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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멸치떼 춤추는 기장 대변항
대동고변포를 줄여 대변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 마을이다. 항구인 대변항(大邊港)이 있으며 자연 마을에는 대변 마을, 무양(武陽) 마을, 흙구덩이 새마실 마을이 있다. 대변 마을은 조선 중기 때부터 사용된 이름인데 당시 김성련이란 선비가 적은 『병술 일기(丙戌日記)』에 ‘우기이대변포문생원가(又寄以大邊浦文生員家)’라는 기술이 있었고,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라는 긴 지명을 줄여 대변포라 부르다가 대변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무양 마을은 과거에 남산(南山) 봉군(烽軍)[봉화를 올리는 일을 맡아 보던 군사]들의 무영(武營)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영이 무양(武陽)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흙구덩이 새마실은 진흙과 같은 흙이 많은 새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대변리의 주산업은 어업이지만 특히 봄과 가을에 잡는 멸치가 주종이다. 봄철 대변항에는 왕멸치가 잡혀 오는데 멸치의 길이가 15㎝나 된다. 항구에 들어온 멸치 어선들은 잡은 멸치를 털어 내는데, 노랫가락에 맞추어 멸치를 털어 내는 모습이 대변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풍경이다. 대변항은 전국 유자망(流刺網) 어획고의 60%를 차지한다. 기장의 멸치 중 봄 멸치는 횟감으로 좋고 가을 멸치는 찌개용으로 제격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경상남도에서 주로 생산하는 멸치젓이 기장 대변항의 대표적인 생산품이다.”

『두산 백과』 ‘대변리’ 항목의 내용이다. 인용하는 김에 하나 더 인용하자. 마로니에북스가 2010년 펴낸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의 대변항 대목이다.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곳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한 대변항은 기장의 자랑인 기장 멸치 축제가 열리는 항구로 미역 맛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물살 센 동해 바다이지만 바로 앞의 죽도가 방파제 역할을 해 주어 천혜의 조건을 가진 어항으로 꼽힌다. 고기잡이 어선들이 만선의 기쁨을 알리는 고동을 울리면 잔잔하던 물결이 일렁이며 포구가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싱싱한 회와 해산물을 준비한 식당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으며 멸치 철인 3, 4월엔 싱싱한 멸치 맛을 보려는 사람들과 멸치를 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로 작은 항구가 들썩인다. 파도는 잔잔한데 사람들이 더욱 분주한 모습이 삶의 활기를 정겨운 풍경으로 전해 준다. 멸치 철이 아니어도 기장의 유일한 섬인 죽도와 아름다운 등대를 바라보며 포구를 따라 걸으면 마음까지 잔잔해짐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바닷가 마을이다.”
대변을 대표하는 어종, 멸치
두 인용문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가 있다. 멸치다. 두 인용문뿐 아니라 한국에서 발행하는 어느 책자든, 어느 매체든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를 관광 차원에서 소개하는 글에는 열에 열 멸치가 들어간다. 멸치가 들어가지 않고는 깊은 맛이 우러나지 않는 국물처럼, 멸치를 집어넣어 글의 맛을 깊게 한다. 대변에서 멸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멸치는, 그러나 한 세대 전만 해도 대변 전유물이 아니었다. 해안을 낀 기장 갯마을 곳곳에서 멸치잡이가 성행하였다. 이는 2001년 발간 『기장군지(機長郡誌)』에서도 확인된다. 『기장군지』 권2 「어요(漁謠)」 편에는 기장 지역에 전승되는 노래를 채록하고 있는데, 일반 어요와 함께 기장 거의 전 지역에서 멸치 관련 후리 소리를 채록한다. 이를 보아도 멸치는 기장 전 지역을 대표하는 어종이라 할 수 있다. 장안읍 월내리에는 멸치잡이와 젓갈 사업으로 번 돈을 지역에 환원한 인물을 기리는 불망비(不忘碑)까지 있다.

멸치 어요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문인들의 문학 작품에서 비늘 번쩍이며 꿈틀거리는 언어로 되살아난다. 부산을 대표하는 김규태 시인은 멸치를 이렇게 노래한다. “기장 대변 바닷가/ 은빛으로 눈부시게 살다가/ 죽어서도 은빛을 버리지 않고/ 그물에서 무참히 털리고 있다// 진황색 햇살의 반사로 더욱 윤기 나는/ 은은한 별빛 같은/ 적막한 죽음의 의식과는 거리가 먼/ 죽음조차 시시하다고 증언하는/ 하얀 천사들의 청징한 눈빛들.”

젓갈을 노래한 작품도 있다. “썩고 썩어도 썩지 않는 것/ 썩고 썩어서 맛이 생기는 것/ 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아서/ 맛 중의 맛이 된 맛.”[문병란 시 「전라도 젓갈」] 멸치를 노래한 작품은 전국적으로 드물지 않지만 특히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에게 멸치는 곧잘 등장하는 창작 대상이다. 그러나 비늘 번쩍이는 생생한 어요를 창조하는 이는 다름 아닌 멸치잡이 종사자가 아닐까? 그들의 거친 몸짓 하나하나, 그들의 투박한 토박이 언어 하나하나가 곧 시며 노래이리라.

기장 멸치는 우리나라 멸치 소요량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멸치 어장은 가깝게는 대변 연안에서, 멀리는 대마도 경계 수역까지다. 청정 어장으로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수역이다. 여기서 잡히는 멸치는 살이 야물고 지방질이 풍부하다. 그래서 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크기도 다른 해역 멸치보다 월등하게 크다. 예전엔 나라님 진상품이었다. 지금도 기장 멸치 축제가 열리는 봄철이 되면 멸치 맛을 보러 외지인이 미어터지고 외지인을 싣고 온 차가 미어터진다.
대변은 다대포와 함께 국가가 관리하는 어항
부산에는 어항이나 포구마다 어촌계가 있다. 모두 50군데 남짓 된다. 그 중에 국가가 관리하는 어항은 대변과 다대포 두 군데다. 국가가 관리하는 어항답게 대변에는 어업 관련 협회가 많다. 고기 잡는 그물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선망협회가 있고 정치망협회가 있다. 자망협회도 있다. 대변멸치유자망협회도 그 중 하나다. 자망(刺網)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유자망(流刺網)과 고정 자망(固定刺網)이다. 조류 따라 흐르면 유자망이고, 고정되어 있으면 고정 자망이다. 요즘은 자망 하나로 통일한다. 유자망협회도 자망협회로 바꾸어야 하는데 옛날 쓰던 이름이 익숙하여 그대로 쓴다. 유자망 하는 사람끼리 결속력 같은 것이 협회 이름에서 읽힌다.

대변멸치유자망협회 박정수 총무를 만나 대변 멸치 이모저모를 들어 보았다. 박 총무는 멸치 배 선원 출신으로 선장을 거쳐 선주가 되었고 올해 협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멸치잡이 노래인 후리 소리가 격식이 없고 정형이 없듯 박 총무 인터뷰는 대변 수산업협동조합[수협] 창구 한편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진행되었다. 그가 하는 말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틈엔가 시가 보이고 노래가 들리리란 믿음에서다. 사실 시든 노래든 그 바탕은 생활이다. 생활에서 우러난 ‘다시 물’ 같은 깊은 맛이 곧 시이며 노래이지 않던가.

박 총무는 몸도 딴딴하였고 표정도 딴딴하였다. 얼굴도 그렇고 짧은 소매에 드러난 팔뚝도 구릿빛이었다. 바닷사람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잘 웃었다. 호감을 곧잘 드러내었고 호방하였다. 화끈하면서 다정다감한 경상도 기질을 보는 것 같았고 부산 사람 성정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부산 사람의 저런 성정이 부산 바다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부산 바다는 동해와 남해를 아우른 바다다. 동해와 남해 경계는 오륙도. 육지에서 보아 오륙도 왼쪽이 동해고, 오른쪽이 남해다. 동해는 수평선 광활한 탁 트인 바다. 바다를 보며 걷노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 아기자기한 섬들로 다도해라 불리는 남해는 다정다감한 바다다. 뒤끝 없이 화끈하면서도 잔정이 넘치는 부산 사람 성정 혹은 기질은 탁 트인 동해 바다와 다정다감한 남해 바다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호칭이 애매하였다. 총무라 부르려니 명색이 선주인데 싶어 망설였고 선생이라 부르려니 뭔가 어색하였다. 다행히 나와 1960년생 쥐띠 갑장이었다. 대변멸치유자망협회 총무 자격으로 만났으니 그렇게 부르겠다고 하였고 갑장은 순순히 그러라고 하였다. 박 총무가 멸치와 연을 맺은 세월은 25년이다. 33년 전 총각 박정수는 무일푼으로 울산에서 대변으로 넘어와 이 일 저 일 하다가 멸치 배를 탔고, 선장이 되었고, 그리고 선주가 되었다. 그 세월이 25년이다. 외지에서 편입되어 선원 생활을 하다가 선주가 된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라고 한다. 대변에서는 박 총무가 유일하다.

토박이들은 가업을 물려받아 선주가 된다. 처음 들어와서는 알력도 적지 않았고 텃세에 기죽기 싫어 토박이들과 머리 터져 가며 싸우기도 하면서 삶의 터전을 일궈 나갔다. 마침내 자수성가하였다. 여기 토박이 부인을 만났고 두 아이는 모두 대변이 고향이다.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대변 사람이고 대변 토박이인 것이다. 그와 대변 도로를 걸어가는 동안 노점 상인들이 먼저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 게 그 방증이리라.
유자망은 조류 따라 흘러가는 그물
“바다에 던져 물 조류 따라 흘러가는 그물을 유자망이라 합니다. 조류 따라 흘러가서 그물로 고기 잡는 방식을 유자망 어업이라고 하고요.” 멸치 배 선주 박정수 선생이 대변멸치유자망협회 총무로 선임된 것은 2013년 6월 15일이다. 회원은 모두 멸치 배 선주로 10명 정도 된다. 한창 때는 40척 가까이 됐는데 다들 출항하여 고기를 남획하는 바람에 어가(漁價)가 떨어지고 타산이 맞지 않아서 어업을 그만두기도 하였고 자체적으로 감척하기도 하였다.

멸치 잡는 그물을 유자망이라 한다. 유자망은 배드민턴 네트 모양 그물을 수직으로 펼쳐서 조류를 따라 흘려보내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리게 하는 어망이다. 폭은 10m 정도지만 길이는 늘이고 줄이는 것이 가능하여 보통 1㎞가 넘는다. 멸치 어로 작업이 끝난 배는 멸치가 잡힌 유자망을 둘둘 감아서 대변항으로 돌아온다.

멸치 배 크기는 20톤에서 29톤 사이다. 승리 ‘승(勝)’을 쓴 박 총무 소유 ‘창승호’는 25톤 근해 자망 어선이다. 근해 자망은 설명이 좀 필요하다. 우선, 근해를 설명하자면 어선에게 바다는 세 가지로 나뉜다. 연안과 근해, 그리고 원양이다. 연안은 육지와 가장 가까운 바다이고, 가장 먼 바다가 원양이며, 그 중간이 근해이다. 육지 가까운 바다에서 조업하는 배일수록 작고, 먼 바다일수록 크다. 연안 어선은 8톤 미만, 근해는 8톤 이상이며, 원양은 천차만별이다. 오징어잡이는 40톤급, 참치 트롤은 400톤급이다. 조업 방식에 따라 또 나눈다. 그물이나 통발 등등 고기 잡는 도구나 방법을 따져서 자망 어선, 통발 어선, 기선 저인망 어선, 잠수기 어선, 복합 어선 등등으로 나눈다.

“저희들은 멸치를 잡는 같은 업종끼리 상부상조하고 어가 유지나 고기를 팔 수 있는 양만큼만 잡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바다에 고기가 많아도 적정량만 잡아 옵니다. 그걸 오래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자율 어업 공동체를 만들어, 부산시에도 가입되어 있는데, 고기를 자율적으로 적정량만 잡도록 권장하고 있는 거죠.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고기가 많으면 다 잡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우리 대변 유자망 사람들입니다. 고기가 바다에 아무리 많이 있어도 협회에서 결정한 대로만 잡습니다. 그물에 걸리는 고기 양을 계산하여 그물 놓는 길이를 스스로 조절하는 거지요. 특이한 조직이지요. 멸치잡이 배가 들와서 멸치를 털면 협회에서 나가 봅니다. 적정량만큼 잡았는지. 초과한 양은 협회에 귀속시킵니다.”

대변멸치유자망협회가 하는 일을 물어 보자 미리 준비해 둔 듯 답변이 속사포로 이어졌다. 툭 트인 바다를 보며 거리낌 없이 살아왔을 바다 사나이 기질이 어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에 보이는 고기를 잡지 않는다는 말도 의아하였고, 초과량을 귀속시킨다는 말도 의아하였다. 의문은 나중에 풀렸다. 고기를 많이 잡으면 당장은 이익인 것 같아도 어가가 떨어지고 자원이 고갈되면 결국 모두가 망한다는 논리였다. 모두가 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대변멸치유자망협회에서는 잡을 수 있는 물량을 정해 놓고 철저하게 통제한다. 이를 어기면 고기를 압수한다. 그러기에 고기를 일정 이상 잡으면 더 이상 잡지 않으며, 본의 아니게 초과해서 잡은 고기는 덜 잡은 동료 멸치 배에 나눠 주는 일이 생긴다.
대변멸치유자망협회는 ‘선심협회’
대변멸치유자망협회 연회비는 1인당 200만 원. 회원이 10명 남짓이니 1년 거둬들이는 회비는 3,000만 원 안쪽이다. 그런데 연간 씀씀이는 5,000만 원 안팎으로 예산 두 배에 가깝다. 경로당이나 청년회, 조기회 같은 데 행사 비용을 협찬해 주고 중학교 장학금도 지급하는 까닭이다. 대변멸치유자망협회에 협찬을 요청하면 거의 다 들어준다 해서 박 총무는 이 협회를 ‘선심협회’라 하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산을 초과하는 돈은 적정량을 초과해서 잡은 멸치에서 보충한다. 협회에서 400통만 잡으라고 정하였는데 선장이 판단을 잘못하여 450통을 잡았을 경우 50통을 협회로 귀속시킨다. 50통의 절반 25통은 고기 잡는다고 수고한 선원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25통을 협회 운영 경비로 쓰는 식이다. 이러한 협회 귀속 방식은 선주든 선원이든 누구나 수긍하였고, 이는 곧 멸치 어장을 고갈시키지 않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가장 효과적이면서 강렬한 자구책이 되었다.

멸치 잡는 그물은 어떤 걸 쓸까? 그물망의 뚫려 있는 구멍 하나하나를 그물코라 하는데 대변에서는 주로 800코를 쓴다. 800눈이라고도 하는데 폭 10m 그물 한 줄에 횡으로 난 구멍이 800개란 뜻이다. 숫자가 높을수록 구멍이 많고 구멍이 많을수록 그물에 걸리는 고기는 작아진다. 800코는 젓갈용 큰 멸치를 잡는 사이즈. 코 숫자에 따라서 잡히는 멸치도 다르다.

대변에서는 남해나 거제와 달리 코 숫자가 낮은, 그러니까 구멍이 넓은 그물만 쓰기에 잡히는 멸치가 굵다. 어린 멸치를 잡지 않음으로써 어장을 보호하는 것이다. 16절보다 구멍이 좁은 17절은 아예 쓰지 않고 가을 멸치를 잡을 때는 16절보다 구멍이 넓은 14절을 쓴다. 가을 멸치는 여름 멸치보다 훨씬 굵다.

멸치 굵기는 통상 길이로 나타낸다. 멸치는 길수록 굵기 때문이다. 길이에 따라 다음 다섯 가지로 나눈다. 대멸은 7.7㎝ 이상, 중멸은 4.6~7.6㎝, 소멸은 3.1~4.5㎝, 자멸은 1.6~3㎝, 세멸[지리멸]은 1.5㎝ 이하이다. 멸치의 크기는 조업 시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초여름 갓 부화한 것이 세멸이고, 한여름 한창 자라는 게 자멸·소멸·중멸이다. 대멸은 가을 이후 이듬해 봄까지 다 자란 멸치다. 매년 봄 기장 멸치 축제에서 접하는 멸치가 다 자란 멸치, 16절 대멸이다.

크기가 여름 멸치 다르고, 가을 멸치 다른 만큼 잡히는 어장도 철 따라 다르다. 대개의 어종이 그렇듯 멸치 역시 이동하면서 크는 까닭이다. 봄 멸치 어장은 대변 주위 3마일 연안에서 거제도 앞이나 대마도 경계까지다. 가을 멸치는 대변 북쪽에서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까지 나가서 잡는다. 거기서 조업을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대마도 근해까지 가기도 한다. 이동하는 멸치를 쫓아가서 잡으므로 멸치가 가는 곳이라면 대변 멸치 유자망 배 또한 어디든 간다. 물론 대한민국 수역 안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고기 양이요? 아무래도 연안 쪽은 자꾸 오염이 돼 가다 보니까 바깥으로 멀리 나가는 편입니다. 항해를 오래 하는 거죠. 바깥으로 나가도 멸치가 전체적으로 양이 많지는 않지만 어군이 포착만 되면 적정량만큼은 잡아 옵니다.” 멀리 나가긴 해도 일단 그물을 놓으면 멸치는 원하는 만큼은 잡아낸다. 어군 탐지기로 고기 양을 확인한 뒤 그물을 놓는 까닭이다.

탐지기에 멸치가 포착되면 먼저 물 조류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조류가 북동쪽으로 간다면 멸치 이동 속도와 조류 흐름을 계산하여 그물을 펼치면 멸치는 멸치대로 이동하고 그물은 그물대로 흐르면서 둘이 만나게 된다. 멸치는 성질이 급하고 빨리 죽으므로 탐지기로 잡은 양을 확인한 뒤 30분 이내 그물을 끌어올린다. 간혹 잡은 양이 적정량을 넘으면 다른 회원들, 모자라는 배에 나눠 준다. 나눠 준다 해서 특별히 대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입장이 바뀌어 나눠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로 해 왔는데 지금은 인력이 모자라니 외국인 선원들이 척당 두 명 정도 승선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나이 드신 분도 있고 중년도 있고 그렇습니다. 나이 드신 분은 60세 정도, 중년은 40대 후반 그렇습니다. 일이 힘들고 물을 만지는 일이라 한국인 젊은 사람은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 구하기가 힘듭니다.”
멸치잡이는 노동 강도 A급 중노동
배 타는 일은 손으로, 몸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3D 업종으로 분류된다. 멸치잡이 배는 더욱 그렇다. 막노동 노동 강도를 A, B, C로 나누면 ‘완전 중노동 A급’이라고 박정수 총무가 단언할 만큼 일이 고되다. 일용직 건설 노동자 수준의 노동 강도로는 멸치 터는 작업에 감히 접근하기 힘들다는 말도 덧붙였다. 바다에서는 기계로 작업을 다 하지만 육지로 돌아와 멸치 터는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하는 까닭이다. 멸치 터는 작업은 보통 대여섯 시간 걸린다. 양이 많으면 열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적으면 네댓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멸치잡이 배 한 척당 승선 인원은 아홉 명에서 열 명 정도, 일 분담은 따로 없다. 투망(投網)할 때도 다 같이 하고 양망(揚網)[던지거나 친 그물을 걷어 올리는 일]할 때도 다 같이 한다. 육지로 돌아와 터는 작업 역시 선장을 빼고 다 같이 한다. 그러기에 공동체 의식이랄지 결속력이 강한 것도 뱃사람 특징이다.

출항은 대개 오전 7시고 입항은 대개 오후 7시다. 아침 7시부터 12시간 조업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대변 가까운 연안에서 투망하고 양망하여 작업을 일찍 끝내면 오전에 나갔다가 오전에 들어오기도 한다. 아침에 협회 회원 배 10척이 같이 나가서는 흩어져 어군을 찾는다. 어군을 찾은 배에서 같이 잡자며 연락을 주고받기도 한다. 멸치 양은 풍부해 10척 배들이 대체로 만선 상태로 귀항한다. 손님들이 많이 찾는 철에는 하루 400통, 그러지 않을 때는 250통 정도를 잡는다. 통은 멸치 담는 그릇을 말한다. 옛날에는 한 말들이 통을 썼는데 지금은 22㎏에서 25㎏ 플라스틱 통을 쓴다. 가격은 시세 따라 다르지만 보통 3만 5,000원에서 4만 원이다.

잡은 멸치는 수산업협동조합[수협]을 통하여 돈으로 환산된다. 이를 수협 위판액이라 한다. 봄과 겨울 위판액은 엇비슷하다. 멸치를 잘 잡은 선주는 한 척당 4억 원 정도, 그러지 않은 선주는 3억 원 정도 위판한다. 어구며 기름값이며 부식비며 수선비며 경비가 8,000만 원에서 1억 원가량 든다. 남은 돈을 선주 50%, 선원 50% 나눈다. 선주 몫으로 봄가을 각각 1억 원, 연간 2억 원을 버니 고소득층에 해당한다. 박 총무 본인 말대로 불알 차고 객지 와서 성공한 케이스다. 연애 결혼한 부인은 대변 수협에서 알아주는 멸치 경매인, 큰아들은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대학원 공부 중이고, 딸은 미국에서 약사 공부를 한다. 얼마 전 대변 요지 주택가에 3층짜리 번듯한 양옥을 지어 토박이들 부러움을 산다.

“멸치는 성격이 급해서 잡히면 바로 죽어요. 그물을 끌어당기는 그 순간에는 살아서 올라옵니다. 선원들은 살아 있는 멸치를 먹을 수 있는데 육지까지 살려서 오기가 힘든 거지요. 멸치는 횟감으로도 상당히 좋습니다.” 멸치는 왜 멸치일까? 작아서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멸[蔑]치’고 성격이 급해 금방 죽는다고 ‘멸[滅]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친형 정약전(丁若銓)이 지은 어류 백과사전 『자산어보(玆山魚譜)』는 멸치를 이렇게 소개한다.

“몸이 매우 작고 큰 놈은 서너 치, 빛깔은 청백이다. 성질은 밝은 빛을 좋아한다. 밤에 어부들은 불을 밝혀 멸치를 유인하여 손 그물로 떠서 잡는다. 국이나 젓갈을 만들며 말려서 포도 만든다. 때로는 말려서 고기잡이 미끼로 사용한다. 요즘 멸치는 젓갈용으로도 쓰고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도 사용하는 것을 보는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다. 『사기(史記)』 화식전(貨殖傳)에는 이 물고기를 추천석(鯫千石)이라 기록했고 『정의(正義)』에서는 잡소어(雜小魚)라 했으며 『설문(設文)』에서는 추백어(鯫白魚)라고 했다. 『운편(韻篇)』에서는 멸치를 소어(小魚)라고 했다.”

멸치는 횟감으로도 좋고 젓갈로도 좋다. 멸치로 대변이 호황을 누리는 철, 그러니까 멸치를 찾는 손님이 가장 많을 때가 4월에서 6월까지다. 조업은 3월 1일부터 재개하여 6월 말에 끝난다. 물론 가을에도 잡는다. 가을 멸치는 11월부터 음력 설날까지 잡는다. 봄 멸치는 식용과 젓갈용 둘 다 쓰이지만 가을 멸치는 전량 젓갈용이다. 봄보다 100통씩 더 잡아 500통에서 550통가량 된다. 14절 그물로 잡아 멸치 씨알이 매우 굵다.
대변 멸치는 굵어서 식감 뛰어나
멸치는 굵을수록 식감이 뛰어나다. 고소하면서 씹히는 맛이 있다. 대변 멸치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물살 센 곳에서 자라므로 육질이 단단하다. 그래서 쫄깃하다. 동해 깊은 수심도 한몫한다. 그에 비해 남쪽 바다 거제나 전라도 일대는 섬이 많아서 수심이 얕다. 섬과 섬 사이 수심 얕은 바닥에 사는 멸치라서 씨알이 잘다. 그래서 그물도 16절보다 촘촘한 17절을 쓴다. 식감은 대변 멸치를 따라올 멸치가 없다. 남해 죽방 멸치는 잡는 방법도 다르고 잡히는 양도 현저히 떨어지니 비교 대상이 아니다. 유자망으로 잡은 멸치를 상대로 해서 대변 멸치가 가장 뛰어나다는 말이다. 일반인도 그걸 아니까 대변을 자주 찾고 대변 멸치 젓갈로 김장을 담근다.

손님이 가장 많이 찾는 4월과 6월 사이 대변에서는 매년 멸치 축제를 연다. 기장 멸치 축제는 2013년 5월 17회째 열렸다. 1997년 제1회를 시작으로 매년 4~5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변항 일원에서 열렸다. 남해군에서는 보물섬 미조 멸치 축제가 매년 열린다. 올해 10회째다. 남해 멸치 축제는 기장 멸치 축제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박 총무는 단언한다.

참고로 대변항은 부산항과 함께 한국 근대 항구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인천 제물포 개항이 1883년인데 반하여 대변포는 부산포와 함께 1876년에 개항하였다. 당시로선 한국 최대 항만이었다. 내·외 무역 거점이었으며 대일 관계 주요 관문이었다. 1871년 전국 요충지에 세운 대원군 척화비가 대변에도 있는 이유다. 서두에 약간 언급하였듯이 대변 지명 유래는 이렇다. 조선 시대는 공물 보관 창고를 대동고(大同庫)라 하였다. 변두리 포구(邊浦)에 있는 대동고라 해서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였고 이를 줄인 말이 대변(大邊)이다.

대변에서는 멸치 터는 장면을 쉽사리 볼 수 있다. 배를 선착장에 대 놓고 배에서 그물을 푸는 사람, 선착장에서 그물을 터는 사람으로 나뉘어 작업한다. 그물 터는 작업에는 보통 6~7명이 동원된다. 막노동 A급에 해당된다고 할 만큼 노동 강도가 세어 땀을 비 오듯 흘린다. 지역 일간지에 부산 등대를 연재하면서 대변에 현장 답사를 간 적이 있다. 항구에 배를 대고 멸치 터는 장면을 접하였다. 멸치 철이 아니었던지 멸치 양은 얼마 되지 않았고 멸치 터는 장정도 셋에 불과하였다. 비닐 소재 물옷을 입고서 일사불란 멸치를 터는데 온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다음은 멸치 터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돼 죽겠는데 말 시키지 마소!’ 대변 등대는 가는 길부터 삐딱하다. 반골이다. 말도 못 붙이게 한다. 장정 셋, 4.6톤 연안 자망 어선을 접안하고서 그물에 낀 봄 멸치를 터는 중이다. ‘에야디야 에야디야’ 소리에 맞춰 동작이 일사불란하다. 어디서 잡아 온 멸치냐고 묻자 버럭 짜증부터 낸다. 말대답하느라 소리가 어긋나 짜증이고 동작이 어긋나 짜증이다.”[동길산 시인의 『시가 있는 부산 등대』 중 「대변 등대」편에 대한 내용]
멸치 털면서 부르는 노동요, 후리 소리
말만 붙여도 짜증낼 만큼 멸치 터는 작업은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손목에 탄력을 주어 그물 멸치를 털어 내는데, 한 사람이라도 동작이 어긋나면 작업이 틀어진다. 일의 고됨도 잊을 겸 동작도 맞출 겸 멸치를 털면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 역시 동작만큼이나 일사불란하다. 멸치 털면서 부르는 노래, 노동요를 후리 소리라고 한다. 2001년 발간 『기장군지』에 지역별 그리고 작업별 전래 후리 소리가 나온다. 다음은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의 작업별 후리 소리와 기장군 일광면의 멸치 터는 소리다. 먼저 월내의 작업별 후리 소리다.

“[노꾸리 감을 때]예이안 도자 [고디를 허리에 차고 그물 당길 때]이여랸차 [고디를 벗고 순전히 팔 힘으로 그물 당길 때]예이야 [양쪽에 붙어 서서 천대의 고기를 털어 몰아 넣을 때]야 사 [그물을 천대에서 분리시켜 육지로 끌어올리고 펴 말릴 때]예사 예사 [고기를 퍼 담을 때]어랑선 가래여 가래여 이 가래가 누 가래고 가래여 김선달네 옷가래로다.”

다음은 일광의 멸치 터는 소리다.

“삼월이라 삼짇날 헤이야차 헤야차 연자제비 거동 보소 강남으로 가싯다가 옛 주인을 다시 만나 왜 왔냐고 비비배배 헤이야차 헤야차 우리 님은 어디 가고 헤이야차 헤야차 집 찾아올 줄 모르던고 헤이야차 헤야차.”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채록된 멸치 후리 소리는 좀 더 상세하다. 임랑 후리 소리는 놓는 소리, 망께 소리, 가래 소리로 나뉜다. 놓는 소리는 멸치 떼가 있는 바다에 그물을 놓으면서 부르는 노래로, 10여 명의 어부들이 두 패로 나뉘어 부르는 교호창(交互唱)이다. 선창이 ‘에산, 이야차’ 등이고 후창이 ‘이야차, 이야차’ 등이다. 망께 소리는 ‘사리 소리’라고도 한다. 그물에 멸치 떼가 다 들어간 뒤 망께, 즉 그물의 줄을 기구로 감아올리면서 부르는 소리다. 선창이 ‘야산도리, 어서돌리라’ 등이고 후창이 ‘에야도리, 에산’ 등이다. 가래 소리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멸치를 풀어 내릴 때 부르는 소리다. 교호창과 제창(齊唱)으로 마친다.
기장 해변 전 지역에서 멸치잡이 성행
기장에는 해변을 접한 거의 전 지역에서 예부터 멸치잡이가 성행하였다. 그 증명이 지역에 퍼져 있는 후리 소리 또는 오래된 비석이나 오래전 발표된 문학 작품이다.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는 ‘부산 자갈치 가니 멸치 한 통 담아 이고 달도 밝네 보름달이가’ 하는 후리 소리가 채록된 것이 있다. 기장읍 월내리와 일광면에서도 멸치잡이가 성행하였다. 그것을 증명하는 비석과 단편 소설이 있다. 먼저 비석으로는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 어린이 공원 입구에 한 사람을 기리는 불망비가 3기나 있다. 원래는 월내 기차역 인근에 있던 비석들인데 도로가 정비되면서 이리로 옮겨 왔다. 비석의 주인공은 배상기(裵常起). 월내리에서 멸치잡이와 젓갈로 큰돈을 번 동해안 보부상 수령 배상기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다.

1842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난 배상기는 부잣집 종손이었다. 그러나 구한말 민란 주모자로 휩쓸리면서 월내로 피신하였다. 보부상을 따라 1860년대 월내로 들어온 것이다. 부잣집 종손이 민란 주모자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피가 뜨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월내에 정착한 배상기는 동해안 보부상 최고 수령인 반수(班首)가 된다. 멸치잡이와 젓갈로 억만금을 번 배상기는 빈민 구제와 장학 사업에 남은 생을 건다. 피는 여전히 뜨거웠던 까닭이다. 1895년 갑오년 큰 흉년이 들자 월내와 좌천 장날마다 시장에 가마솥을 내걸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였다.

일제 강점기 암암리에 독립 자금을 댔다는 배상기는 1920년 타계하였다. 79세였다. 묘소는 기장군 장안읍 용소리 시명산 8부 능선에 있다고 한다. 월내 어린이 공원 비석 3기의 비명과 세운 연도는 다음과 같다.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班首裵常起恤商永世不忘碑)[1904], 통정대부 배공 상기창계휼리비(通政大夫裵公常起刱契恤里碑)[1913], 통정대부 배공 상기창숙장학비(通政大夫裵公常起刱塾裝學碑)[1917].

기장군 일광면에는 같은 사람 문학비가 2기 있다. 1기 있기도 어려운 문학비가 2기나 있으니 문학 하는 사람으로서 부러울 따름이다. 우선 소설가 오영수(吳永壽)[1914~1979] 문학비다. 언양 사람인 오영수 문학비를 여기 세운 것은 그가 쓴 단편 「갯마을」 덕분이다. 1953년 발표한 「갯마을」은 영화와 드라마 대본이 될 만큼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다. 멸치 터는 작업을 도와주고 연명하는 젊은 미망인의 애환을 다뤘다. 멸치 털이 무대가 일광이다. 오영수는 광복 전후 일광에서 몇 년 살기도 하였다. 소설 서두에 나오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기장군 일광면 학리이지 않을까 추정한다. 다음은 「갯마을」 해당 대목이다.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더께더께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모양 옹기종기 엎던 초가가 스무 집 될까 말까? 조그마한 멸치 후리막이 있고 미역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 마을 사내들은 대부분 철따라 원양 출어에 품팔이를 나간다. 고기잡이 아낙네들은 썰물이면 조개나 해초를 캐고…….”

“관행이지요. 몇 십 년 전부터 그렇게들 하고 있습니다. 주워 가서 반찬 해 먹는 사람도 있고 옛날에는 그걸 팔아서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했지요. 멸치 잡는 사람들 대체로 인심이 후합니다.” 그물을 털면서 땅바닥으로 떨어진 멸치는 동네 아낙이나 구경꾼이 주워 담아 가져가도 탓하지 않는다. 박 총무는 이를 관행이라고 표현한다. 오영수 단편 「갯마을」에도 그것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이렇다.

“초여름이었다. 어느 날 밤, 조금 떨어진 멸치 후리막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 들어 첫 꽹과리다. 마을은 갑자기 수선대기 시작했다. 멸치 떼가 몰려온 것이다. 멸치 떼가 들면 막에서는 꽹과리나 나팔로 신호를 한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막으로 달려가서 그물을 당긴다. 그물이 올라 수확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짓’이라고 해서 대개는 잡어를 나눠 받는다. 수고의 대가다.……해순이와 숙이 엄마는 물기슭 모래톱으로 해서 후리막으로 달려갔다. 맨발에 추진 모래가 한결 시원하다. 벌서 후리는 시작되었다. 굵직한 로프에는 후리꾼들이 지네발처럼 매달렸다. -데에야 데야- 이편과 저편에서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로프는 팽팽해지면서 지그시 당기어 온다. 해순이와 숙이 엄마도 아무렇게나 빈틈에 끼어들어 줄을 잡았다. 바다 저만치서 선두가 칸델라 불을 흔들고 고함을 지른다. 당겨 올린 줄을 뒷걸음질하는 사내들이-데에야 데야-를 선창해서 후리군들의 기세를 돋우고, 막 거간들이 바쁘게들 서성댄다. 가마솥에는 불이 활활 타고 물이 끓는다.”
밤하늘 별처럼 반짝이는 멸치잡이 후리 소리
“일이 고되니까 내 자식한테는 물려주고 싶지 않네요.” 멸치잡이 전망은, 선주 입장에서 한 해 2억 원을 벌어들이는 고수익임에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일이 고되고 손에 물을 묻히는 3D 업종이라서 젊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탓이다. 지금 선원들이 나이 들어 은퇴하면 멸치잡이 업종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마저 나온다. 멸치잡이가 사라지면 멸치를 털면서 부르는 노래도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서 기억으로, 또는 기록으로 남아 우리들 향수를 건드릴 것이다.

노래가 사라진 자리,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빈자리, 허전한 마음을 십분 이해하겠다는 듯 대변 방파제 등대 불빛이 반짝였다. 홍등이었다. 밤하늘 반짝이는 등불이 별이라면 밤바다 반짝이는 등불은 등대. 등불은 희망의 상징이며 미래의 상징이다. 꺼졌다 켜지고 켜졌다 꺼지는 홍등에서 운율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선창과 후창이 반복되는 노랫가락 같았다. 멸치잡이 어부들이 부르는 후리 소리가 밤하늘 별처럼 반짝였다.

“대변 변은 변두리 변/ 큰 변두리가 대변이다/ 대변 사람들은 참 호방하지/ 변두리를 크다고 봤으니/ 변두리 밀려나도 기죽지 않았으니/ 그래서 대변은 반골의 이름이다/ 반골은 꼬장꼬장해야 제 격/ 그물을 털면/ 죽어서도 튀는 멸치/ 등불을 끄면/ 끄자마자 다시 불붙이는 등대/ 대변에서는/ 멸치도 꼬장꼬장하고/ 등대도 꼬장꼬장하다”[동길산 시 「대변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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