도자기를 이어 가는 도예가들이 많아져서 도예촌에서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도예촌의 임무는 기장 지역 도예의 역사적 해명과 함께 현대 도예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장의 도자기를 이어 나가겠다는 작가들이 쉽게 나타나지 않아 아쉬운 일이다.
아버지이자 스승, 도봉 김윤태
그에게 도봉 김윤태 선생은 아버지이자 뛰어넘어야 할 큰 산과 같은 존재이다. 도봉은 예전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며 평생을 도공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기장 지역 도자기의 복원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아직도 배우고 따라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지금은 온전히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김영길씨의 몫이 되었다.

쉽게 연구할 수 있는 틀이 없고 힘들지만 자신이 이런 연구를 하게 된 것은 모두 아버지 도봉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부터 도자기가 산업화되어 전기 물레 등 전기를 이용한 도구가 등장하였다. 1970년대 이후 도자기를 한 사람들은 예전 작업 과정을 거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전부터 작업을 한 사람들은 몇 백 년 전 우리 조상들이 해 오던 작업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장 지역 흙으로 만들어야 진정한 기장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흙을 사 온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산에 가서 직접 흙을 구하고 나무를 해 오고 유약을 만드는, 그 지역과 떨어질 수 없는 작품이 나왔다. 지금도 지역에서 모두 해결하는 방식이 남아 있는 것은 이전 세대에 직접 몸으로 습득한 사람들이 남아서 그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김씨는 이것이 아버지와 자신이 가장 멋지게 조화가 된, 대를 이어 온 집안 특유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가서 과학적인 방법론을 배우고 보니 일본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의 전통 기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글로 읽고 배우는 방법들이 그에게는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것들이었고, 이를 통하여 자신이 취해야 할 위치가 자동으로 정해진 것 같다.

아버지가 하던 작업을 어깨너머로 배워 오면서 이제는 우리의 전통을 자료화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장인이 하는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며 익혀 가는 방식 자체가 눈에 보이는 자료보다 스스로에게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 시대에는 그런 장인들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는 전통의 명맥이 끊기는 가장 큰 이유로 전통적인 방식이 쉽게 자료나 문서화되지 못하는 점을 꼽는다. 그래서 자신은 아버지의 방식을 정리해서 도예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문서로나마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앞으로 평생 해야 할 또 하나의 작업이 정해진 것이다.

도자기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어떤 작업을 해 나갈지 작업의 방향성을 잡는 것이다. 그 길만 정해지면 가는 길이 훨씬 빨라지지만 쉽게 정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결국 아버지의 큰 뜻이라고 생각한다. 기장 지역 도자기를 도자사적(陶瓷史的)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면서,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가 제자들과 함께 작업을 하며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보니 더더욱 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직접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는 정확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아버지가 말씀하신 한마디 한마디가 작업에서 실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결과물을 비교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산, 가마
김씨가 대를 이어 전통을 지키는 작업을 하는 이유는 그저 좋아서만은 아니다. 이제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작업을 이어 나갈 것이다. 조선과 일본에서 발굴한 몇 백 년 전 도자기의 파편들이 수십 상자씩 그의 작업장에 쌓여있다. 이렇게 항상 파편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편을 분석하며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그는 기장에 좋은 흙과 원료가 있으니 기장 지역의 도자기는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분석해서 ‘흙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실제 작품을 만들어서 재현하면 사람들도 직접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전통 기법을 따른 작업을 계속 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인 도봉 선생이 그에게 물려준 것 중 가장 큰 것은 기술적으로 전통을 찾아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준 것이다. 이를 위해 실질적으로 남겨 준 것이 바로 ‘가마’이다. 그의 작업장에 있는 가마는 ‘조선의 도공’이라 불리는 도봉 선생이 직접 제작한 전통 가마이다. 도봉 선생은 망댕이로 만드는 전통 가마 제작 기술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작업장을 지키는 것이 사실은 아버지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가마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웃으며 농을 던진다. 그만큼 그와 그의 작업에 가마의 영향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가마의 관리도 중요하지만 아버지가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하여 평생에 걸쳐 만든 가마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이 가마를 잘 활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앞서 기장 도자기의 훌륭함을 보여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그의 자신감은 이처럼 강력한 그만의 무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자기는 아무리 모양을 잘 만들어도 가마에서 잘 구워지지 않으면 작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흙도 중요하고 좋은 기술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가마라고 말한다. 도자기를 잘 구울 수 있는 가마를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 따라 작품이 완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자랑이자 집안의 유산인 ‘상주요’의 가마는 지붕이 양철로 되었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몇 백 년 전의 가마와 같다. 작업실 뒷문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것도, 작업실 앞 쉼터로 만들어 놓은 탁자에서 훤히 보이는 것도 바로 아버지가 물려준 가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라보며 상태를 살피고 땔감을 챙기는 것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매일 작업하며 만들어 둔 기물을 모아 그 중 좋은 것들만 추려 일 년에 두 번 가마에 불을 피운다.
상상 속 도공과의 대화
일반적으로 그저 도자기에 있는 흠이라 말하고 넘겨 버리는 것도 그가 보면 도자기를 만드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물레는 오른쪽으로 돌렸는지, 왼쪽으로 돌렸는지, 도자기 바닥에 있는 손자국만 보아도 오른손으로 유약을 발랐는지, 왼손으로 발랐는지 알 수 있다. 유난히 마무리가 이상하게 된 도자기를 볼 때면, 어쩌면 도공에게 급한 술 약속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기도 한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몇 백 년 전 도공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그는 시간이 날 때면 기장 지역의 가마터를 찾으러 다닌다. 처음 이 길을 가도록 만든 ‘비짐눈’을 찾은 것도 이런 취미 덕분이었다. 가마터를 찾으러 다니면서 이런저런 노하우가 쌓였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이나 마을 이야기 등을 향토지 등에서 찾아내고 적당한 마을로 찾아간다.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단서가 될 한마디라도 듣게 되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 가 본다. 대부분의 가마는 땔감을 구하기 쉽고 흙을 찾기 쉬운 곳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산 주변에 많이 있다. 계곡을 따라가다 도자기 파편을 줍는 일은 흔한 일이다. ‘깨어진 도자기 파편이야말로 살아있는 유산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일본에 계신 선생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김씨는 가마를 찾으러 갈 때면 꼭 예전 도공들이 끌어당기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가마터의 위치를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보존이 어렵기도 하고, 알려지면 더 빨리 훼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명례 일반 산업 단지를 조성하면서 남아 있는 가마터가 많이 사라져 버렸다. 그걸 지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해 봐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흔히 가마터는 산 아래에서 20m 이내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에서 땔감을 구하면 아래로 굴려서 가마로 가지고 가는 방법이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장 지역에는 특이하게 산 정상에 위치한 가마터가 있다. 그는 이 가마터를 가장 아꼈다. 힘들거나 외로운 날이면 막걸리에 안주 하나를 사 들고 올라가서 그 곳에 머물렀던 도공을 생각하였다. 어떤 도공이 이렇게 힘든 곳에서 살았을까 혼자 상상도 많이 하였다. 흙이며 나무며 주변 환경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예상할 수 있듯이 이 가마터에는 하품의 그릇들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지 않고서는 이 상황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도공을 생각하자 자신의 삶이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일본에서 후배가 오거나 제자가 오면 가장 먼저 기장의 가마터에 데려간다. 우리의 유산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려 주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끼는 가마터가 명례 일반 산업 단지에 포함되어 사라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씨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가마터만큼은 살려 내리라 다짐을 하였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알아봤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가마터가 사라지기 전날 밤 혼자 그 곳으로 가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명례 일반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이제 그 가마터는 사라져 버렸다.

무형 문화재인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버지 것을 편히 받아 한다는 주변의 말들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몇 백 년 전 당대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도자기를 구웠을 도공들을 생각한다. 제자들이 떠나갈 때면 비짐눈을 선물로 준다. 그들에게 힘들 때는 이 속에 담긴 땀과 눈물을 생각하며 이겨 내고 용기를 가지라고 말해 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렇게 고된 작업을 하며 살아간 도공들이 있는데 이렇게 좋은 작업장을 가지고 힘들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기장의 가마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없었다면 자신은 일본에서 배워 온 기교를 가지고 평생을 먹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전통 기법을 이어 나갈 것이다.
삶의 원동력, 어머니
김영길씨가 4대째 도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버지만큼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외가는 8대를 내려오는 도공 집안이었다. 도공 집안에서 태어나 도공의 아내로 살아온 어머니는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하였다. 흙을 밟는 일처럼 고되고 힘든 일을 평생 한 어머니는 고된 삶이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해에 이른 나이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문득문득 가슴이 아파 온다. 흙이라고 하면 보기 싫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는 더욱 도공의 삶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며 얄팍한 기교를 모두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어머니가 평생 하신 작업의 1/3만이라도 따라가 보자 하는 것이 지금의 이 길을 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에 도공들의 지문이 남은 비짐눈을 찾게 되면서 그의 결심은 이제 삶의 지향점이 되었다. 처음 지문을 발견하였을 때의 전율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 ‘열심히 살아라’라고 말해 주는 옛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걸어가셨던 그 길을 자신도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유학 시기에 만난 일본인과 결혼을 하였다. 일본에서 한국까지 결혼 생활을 위해 건너 온 아내를 생각할 때면 이상하게도 다른 지역에서 각각 발견된 비짐눈 속 지문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당시라면 도공은 도공의 집안끼리 혼인을 하였을 것이고, 어쩌면 지문의 주인공은 기장 도공의 딸로 태어나 울산까지 시집을 간 여인인지도 모르겠다고 상상을 해 본다. 그런 이야기들을 상상하다 보면 과거라는 시간이 사라지고 그들의 삶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공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그들의 애환을 떠올리며 자신의 오만함을 털어 내려 노력한다.
무형 문화재
아버지인 도봉 김윤태 선생은 부산광역시 지정 무형 문화재 제13호이다. 김영길씨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어 보유자 후보로 아버지의 기능을 이어 가고 있다. 보유자 후보는 보유자가 사망하면 바로 그 기능을 이어 받는 단계이다. 지금 그에게는 무형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최종 심사가 남아 있다. 무형 문화재는 명장과 달라서 자체가 계보를 중요시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신을 전수자로 지정하면서 부산시의 심사를 받기도 하였다. 보유자가 사망하게 되면 그 기능을 바로 전수받아 이어 가는 인물로 인정하기 때문에 전수자로 지정받을 때에도 심사를 받아야 하였다.

무형 문화재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작업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무형 문화재가 되면 정확한 계보가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명예로운 일이다. 경제적으로도 조금의 지원이 있어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지원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늘었다.

아버지 도봉 선생이 무형 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증조 할아버지 대부터 도공으로 살아왔던 계보를 정확하게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태어난 문경에는 증조 할아버지가 사용한 가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 가마에서 일해 왔던 사람들의 증언도 큰 몫을 하였다. 할아버지가 도예 일을 하신 것과 외가 쪽이 도예 일을 해 왔다는 자료도 모두 남아 있었다.

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재이기 때문에 부산에서 태어났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40여 년을 기장에 터를 잡고 본격적인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그 세월을 인정받아 사기장이 될 수 있었다. 무형 문화재는 종목당 한 명만 지정되기 때문에 경쟁도 심하다. 지금은 제자들이 그런 계보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오래도록 꾸준히 작업을 한다면 모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김영길씨는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다음 달에 제자가 작업장에서 살기 위하여 서울에서 내려온다. 아버지의 제자였던 분이 김해에서 활동하면서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심사를 받고 있는데, 그 아들이 업을 이어 받고 싶어 한다며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배우는 대신 김영길씨에게 배우기로 하였다. 그의 작업장에서 전통 도예의 기본적인 것 들을 가르치겠지만, 결국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의 기술을 아버지에게 배워야 한다. 물론 두 명의 선생에게 배워서 두 집안의 기술을 모두 배우면 저야 좋겠지만.

김영길씨는 유학 이후 계속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였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도 아들이다 보니 그를 다른 제자와는 다르게 대하시는 것 같았다. 태어나 계속 함께 살다 보니 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 이전에는 도자기 이야기 몇 마디를 할라치면 어느 순간 서로에 대한 불만 이야기가 더 많이 오고 갔었다. 각자가 서로를 너무 잘 알다 보니 작업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일상사로 주제가 바뀌면서 감정을 앞세우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마저 모두 추억이라 아련하게 그리워지지만 당시에는 참 힘들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전통 기법과 김영길씨가 하는 기법 사이에는 세월의 차이가 컸다. 아버지는 평생 옛날 그대로의 찻사발을 만드셨는데 그가 그런 작업을 그대로 이어받기란 쉽지 않았다. 이미 본인의 작품을 인정받고 그것으로 생활이 가능한 아버지를 그가 그대로 따라간다면 결국 자신의 세계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생활 자기를 만드는 데 집중하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한마디로 호구지책이 있어야 계속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생활 자기나 생활 소품 등을 위주로 만들면서 다양하게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깊이는 그리 깊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기장 지역의 도자기 파편 등을 직접 보고 만지게 되면서 마음이 움직였다. 아버지께서 유도하신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도자기가 정말 아름답고 멋지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작업이 더 크게 보였다.

사실 예전에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무궁무진한 도자기의 세계에서 옛 모습 그대로의 찻사발 한 가지만 고집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의 작가들은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해 보고 싶어 한다. 그도 그런 마음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현대 도자기에 유용한 다양한 기술들을 많이 배웠다.

그런데 일본의 작가들은 다양한 시도를 하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조선의 도자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전기 가마, 가스 가마 같은 기계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옛날 도자기가 가진 무언가가 아버지의 작품에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그 매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잊고 있었던 아름다움을 멀고 먼 타국에서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인생을 길게 봤을 때 자신이 평생 즐겁게 심취할 수 있는 것은 순간적인 화려함보다 옛것을 따라가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당시에 운명처럼 기장 가마터의 도자기 파편들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버지와 가장 많이 가까워졌다. 아버지와 정말 진지하게 도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에게 전통 기법을 무척이나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아들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억지로 시켜 봤자 그가 반발을 할 것이 뻔해서 쉽게 가르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의 작업을 잇는 작업을 하겠다고 먼저 말을 꺼내자 그때부터는 아버지가 그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되었다. 이 또한 그가 스스로 기장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기술적인 뛰어남을 직접 보고 느끼지 못하였다면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도공 집안에서 내려오는 전통이라는 것은 형태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작품을 만들 때 기술적인 부분에서 더 중요하게 드러난다. 형태를 만들기 전의 흙의 배합 같은 기초적인 비법은 작업하는 사람들에 따라 달라서 그의 집안에도 전해 오는 방법이 따로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의 기술은 아버지가 알려 주신 가마에 불을 때는 기술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증조 할아버지에게 그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가마에 불을 때는 기술은 마냥 연습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연습할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다.

가마는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불을 때지 않기 때문에 마음 놓고 연습이라는 것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불을 때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눈과 온도로 배워 나가는 방식이었다. 그럴 때면 그를 옆에 앉혀 두고 아버지가 지나가듯 한마디씩 해 주시는 말씀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지금 혼자 불을 피울 때면 아버지가 옆에서 지켜보는 듯 툭툭 아버지의 말씀들이 들려온다. 이제는 그런 말씀들을 기억하며 스스로 배우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기장 지역 도자기 연구를 하게 된 계기도 결국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문헌을 아무리 찾아 봐도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적인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구전으로 윗사람의 작업을 어깨너머로 보고 내려온 것이라 문헌으로 정리해 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장 지역 도자기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부딪친 벽이 자료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유물은 있지만 유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해석해 줄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백 수십 년 전의 작업 방식을 평생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분이 바로 아버지였다. 유물과 김영길씨 사이에서 아버지가 중간 매개자의 역할을 해 주면서 기장 지역 도자기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전통 도예 기법을 배우면 배울수록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비법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실감하게 되었다. ‘전통 도예 기법’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연구가 사실은 아버지가 평생을 고수해 온 작업 방식을 배우고 탐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물은 형태를 가지고 역사를 대변하지만, 유물이 말을 못하니 중간에서 아버지의 해석과 재현이 큰 도움이 되었다.

기장 지역의 도자기가 우수하다는 것을 작품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해설을 해 줄 수 있는 매개자의 역할을 그의 아버지와 같은 장인들이 해 주었기 때문에 전통 기술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김영길씨는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기술들을 잘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는 함께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그의 작업장은 생산과 판매가 모두 이루어지는 곳이다. 작은 공방들이 오래도록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방 자체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김영길씨는 말한다. 그는 작가들이 경력 쌓기 식의 대외적인 전시를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시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계기도 아닐 뿐더러 전시장 불빛으로 바라보는 작품은 사람들에게 위화감과 이질감을 준다. 단지 자신의 프로필에 한 줄 더해지고, 이름을 떨친다 한들 일상과 멀어진 작품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였다. 그의 결론은 작업장이 전시장이자 판매장이 되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상의 어울림’이었다.

매년 두 번, 날씨 좋은 봄과 가을 정해진 날에 일주일 동안 전시회를 연다. 작업장이 갤러리가 되는 것이다. 작업장을 방문하게 되면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다양한 과정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고, 작품에 본인들만의 의미 부여가 가능해진다. 일주일 동안 전시를 한 다음 바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작업장에도 불필요한 전시 시설을 준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유리장 하나로 나누어지지 않도록 현실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와 제자들이 만든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선보이며 작품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가면 결국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그들이 작품을 보고 전하는 의견들을 직접 듣고 서로 의견 교환을 할 수도 있다. 한정된 자리와 시간, 엄숙한 조명 등 사람들이 어렵고 불편할 수 있는 제약들을 제거한 채, 느긋하지만 끈끈하게 결속되는 교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이런 방법이 오랫동안 작가와 팬들이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장에서의 일상은 느슨해 보이지만 항상 작업 일정이 정해져 있다. 가마에 불 때는 날이나 전시회 등의 일정을 매년 같은 기간으로 정해 두면 작업에 일정한 원동력을 부여할 수 있어 작업 능률도 좋아진다. 공방을 찾아오는 사람들과도 그런 일정을 공유하면 헛걸음하는 일 없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공방이 주는 좋은 점은 가게나 공장과는 달라서 아무나 편하게 드나들며 차를 마시거나, 작품을 구경하며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작업장 내부는 그의 공간이지만 작업장에 누구나 찾아올 수 있도록 대문도 하나 없이 열린 공간으로 남겨 둔다.

그의 어울림에 대한 인식은 예전 도공들의 삶과 매우 비슷하다. 예부터 도공들이 가마에 불을 피우는 날이면 돼지를 잡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가마를 세 번 망치면 야반도주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작업을 하던 이들에게 마을 사람들의 도움은 매우 큰 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과물을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작업인 가마에 불을 때는 날이면 그 동안 도와준 이웃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작품이 잘 완성되기를 기원하였다.

유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가 많이 필요하였다. 예전에는 대량의 재를 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재를 가지고 오면 대신 그릇을 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옹기 마을이나 남창장에 가면 재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옹기를 주기도 한다. 이런 물물 교환을 통해서 유약을 만드는 등 사람과의 관계가 없이 그릇을 만들기란 힘든 일이다.

기장 지역에는 도자기협회 등 도예가들의 모임이 있다. 협회 회원들끼리 1년에 한 번 정기전을 개최하거나 기장 지역 축제에 참여하는 등 교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소규모라도 각자 자신들의 작업장에서 도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더 좋은 효과를 거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활성화되고 그 움직임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장지역 도예를 알릴 수 있는 더 좋은 행사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장 지역의 도자기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기회도 자연스레 생길 것이다.
도예가의 길
기계식 가마와 달리 그가 쓰는 재래식 가마는 한번 불을 지피는 데 드는 나무의 양도 엄청나다. 한정된 공간에 최대의 품이 들어가기 때문에 무조건 제일 좋은 작품만 선별해서 넣는다. 6개월 동안 수천 점을 만들어서 그 중 잘 만들어졌다 싶은 것으로 700여 개를 추려 내어 그 작품들만 가마에 넣어 굽는다. 이렇게 넣어도 15~20% 정도만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다. 2012년 10월에는 600여 개를 가마에 넣어서 마지막에 작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사발 14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 나머지 500여 개는 그 자리에서 모두 깨뜨려 버린다.

몇 개월을 고생해서 만든 것들을 깨어 버리는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생활 자기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라면 굳이 버리지 않고 생활에 이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지금 만들고 있는 찻사발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작품이다. 스스로 돈을 받고 팔아도 부끄럽지 않고 미안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 처음부터 깨뜨려 버린 것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기장 도자기를 연구하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던 시절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릇을 만들었다. 가마에서 꺼내어 보니 작품으로 쓸 수는 없지만, 집에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없어서 본가에 갖다 드리며 식기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집에 오신 손님들에게 어머니가 마음 편히 나누어 준 그 식기가 사람들을 여러 번 거치며 어느 순간 매매가 된 것이다. 그의 작품을 아는 어떤 분이 그것을 보고 직접 문제의 그릇을 들고 작업장으로 찾아왔다. 그 때의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작품을 깨는 이유는 밖에 나가면 그 작품 아래 서명이 바로 작가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하자가 있는 작품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어느 순간 작가를 부끄럽게 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이 아까운 걸 굳이 왜 없애 버리느냐며 버릴 바에는 달라는 말을 하지만, 작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만큼 창피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부분들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작업한다 하여도 사람들의 마음이 한순간에 돌아서 버리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돈의 유혹이 오더라도 자신의 작품 인생에서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 길이 바로 도예가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본인의 삶을 서술하신 자서전이 있다. 아들인 그조차 알지 못하였던 도예가로서의 삶과 아버지만의 기술을 정리해 둔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작업장을 제대로 지켜나가며 언젠가 아버지의 자서전을 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때는 아버지의 제자 분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아버지를 기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세상에서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그늘에 아들인 그가 항상 묻혀 있다.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아버지가 지도해 주신 모든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립해서 적어도 자신의 집안이 4대 동안 같은 길을 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이 그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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