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에서 기장으로
“내가 기장에 처음 왔을 때, 미역 양식 수준은 아주 유치원 수준이었어. 내가 완도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던 시절의 수준이었지. 우린 지금 삼 대째 미역 양식업을 하고 있어. 내 아버지, 나, 큰딸 이렇게 이어 가고 있지. 내가 젊었을 땐 수산업 자체가 아주 낙후했어. 어려운 시절이었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해초 양식 기술 습득을 목적으로 어민들을 ‘대한민국 어업 시찰단’으로 일본에 국비로 기술 연수를 보내 주었어. 그때 완도 지역 대표로 우리 아버지가 선발되셨지. 우리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소학교를 다니셔서 일본말도 잘하시고 당시에 수산업협동조합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계셨거든. 가서 양식 기술, 배양 기술을 배워 오신 그분들이 몇 년간 실험 재배를 해서 미역 양식에 성공하게 되셨지.
그때 완도에서는 인공 미역 양식이 유행해서 가공 공장이 들어서고 그것들이 모두 일본에 수출되면서 완도 바다는 황금 어장이라고 했지. 그동안 수산업에 법제화가 이루어지고 업종별로 인공 양식을 배워 오게 되면서 면허도 내게 되고 이것이 직업화가 되었지. 그때 새마을 사업도 한창이었는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지금하고는 달랐지 표현 방식이 서툴고 거칠고……그랬어.”
유주열 어른의 완도 시절은 우리나라의 수산업계가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던 시절부터 막 발걸음을 떼고 걷기 시작할 그 무렵이었다. 1967년 9월 정부는 어민 소득 향상과 수산업 개발을 위하여 「수산 진흥법 시행령」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한·일 어업 협정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수산업계의 변화였다. 광복 이전에는 일제가 수산업계의 70%를 차지하고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수산업은 독립적인 발전을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농림부 수산국이라는 이름 아래 농림부 산하에 속하여 여전히 낙후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산 진흥법」 시행 이후 수산청장 소속 아래 국립수산기술요원양성소를 두고 어업 경영의 개선과 어민에 대한 지식 및 기능의 양성을 위하여 어민 훈련소를 지방 자치 단체장 소속으로 설치하였다. 한·일 어업 협정으로 평화선이 어로 상 철폐되고 전관 수역에 관한 내용 등 만족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정부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결과로 수산업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기술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긴 정부의 과제는 그들의 기술을 익혀 일본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본의 양식 기술을 익힌 사람들의 인공 채묘와 친승(親繩)의 기술은 미역 양식업을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였다. 정부가 수산업 근대화를 위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중에 500억을 수산업 분야에 투자한 사실은 새마을 사업과 함께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획기적인 일로 기억되고 있었다.
양식업의 호조는 수출로 이어지고 일본으로 염장 미역을 수출하면서 어촌 마을의 가난을 해결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바다에 대한 무분별한 이용과 개인의 욕심은 급기야 바다에 대한 권리문제로 섬마을과 바닷가 마을의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은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후 1973년, 양식업을 하려면 면허를 취득하여야 하는 수산법이 생겼다.
그는 이제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큰딸의 조력자로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다고 한다. 그가 처음 기장으로 이주하였을 때 그는 이미 소랑도에서 마을 공동 양식장 면허를 두 건이나 취득하고 섬마을의 전기 시설 등 마을의 묵은 문제를 해결해 낸, 소랑도에서는 당차고 믿음직한 젊은 이장이었다. 아버지가 일본 연수로 배워 온 양식 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제법 성과를 내고 있었다.
완도 지역은 김, 미역 등 해조류의 양식 사업이 제법 궤도에 올라 있을 무렵이었다. 먹고살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고, 금전적인 여유도 오히려 도시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미역을 생산하면 몽땅 다 일본으로 수출했어. 생산하기가 바빴지.” 미역 양식업에 성공하고 수출이라는 판로를 통하여 발전해 나가던 시절이었다. 근데 ‘우리 미역이 일본 것보다 그렇게 나았던가’라는 질문에 진정성 있는 대답을 하셨다.
“그건 아니지. 일단 한국 미역이 쌌어. 일본 사람들이 해조류라면 건강에 좋다고 많이들 먹잖아. 자기들은 임금이 비싸서 미역을 생산해도 생산 원가보다 임금으로 나가는 게 많았거든. 근데 한국은 미역질도 나쁘지 않고 쌌단 말이야. 중요한 건 돈이거든. 그래서 한국에서 싸게 김, 미역을 수입해 가는 거지. 최상품(最上品)은 다 일본 사람들이 가져갔지. 한국 시장에 내는 건 보내고 남은 거. 그래서 도시보다 살기는 나았어. 먹고는 살았거든. 바다에 나가면…….”
당시의 낮은 인건비와 근면 성실한 한국인의 노동력은 한국을 세계 시장으로 도약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일본으로의 수출로 황금알을 낳던 바다가 영원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어민들이 양식업에 달려들었지만 일본의 미역 수입 금지라는 벽에 부딪혀야 하였다. 싼 가격에 사들이던 한국의 미역 때문에 일본 어민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1977년 결국 일본 정부는 한국 미역 수입 쿼터제를 도입하였다. 연간 3만 톤 이하의 양만 수입한다고 규제를 한 것이었다.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미역을 생산하여야 하였다. 양식업은 어민들을 가난에서 일으켜 세웠지만, 또 다시 그들을 절망하게 하였다. 너도나도 양식을 하기 위하여 빚을 낸 어민들이 양식 허가를 냈고 생산량의 증가는 가격의 하락으로 나타났다. 당시 1㎏당 90원 하던 것이 40원으로까지 하락하였다. 급기야 생산한 미역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사태까지 나타났다. 미역 판매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정부도 양식 면허를 더 이상 허가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한결 어려워진 시기에 기장으로의 이주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실정이었지만, 자식들 교육을 생각하면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결심도 우리 가족한테는 어려운 것이었지. 아버지를 설득하기가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일단은 5년이란 기간을 정해 두고 아버지를 설득했지. 그런데 나중엔 안 되겠더라고 그냥 밀어붙였지. 미역 생산을 하려면 시기가 있으니 준비할 것도 많고 알아봐야 할 것도 많고 장마철에는 미역 일을 안 하니까 장마철에 맞춰 일을 진행했지.”
당시를 회상하는 그는 젊은 시절 가족을 책임지던 젊은 일꾼으로서의 담대함이 있었다. 그는 양식 일을 시작하면서 먼저 기장에 자리를 잡은 5촌 형제를 찾아서 함께 양식업을 시작하기로 결의하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기장읍 죽성리 두호 마을에서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내신 고(故) 심석봉 어른을 만나 타향인에게 대변이 일하기 편할 거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죽성리에 살았던 기장 토박이 고(故) 김정안씨를 더 소개받았는데, 그의 도움으로 개인 면허지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당시 연화리에 위치한 묵혀 놓은 개인 면허지 6만 6115.70㎡[2만 평]를 350만 원에 내놓았는데 340만 원은 4자가 끼어 재수가 없을 수 있다며 330만 원에 흥정하여 성사되었다. 사실 어장은 어장 면허만 있었지 제대로 구실을 하기에는 손이 많이 필요하였기에 흥정이 가능하였다.
양산 18호 어장 6만 6115.70㎡, 이곳이 다시 양식장으로서 제 본업을 다하기 위하여 다이버들이 바다 위로 사계[바다 어장의 면적을 나타내는 4개의 기점을 연결한 로프로 된 틀]를 올리고 미역·다시마 어장으로서 새로운 주인들과 함께 다시 그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역 생산에 앞서 판로의 개척은 필수 조건이었다. 당시 내수 시장은 겨울에 생미역을 생산하면 서구 충무동 새벽 시장에서 위탁 판매를 할 수 있었다. 생산자가 미역을 생산하여 충무동 새벽 시장의 청과물 상회로 가져가면 생미역을 ㎏ 단위로 위탁 판매 하였는데, 그때그때 미역의 질을 보고 단가가 정해졌고 그것을 위탁 상회가 대신 판매하면 그 판매 수수료를 상회에 주는 것이었다. 충무동을 돌아다니며 위탁 상회를 수소문해 놓고 미역 생산 이후 겪게 될 판로의 어려움을 먼저 해결해 놓았다.
“처음엔 사상구 감전동, 서구 충무동, 부산진구 서면[부전 시장]에서 시작하였고, 또 기장에서 미역을 같이 하는 동향인끼리 모여 서울 청량리 상회를 다 뚫고 다녔어.” 그가 기억하는 기장 지역 어촌계는 열악하였다. 전국 제1의 수산지인 완도를 중심으로 살았던 그에게 새롭게 시작해야 하였던 기장이라는 지역은 양식업의 불모지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기장 지역 역시 1965년 한일 관계의 변화 이후, 양식 기술의 필요성을 느낀 이동어촌계의 방현호, 송병효, 김용대가 사재를 들여 양식 기술을 익히고 양식업에 성공하여 양식 붐을 일으켰다. 예전부터 미역이 유명한 고장이었던 기장은 자연식 미역 생산으로 생산량 면에서 아주 열악한 조건이었는데 양식 사업을 통한 생산량의 확대로 맛과 질이 우수하여, 일본의 한국 미역 쿼터제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수출하는 염장 미역[미역에 소금을 뿌려 절여 놓은 것]은 연간 350여 톤이나 되었다. 게다가 양식 붐으로 인하여 당시 양산 수산업협동조합 산하 27개 어촌계 3만 7,000여 명의 어민이 미역 양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으로 당시 미역 양식으로 인한 생산이 과잉되어 ㎏당 50원 하던 것이 40원으로 가격이 인하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과잉 생산과 양식 붐으로 어촌계가 활발해졌지만, 결국 1970년대 후반 1980년대가 되면서 기장 지역의 명성을 대변하던 자연산 미역은 그 양이 70여 톤밖에 생산되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효암 일대가 원자력 산하로 들어가 자연산 미역은 그마저도 생산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