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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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미역의 대명사, 기장 미역
AM 2:50 대변항
유주열 어른과 대변항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은 새벽 3시, 도착하니 새벽 2시 50분이었다. 시간 간격으로 잠들고 깨기를 여러 번, 조업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4월도 벌써 중턱으로 달리는데 새벽 날씨는 여전히 겨울 언저리를 맴돌며 어색한 추위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구의 차가운 기운을 담은 새벽하늘을 물들인 별빛, 달빛, 바다를 밝히는 등대의 불빛도 마주할 수 있었고, 아쉬운 어제[새로운 오늘인지]를 즐기고 있는 몇몇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유주열 어른은 대변어촌계에서 개인 면허장을 가지고 35년째 미역 양식업을 하고 있다. ‘대변’을 검색해 보면 기장군에 위치해 있으며 멸치·장어 잡이와 ‘기장 멸치 축제’가 유명하다고 나와 있다. 사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대변항은 주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기도 하지만, 대중 매체의 관심이 있기 전에는 데이트족들의 은밀한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장이 부산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기장은 부산광역시로 편입되기까지 여러 번 행정상의 변화를 겪었는데, 1973년 동래군이 부산과 양산으로 나뉘어 편입되면서 기장은 경상남도 양산군으로 편입되었고, 1995년 다시 부산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이후 송정~기장 간 도로 확장을 통하여 해운대에서 15~20분 내 이동 거리로 좁혀지면서 기장은 명실상부한 부산의 지역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대변항도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대변항이 주목을 받은 것은 광복 이후 별 볼 일 없는 작은 어촌 마을로 전락하기 전인 일제 강점기로 올라간다. 대변항은 경상남도 주요 10개 항에 속해 있었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예부터 동해를 넘나드는 배들의 피난항으로 존재해 왔고, 1931년에는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여 다음 해에 당시 15만 원의 기금으로 방파제를 수축하는 등 항구 시설을 갖추게 되는 지역적 영향력도 있었다. 공식 피난항으로서 조업에 필요한 요건까지 갖춘 항구는 어업 조합도 활성화되어 당시 공동 위탁 판매고가 100여 만 원에 달할 정도로 동해 연안 마을에서 중심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또 조선총독부의 지정 조합으로 승격되어 그에 상응하는 혜택도 누렸다. 그래서인지 대변항은 배타적 성향이 강한 기장이라는 지역 중에서 가장 외부인에게 관대한 곳이기도 하다. 유주열 어른이 기장 토박이가 아니면서도 기장이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기장 특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대변의 지역적 특수성도 한몫하였다.

새벽 조업은 3시면 시작된다고 하였는데 웬일인지 아주 조용하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새벽어둠 속에서의 10분은 인터넷 서핑을 하는 10분보다 길게 느껴진다. 연신 시계를 들여다본 지 10여 분이 지났을까 항구를 향해서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는 유주열 어른을 발견하였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을 한 칠순 노인의 이른 새벽 찬바람을 가르는 당당한 발걸음에서 그의 자부심과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는 학비를 조달하고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서 자녀들 뒷바라지를 하고…….” 그는 말을 끊고 잠시 먼 바다를 응시한다. “그렇게 살아야 해. 그것이 사는 것이지. 밥만 먹고 살려면 한평생 뭣 하러 일을 해. 자녀들 교육을 시켜야 가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그라지. 그것이 나의 포부였어. 그래서 1979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자식들 데리고 오게 된 것이지.” 왜 기장에서 미역 양식업을 시작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그는 호남 특유의 억양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의 고향은 짙은 호남 억양이 말해 주듯 전라도이고, 그중에서 21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완도에 딸린 면적 1.009㎢의 작은 섬 소랑도이다.

“거기는 우리 11대 선조가 유배를 오면서 살게 된 400년 기계 유씨 집성촌이지. 거기서 나서 자라고, 거기서 결혼하고, 또 거기서 자식 낳고 기르고, 그렇게 살았어. 거기선 먹고 사는 건 문제가 아냐. 바다에 나가면 돈벌이할 수 있는 것이 널려 있어. 그런데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나! 400년 동안 중·고등학교 제대로 나온 이가 몇 없어. 그 많은 섬마을들을 통틀어 완도 섬에 중·고등학교가 하나뿐이야. 게다가 소랑도에선 목선을 타고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그것은 어린애들한테 너무나 힘든 일이지. 아이들이 목선을 타고 학교를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는 경우도 있었지. 난 그게 싫었어. 그리고 나는 자식 농사를 잘 지어 보고 싶었어.”

아버지가 평생을 살았던 섬, 유주열 자신이 살아야 할, 또 그 자식이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400년 된 조상의 섬, 소랑도를 떠나오게 된 이유는 ‘자식 농사’를 잘 지어 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전주나 광주 같은 도시로 보내 공부를 시킬 수 있었지만 소랑도에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으며 실패할 확률이 더 컸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정착한 곳이 기장이었다.

당시 기장은 행정 구역상 경상남도 양산군에 속해 있었지만 부산과 울산이 근접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무엇보다도 중·고등학교가 가까이에 있었다. 또 지리 상 위치가 해안가를 끼고 있어서 그가 평생 업으로 삼아야 할 양식업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기장은 자식들 교육과 생업 모두를 해소시켜 주는 곳이었다. 그렇게 기장에 정착하여 자식 농사와 더불어 ‘미역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부모 형제를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면서 가슴 한편의 묵직한 돌덩이를 미역밭 아래 자갈밭에 심어 둔 지 35년, 그렇게 긴 듯 짧은 듯 그의 반평생이 또 지나갔다. 그리고 아들딸들은 그의 바람대로 소랑도를 떠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평생 바다에 바친 그의 삶이 자녀들로 인하여 행복하다고 한다.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한 것은 너무 행복해서야. 내 꿈을 아이들이 이루어 줬거든. 내 자랑 하나 할까? 지금 우리 둘째 딸이 부산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과학기술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어. 아이들 어릴 땐 형편이 좋지 않아서 용돈도 제대로 못 주었는데 부모한테 학비 걱정 안 시키고 공부했어. 지금 아주 바빠. 일을 잘하고 있는 거지. 아들은 서울에서 고등학교 선생 하고 있고, 셋째 딸은 현모양처로 아주 잘 살고 있어. 그라고 우리 큰딸은 사위하고 내 사업을 물려받아 미역 양식업 대를 이어 가고 있어. 나보다 더 사업을 잘해. 우리 아버지부터 삼 대째 미역 양식업을 이어 가고 있는 거지. 큰딸이 안 하겠다고 했으면 어쩔 수 없이 내 대로 끝났을 것인데, 또 저렇게 이어 주니 고맙고 대견하지. 허허”

겸연쩍은 듯 시작한 자식 자랑을 너털웃음으로 끝맺는 유주열 어른의 어깨가 넓어 보였던 것은 아마도 기장에서 미역업을 하였던 35년의 시간이 그가 품은 행복의 양과 비례해서가 아닐까 싶다.
Am 3:00 출항
유주열 어른이 도착하자 곧 한 대의 승합차가 도착하였고, 그날의 작업에 따른 출항 준비가 시작되었다. 대변의 내항에는 주로 소형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폭이 넓고 턱이 낮은 것이 미역 작업 배이다. 두 대의 미역 작업 배가 주유를 하고 그날 출하해야 할 주문량을 체크한다. 미역은 생미역과 건조용 미역 두 종류를 생산하는데 이날의 새벽 작업은 미역 상회로 넘길 생미역이다. 상회의 주문에 따라 포대로 또는 묶음으로 미역을 출하하기 위하여 포대와 바구니를 따로 준비한다.

양식업은 생산과 판매 모두를 양식업자 개개인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판로 역시 생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질 좋고 맛있는 미역을 생산하더라도 판로가 막히면 길러 낸 미역을 출하할 수 없고 양식업을 계속할 수도 없다. 기장 지역은 미역의 질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바다 면적이 좁아서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의 양식업자들의 개별적 판로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양식 생산업자에 따라 생산해서 길러 낸 미역을 조미료 회사에 미역밭째로 넘기거나, 가공업자에게 넘기기도 하고, 마른미역으로만 생산해서 소규모로 소매상으로 넘기는 영세업자들도 있다.

유주열 어른의 양식장은 생미역과 마른미역 생산을 같이하는데 미역 양식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마 양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미역이 2~3회의 이식을 통해 양식이 이루어진다면 다시마는 1회에 그친다. 아무래도 수요에 따른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역 작업에 따라 항구로 돌아오는 시간이 달라 나는 조금 일찍 돌아오는 배를 탔다. “데리고 갈 수는 있어, 근데 배가 출발하면 작업 마칠 때까지 돌아올 수 없어. 괜찮겠어?” 미역 출하 작업을 보고 싶다고 한 내게 기꺼이 허락을 해 주셨지만 걱정도 잊지 않으셨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도 나 때문에 배를 돌리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뱃멀미라도 해서 작업에 지장을 주진 않을까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세 시간 정도 바다 위에 떠 있다고 해서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길까! 내심 자신만만하게, 걱정 마시라 호언장담을 한 후 머리 위로 행여 바람 들까 모자를 눌러쓰고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휴대용 담요까지 둘러매고서야 배에 올랐다.

굉음을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배는 등대의 불빛으로 조용한 새벽 바다를 가르며 바닷길을 따라 미역 양식장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항구를 떠나 바다 위로 나와 보니 그렇게 조용해 보이던 바다 위에는 여러 척의 어선들과 미역 배들이 이미 조업 중이었다.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간, 바다 위에서 조업 중인 선박들의 불빛에서 이미 그들의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또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왜 그렇게 일 없이 조용하기만 한 것이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던가!

주변을 좀 더 적극적으로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저기 죽성리 두호 마을 배들인가?” 부표들이 떠 있는 미역밭 쪽으로 다가가면서 작업 중인 두호 마을 배를 발견하였다. 기장읍 죽성리 두호 마을은 두호어촌계가 있는 곳으로, 기장에서 유일하게 자연산 미역을 채취하는 공동 면허 구역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미역 캐는 죽성리 두호 마을
“몰라, 언제부턴가. 옛날부터 내려오면서 계속 했는갑데……. 내가 어릴 때도 할매들이 물질 안 했나. 마, 옛날부터 했능갑다.” 언제부터 이 지역은 미역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가라는 질문에 기장읍 죽성리 두호 마을 회관에서 쉬고 계시던 여든이 넘으셨다는 할머니의 얘기다. 다른 어른들도 그저 옛날부터 이 마을은 미역을 캤다고 한다. 언제부터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저 할머니의 할머니도 미역을 캤다는, 물질을 하였다는 이야기밖에 들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조조(太祖朝)에도 기장현에는 미역이 특산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록된 시기일 뿐 ‘언제부터’라는 질문에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양식 사업이 붐을 이루던 시기를 거치면서도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어촌계는 매년 행사를 통해서 구역을 배정합니다. 그게 6월 30일인데, 그때부터가 미역 농사 시작입니다.” 미역 농사는 추첨하는 6월 30일부터 시작해서 다음 해 4월 마지막 채취가 끝나면 한 해 농사도 끝이 난다고 두호어촌계의 원종만 어촌계장은 설명한다. 신청자들을 추첨 행사를 통하여 양식은 공동 면허지에 구역을 선정해 주고 자연산은 바위를 지정해 준다. 양식은 남자들이, 자연산은 여자들이 맡아서 한다. 자연산 미역은 해녀들이 물때에 맞춰 바위에 붙은 미역을 캐내는 것이다. 바위의 양이 일정하기 때문에 양식처럼 대량의 양을 수확할 수도 없고, 한 해에 한 번밖에 포자 생성이 되지 않는다. 추석을 지난 시기에 바위를 깨끗이 하는 갯바위 닦기[기세 작업]를 하고 난 이후 미역 포자가 자연스럽게 바위 위에 붙어서 미역이 생장하기를 기다렸다가 채취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마을은 미역을 생산하게 되었을까요?”라는 질문에는 “마을이 지형 상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바위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서 예부터 자연스레 미역류를 채취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호 마을 어촌계장 원종만씨는 이렇게 답하였다. 그러고 보면 기장읍 죽성리를 에워싼 바다의 모습은 유난히 굴곡져 있다.

역사 속의 기록을 보면 기장 미역은 지역 특산물이고 진상품이었다고 전한다. 왕후께서 산후에 드셨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기장 미역이 맛있다고 하는 것일까? “먹어 본 사람들은 다 맛있다고 하데예! 끓여 놓으면 국물 색깔부터 다릅니더. 뽀얗고 안 풀리고 그게 진짜 자연산 기장 미역이지예. 일단 한 번 사 간 사람들은 또 다시 주문합니더.” 기장읍 죽성리 두호 마을 어촌계장 원종만씨 아내의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맛을 보면 상점에서 파는 일반 미역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단다. 먼저 식감이 다른 미역에 비해 쫄깃하고 또 풀어짐이 없어 산후 조리용으로 잘 팔리는데, 누구라도 먹어 보면 그 맛을 알 수 있단다.

그녀는 죽성리에서 자연산 미역을 채취하는 일을 한다. 돌에서 채취한다고 해서 돌미역이라고도 하는데 자연산 미역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그녀는 두호 마을 미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바위를 씻기는 일부터 미역을 캐고 말려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일까지 그녀가 하지 않는 일은 없다.

“어이야 어이샤/ 호마리 찍고 호마리 찍고/ 이 돌을 실글려고 찬물에 들어서서/ 바다의 용왕님네 굽이굽이 살피소서/ 나쁜 물은 썰물 따라 물러가고/ 미역물은 밀물 따라 들어오소/ 백색같이 닦은 돌에 많이많이 달아 주소/ 어이샤 어이샤 호마리 찍고 찍어/ 내년 봄에 미역 따서/ 풍년 되어 잘 살아 보세”

기장 지역에서 자연산 미역을 생산하기 위하여 추석 전후에 갯바위 닦기를 할 때 부르는 노래다. “무조건 기다리야지요. 우째 할 수가 있나. 갯바위 닦고 무조건 기다리야지.” 자연산 미역을 생산하는 이들의 공통된 말이다. ‘풍년 되어 잘 살아 보세’라는 마지막 대목에서 이들의 염원을 듣는다. 바위를 깨끗이 닦을 테니 미역을 많이 캘 수 있게 미역물은[미역 포자] 밀물 따라 바위에 들어오라는 호소를 담은 노래이다. 무조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갯바위 닦기는 바위에 붙은 이물질을 쇠꼬챙이의 날로 깨끗이 제거하는 작업인데, 바위에 미역 포자가 잘 붙게 하기 위해서 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예부터 해녀가 해 오던 작업으로 지금까지도 해녀들이 하고 있다. 바다에 위치한 바위에 붙은 이물질들을 실구어[닦아] 내는 이 작업을 통해서 미역 농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연산 미역은 건미역으로 판매된다. 바위에 포자가 붙어 미역이 자랄 때까지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한다. 9월 말에서 10월에 걸쳐 기세 작업(磯洗作業)[미역밭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레 바다에서 포자가 형성되고 3, 4월에 채취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원종만씨 부인 역시 해녀 일을 하면서 자연산 미역을 채취한다고 한다. 그래서 채취한 미역은 전량 바닷바람과 햇볕에 말린다. 개인당 25~30손 정도의 양을 낸다. 수확량의 변동은 10여 년 동안 거의 없었다고 한다.

“1년 내내 그거만 바라보고는 못 살지예. 우째 삽니까. 다른 일도 해야지예.” 두호 마을의 자연산 미역은 꽤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 그렇지만 한 해 생산량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좁은 바다, 많지 않은 바위에서 자연이 주는 만큼의 혜택으로만 살기에는 벅찬 어민들의 생활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도 양식으로 미역을 생산하고 해녀들은 미역 일 외에 물속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낸다.

“우리도 이제 좀 더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고 해서 바위에 붙은 포자, 자연산 종자를 가지고 인공 배양을 해서 양식을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011년에 수산과학원하고 협력해서 성공했는데 2012년도에는 다 폐사를 했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가 없습니다. 성공했을 때는 군에서도 축하한다고 군수님도 관심을 가지고 홍보에 신경 써 주셨는데, 작년에 폐사하고 올해는 관심을 안 보이시네요. 우짭니까? 할 수 없지. 그래도 올해는 성공했습니다. 자연산 포자를 그대로 이식한 거라 자연산만큼 질 좋은 품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란데 자연산을 이식한 거지만 맛이 완벽히 같다고는 말 못합니다. 그래도 이게 계속 성공해 준다면 우리 마을도 기장어촌계도 발전이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제한된 생산량이지만, 기장 미역의 자존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산 미역의 맛과 질을 양식화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는, 자연산 미역의 포자를 이용한 양식 미역의 생산은 앞으로도 기대해 볼 만할 것이다. 이것은 두호 마을의 자연산 미역 생산을 지키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 동안을 물살을 가르며 달려왔을까. 배는 바다 위 부표들 틈에 서서히 멈춰 섰다. 미역밭 입구였다. 물살이 넘실대면서 구불구불 멋들어진 컬을 자랑하며 잘 자란 미역들이 수면 위로 탄탄하고 윤기 있는 속살을 드러냈다. 넓게 펼쳐진 바다 위 어장을 가득 메운 성장한 미역들이었다. 배가 멈추자 바다는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배 위에서는 불빛에 의지하여 미역 출하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완도에서 기장으로
“내가 기장에 처음 왔을 때, 미역 양식 수준은 아주 유치원 수준이었어. 내가 완도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던 시절의 수준이었지. 우린 지금 삼 대째 미역 양식업을 하고 있어. 내 아버지, 나, 큰딸 이렇게 이어 가고 있지. 내가 젊었을 땐 수산업 자체가 아주 낙후했어. 어려운 시절이었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해초 양식 기술 습득을 목적으로 어민들을 ‘대한민국 어업 시찰단’으로 일본에 국비로 기술 연수를 보내 주었어. 그때 완도 지역 대표로 우리 아버지가 선발되셨지. 우리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소학교를 다니셔서 일본말도 잘하시고 당시에 수산업협동조합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계셨거든. 가서 양식 기술, 배양 기술을 배워 오신 그분들이 몇 년간 실험 재배를 해서 미역 양식에 성공하게 되셨지.

그때 완도에서는 인공 미역 양식이 유행해서 가공 공장이 들어서고 그것들이 모두 일본에 수출되면서 완도 바다는 황금 어장이라고 했지. 그동안 수산업에 법제화가 이루어지고 업종별로 인공 양식을 배워 오게 되면서 면허도 내게 되고 이것이 직업화가 되었지. 그때 새마을 사업도 한창이었는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지금하고는 달랐지 표현 방식이 서툴고 거칠고……그랬어.”

유주열 어른의 완도 시절은 우리나라의 수산업계가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던 시절부터 막 발걸음을 떼고 걷기 시작할 그 무렵이었다. 1967년 9월 정부는 어민 소득 향상과 수산업 개발을 위하여 「수산 진흥법 시행령」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한·일 어업 협정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수산업계의 변화였다. 광복 이전에는 일제가 수산업계의 70%를 차지하고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수산업은 독립적인 발전을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농림부 수산국이라는 이름 아래 농림부 산하에 속하여 여전히 낙후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산 진흥법」 시행 이후 수산청장 소속 아래 국립수산기술요원양성소를 두고 어업 경영의 개선과 어민에 대한 지식 및 기능의 양성을 위하여 어민 훈련소를 지방 자치 단체장 소속으로 설치하였다. 한·일 어업 협정으로 평화선이 어로 상 철폐되고 전관 수역에 관한 내용 등 만족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정부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결과로 수산업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기술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긴 정부의 과제는 그들의 기술을 익혀 일본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본의 양식 기술을 익힌 사람들의 인공 채묘와 친승(親繩)의 기술은 미역 양식업을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였다. 정부가 수산업 근대화를 위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중에 500억을 수산업 분야에 투자한 사실은 새마을 사업과 함께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획기적인 일로 기억되고 있었다.

양식업의 호조는 수출로 이어지고 일본으로 염장 미역을 수출하면서 어촌 마을의 가난을 해결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바다에 대한 무분별한 이용과 개인의 욕심은 급기야 바다에 대한 권리문제로 섬마을과 바닷가 마을의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은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후 1973년, 양식업을 하려면 면허를 취득하여야 하는 수산법이 생겼다.

그는 이제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큰딸의 조력자로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다고 한다. 그가 처음 기장으로 이주하였을 때 그는 이미 소랑도에서 마을 공동 양식장 면허를 두 건이나 취득하고 섬마을의 전기 시설 등 마을의 묵은 문제를 해결해 낸, 소랑도에서는 당차고 믿음직한 젊은 이장이었다. 아버지가 일본 연수로 배워 온 양식 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제법 성과를 내고 있었다.

완도 지역은 김, 미역 등 해조류의 양식 사업이 제법 궤도에 올라 있을 무렵이었다. 먹고살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고, 금전적인 여유도 오히려 도시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미역을 생산하면 몽땅 다 일본으로 수출했어. 생산하기가 바빴지.” 미역 양식업에 성공하고 수출이라는 판로를 통하여 발전해 나가던 시절이었다. 근데 ‘우리 미역이 일본 것보다 그렇게 나았던가’라는 질문에 진정성 있는 대답을 하셨다.

“그건 아니지. 일단 한국 미역이 쌌어. 일본 사람들이 해조류라면 건강에 좋다고 많이들 먹잖아. 자기들은 임금이 비싸서 미역을 생산해도 생산 원가보다 임금으로 나가는 게 많았거든. 근데 한국은 미역질도 나쁘지 않고 쌌단 말이야. 중요한 건 돈이거든. 그래서 한국에서 싸게 김, 미역을 수입해 가는 거지. 최상품(最上品)은 다 일본 사람들이 가져갔지. 한국 시장에 내는 건 보내고 남은 거. 그래서 도시보다 살기는 나았어. 먹고는 살았거든. 바다에 나가면…….”

당시의 낮은 인건비와 근면 성실한 한국인의 노동력은 한국을 세계 시장으로 도약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일본으로의 수출로 황금알을 낳던 바다가 영원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어민들이 양식업에 달려들었지만 일본의 미역 수입 금지라는 벽에 부딪혀야 하였다. 싼 가격에 사들이던 한국의 미역 때문에 일본 어민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1977년 결국 일본 정부는 한국 미역 수입 쿼터제를 도입하였다. 연간 3만 톤 이하의 양만 수입한다고 규제를 한 것이었다.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미역을 생산하여야 하였다. 양식업은 어민들을 가난에서 일으켜 세웠지만, 또 다시 그들을 절망하게 하였다. 너도나도 양식을 하기 위하여 빚을 낸 어민들이 양식 허가를 냈고 생산량의 증가는 가격의 하락으로 나타났다. 당시 1㎏당 90원 하던 것이 40원으로까지 하락하였다. 급기야 생산한 미역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사태까지 나타났다. 미역 판매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정부도 양식 면허를 더 이상 허가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한결 어려워진 시기에 기장으로의 이주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실정이었지만, 자식들 교육을 생각하면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결심도 우리 가족한테는 어려운 것이었지. 아버지를 설득하기가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일단은 5년이란 기간을 정해 두고 아버지를 설득했지. 그런데 나중엔 안 되겠더라고 그냥 밀어붙였지. 미역 생산을 하려면 시기가 있으니 준비할 것도 많고 알아봐야 할 것도 많고 장마철에는 미역 일을 안 하니까 장마철에 맞춰 일을 진행했지.”

당시를 회상하는 그는 젊은 시절 가족을 책임지던 젊은 일꾼으로서의 담대함이 있었다. 그는 양식 일을 시작하면서 먼저 기장에 자리를 잡은 5촌 형제를 찾아서 함께 양식업을 시작하기로 결의하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기장읍 죽성리 두호 마을에서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내신 고(故) 심석봉 어른을 만나 타향인에게 대변이 일하기 편할 거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죽성리에 살았던 기장 토박이 고(故) 김정안씨를 더 소개받았는데, 그의 도움으로 개인 면허지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당시 연화리에 위치한 묵혀 놓은 개인 면허지 6만 6115.70㎡[2만 평]를 350만 원에 내놓았는데 340만 원은 4자가 끼어 재수가 없을 수 있다며 330만 원에 흥정하여 성사되었다. 사실 어장은 어장 면허만 있었지 제대로 구실을 하기에는 손이 많이 필요하였기에 흥정이 가능하였다.

양산 18호 어장 6만 6115.70㎡, 이곳이 다시 양식장으로서 제 본업을 다하기 위하여 다이버들이 바다 위로 사계[바다 어장의 면적을 나타내는 4개의 기점을 연결한 로프로 된 틀]를 올리고 미역·다시마 어장으로서 새로운 주인들과 함께 다시 그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역 생산에 앞서 판로의 개척은 필수 조건이었다. 당시 내수 시장은 겨울에 생미역을 생산하면 서구 충무동 새벽 시장에서 위탁 판매를 할 수 있었다. 생산자가 미역을 생산하여 충무동 새벽 시장의 청과물 상회로 가져가면 생미역을 ㎏ 단위로 위탁 판매 하였는데, 그때그때 미역의 질을 보고 단가가 정해졌고 그것을 위탁 상회가 대신 판매하면 그 판매 수수료를 상회에 주는 것이었다. 충무동을 돌아다니며 위탁 상회를 수소문해 놓고 미역 생산 이후 겪게 될 판로의 어려움을 먼저 해결해 놓았다.

“처음엔 사상구 감전동, 서구 충무동, 부산진구 서면[부전 시장]에서 시작하였고, 또 기장에서 미역을 같이 하는 동향인끼리 모여 서울 청량리 상회를 다 뚫고 다녔어.” 그가 기억하는 기장 지역 어촌계는 열악하였다. 전국 제1의 수산지인 완도를 중심으로 살았던 그에게 새롭게 시작해야 하였던 기장이라는 지역은 양식업의 불모지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기장 지역 역시 1965년 한일 관계의 변화 이후, 양식 기술의 필요성을 느낀 이동어촌계의 방현호, 송병효, 김용대가 사재를 들여 양식 기술을 익히고 양식업에 성공하여 양식 붐을 일으켰다. 예전부터 미역이 유명한 고장이었던 기장은 자연식 미역 생산으로 생산량 면에서 아주 열악한 조건이었는데 양식 사업을 통한 생산량의 확대로 맛과 질이 우수하여, 일본의 한국 미역 쿼터제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수출하는 염장 미역[미역에 소금을 뿌려 절여 놓은 것]은 연간 350여 톤이나 되었다. 게다가 양식 붐으로 인하여 당시 양산 수산업협동조합 산하 27개 어촌계 3만 7,000여 명의 어민이 미역 양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으로 당시 미역 양식으로 인한 생산이 과잉되어 ㎏당 50원 하던 것이 40원으로 가격이 인하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과잉 생산과 양식 붐으로 어촌계가 활발해졌지만, 결국 1970년대 후반 1980년대가 되면서 기장 지역의 명성을 대변하던 자연산 미역은 그 양이 70여 톤밖에 생산되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효암 일대가 원자력 산하로 들어가 자연산 미역은 그마저도 생산되지 못하였다.
미역 작업
“기장 바다는 유속이 세고 청정한 것이 특징이지. 처음에 내가 기장에 왔을 때 물이 너무 청수(淸水)여서 당황했지. 완도는 탁수(濁水)거든. 맑고 깨끗한 물에서 자라니 맛도 기장 미역이 나아.” 완도 미역을 잘 아는 유주열 어른은 처음 양식 어장에서 기장 바다와 마주하였을 때 물이 너무 맑아서 당황하였다고 한다. 빠른 유속에도 맑다는 것은 그만큼 수심이 깊다는 것이다. 빠른 유속과 청정함이 기장 미역을 탄력 있고 질 좋은 미역으로 길러 준다는 것, 즉 기장 바다의 특성 상 맛 좋은 미역을 길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6월이 되면 해수 온도의 변동이 가장 큰 때이다. 그래서 미역 양식은 6월 이전에 모두 끝이 난다. 미역 양식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해수의 온도이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도 수온이 떨어지지 않거나 수온이 상승해 버리면 미역 농사는 망쳐 버리게 된단다. 그래서 미역 양식은 9월 하순이나 10월 초순경에 배양된 종사를 사 와서 이식을 한다. 미역이 자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온도는 10~20도 사이다. 때문에 해수 온도가 빨리 떨어지는 지역에서 배양된 미역 종사를 사 와서 이식을 하는 것이다.

미역이 자라는 데는 온도뿐만 아니라 햇볕의 양도 중요하다. 종사를 사 올 때는 햇빛을 보면 안 되기 때문에 새벽에 사 가지고 온다. 007작전처럼 어둠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배양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채모 틀에 가이식을 시킨 후 해수 온도가 알맞게 내려가면 이식 작업을 한다. 미역을 이식할 때에도 생미역과 건미역은 다른 방식으로 이식을 하는데, 생미역은 로프에 감아서 붙이고 건미역은 크고 잎이 넓게 자라게 하기 위하여 3㎝ 간격으로 잘라서 꽂아 놓는다. 다음엔 햇빛을 잘 받아야 검고 윤기 있는 건강한 미역으로 자라므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시키고 부조를 띄워 미역이 밧줄과 함께 어장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햇빛을 잘 받도록 한다.

어장 위에 멈춰선 배는 성장한 미역을 배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준비한다. 미역 다발 한 묶음을 먼저 배의 한쪽 가장자리에 연결된 작업 고리에 걸면 반대편에 연결된 롤러가 자동으로 감겨 밧줄에 연결된 미역이 따라 올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기계의 움직임에 사람의 손놀림이 따라가겠는가! 롤러가 감기는 일정한 간격에 맞춰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미역 다발들을 속도에 맞춰 옮겨 담아 내지 못하면 미역 다발은 롤러와 밧줄에 엉키게 된다. 그러면 기계를 멈추고 롤러에 엉킨 미역다발을 끊어 내고 다시 줄을 이어 미역 다발 끌어올리기를 계속하여야 한다. 한시도 올라오는 미역 다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렇게 배를 타고 나와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으니 양식장에서는 남자들이 주로 작업을 한다. 그러나 미역 양식업이 성행하기 전 자연산 미역은 바위에서 자란 미역을 채취하였는데 해안가에 갯바위가 많은 지역에서 생산이 가능하였다.

바다에서 올려진 물 먹은 미역은 배 위에 올려지면 즉시 포대와 소쿠리에 각각 주문받은 형태로 담아 놓는다. 작업에 열중인 아저씨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이루어진 두어 시간의 작업으로 배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미역으로 가득 차 있다. 조용한 바다 위에 멈춰 선 배에서 미역을 감아올리는 모터 소리가 멈추자 배는 미역밭 위 불빛에 반짝이는 검은 미역 다발들과 함께 일렁이기 시작하고, 하는 일 없이 서서 지켜보던 내 비어 있던 위장도 찬바람을 맞으며 스멀스멀 일렁이고 있었다. 배를 돌려 항구로 가려나! 이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지만, 다른 어장으로의 이동이었다.

도착한 곳은 어젠가 갔던 해안가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던 바다였다. 멀리서 볼 때와 확연히 다른 느낌의 바다였다.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하는 바다는 마음의 안식처이지만, 새벽부터 일어나 작업해야 하는 바다는 그들이 지켜 내야 할 터전이다. 바다가 마냥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뺏기도 하고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어민들에게 바다의 저주는 해수 온도의 변화이다. 갑작스런 해수 온도의 변화는 수확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 외에도 바다가 모든 것을 빼앗을 때가 있다.

1981년 9월,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 태풍이었다. 당시의 대변항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 놓은 피난항 모습 그대로였다. 그나마 방파제가 있어 인근의 크고 작은 배들이 피항을 와서 항구는 가득 들어 차 있었다. 물론 그의 0.8톤짜리 목선도 항구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그니스라는 태풍에 작은 배는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30톤짜리 멸치선도 전파되거나 반파되었다. 인근 상가는 물론 주변 건물 중에 피해가 없는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의 목선도 운명을 달리하였다.

당시 정부에서 파견된 피해 조사단이 내려왔을 때 그는 대변 외항의 건설을 조심스레 건의하였다. 당시 대변 마을 공동 양식지였던 장소를 언급하였는데, 타지에서 온 지 오래되지 않은 터라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그 건은 받아들여져 지금의 대변항이 내항과 외항을 갖춘 항구가 되었다.
희망이 고통의 순간을 뛰어넘을 때
이렇게 새벽같이 작업한 미역은 판매처로 보내지는데, 미역을 상품화시키기 위하여 어장 작업을 한 것을 뭍으로 내려 선별 작업을 한다. 대변항에서는 배에서 내린 미역들을 선별해서 판매처로 보내는 작업을 큰딸이 맡아서 하고 있었다. “우리 큰딸이 학교 다닐 때도 엄마, 아버지 돕는다고 학교 가기 전에 미역 작업을 돕곤 했지. 아주 마음이 깊은 아이였어. 지금은 내가 뒤에서 돕고 지가 앞에서 일을 주도하지.” 그에게 미역 양식업을 맡아서 하고 있는 큰딸은 박사 학위를 받은 둘째 딸과는 또 다른 자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일을 돕던 큰딸이 결혼을 하고 이제는 아주 잔일부터 어장을 관리하고 판매하는 일까지 막힘없이 해 나가고 사업을 확장하는 것을 보는 것도 그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저렇게 쉽게 미역을 건져 올리는데, 예전엔 저러지 못했어. 전마선(傳馬船)을 타고 나와서 하나하나 손으로 건져 올렸지. 하루 종일 걸렸어. 아침에 나올 때 우리 집사람하고 둘이 도시락 싸 가지고 배 위에서 먹으면서……미역 걷어 올리고……고생 많이 했어. 이런 배가 아니었어. 요즘같이 시설 제대로 갖춘 배는 미역 한 배 싣는 게 일도 아니지.” 미역과 함께 보낸 35년이란 시간 동안 참 많이도 발전해 왔다.

아내와 함께 힘든 시간을 겪어 냈다고 한다. 배 위에서 하루 종일 미역을 건지면서 보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 이야기를 꺼내면서 희망적인 얼굴로 이야기를 하던 그의 낯빛이 어두워지면서 사고가 나던 그날 아내와 함께 바다 위에서 하루 종일 미역 작업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바다에서 집사람을 잃을 뻔했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그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양식장은 바다 속 지대가 돌밭이라 금속으로 닻을 설치할 수 없어 자갈돌[멍]을 사용하여 어장을 지탱한다. 마침 자갈돌이 15자루 생겨 미역 양식장에 쓰려고 오후에 아내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 어장 관리는 미역 양식업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자갈돌을 그물에 넣고 투입할 어장의 위치를 파악하고 밧줄에 묶은 그물을 투하하였다. 멍을 바다로 던져 넣었을 때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발이 밧줄에 걸린 것이었다. 자갈돌을 가득 실은 멍은 밧줄과 함께 쏜살같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아내의 몸도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바다로 둘 다 떨어지면 둘 다 죽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아내의 몸을 붙잡고 배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떨어지는 자갈돌을 실은 멍의 힘은 아내의 발목을 끊어 버렸다. 끊어져 버린 아내의 발목이 물 위로 떠올랐다. 발목을 집어서 작업복에 싸놓고 피가 쏟아지는 아내의 발목을 로프로 동여매고 배의 엔진을 돌려 가까운 연화리 항구로 향하였다.

유주열 어른은 그때 아내에게 다른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견뎌 냈을까 생각한다. 다행히 발목을 찾아간 덕분에 아내의 봉합 수술은 잘 되어 4개월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아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딸이 간병하느라 힘들었고, 새벽 3시면 작업을 하러 나가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새삼 이웃들의 관심과 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고 또 새롭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세상을 향하여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Am 6:00 항구로
배에 가득 찬 미역으로 간신히 엔진 옆자리에 매달려 항구로 돌아왔다. 바다로 나가는 길보다 돌아오는 길이 더 멀게 느껴졌다. 따뜻한 음료 생각이 간절하였다. 어둠은 가셨지만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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