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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민의 애환을 담다, 구포 국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 1동 410-5번지
제면기 모터 굉음이 가득한 수화기 너머 곽 사장의 목소리는 이내 묻혀 버렸다. 그 흔한 와이파이(Wifi)가 터지지 않는 핸드폰 주인에게 국수 공장을 찾아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처음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 유명한 구포 국수 아닌가? 그것도 구포 유일의 국수 공장을 이곳 사람 절반은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수소문할 인적 하나 없는 철길 뒷골목을 지나 비슷비슷한 모양새와 높이로 시야를 가로막는 모텔 사이에 내동댕이쳐진 다음에야 나만의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마지막 희망의 끝을 잡아준 것은 90년 전통의 간판 없는 이발소. 저쪽 모텔과 다음 모텔 사이라는 화두를 던진 사장님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런데 분명 그 손가락이 지시한 곳은 방금 헤쳐 나온 모텔촌이 아닌가. 허탈한 발길을 옮기는 그때 대낮 모텔 손님인지 파란색 1톤 트럭이 황망하게 내 앞을 지나간다. 순간 짐칸에 실린 파란색 로고가 선명한 박스들은 구포 국수가 분명해 보였다. 후다닥 트럭의 자취를 달려온 길을 되짚어 모델 사이의 좁은 골목 사이로 접어들자 간판도 문패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구포에서 마지막 남은 국수 공장.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곳은 70년 전통에 걸맞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건물도 심지어 한 칸 주차 시설도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3층 건물이었다. 전화로 통성명한 곽 사장에게 대뜸 왜 이리 찾기가 힘드냐고 푸념하자 요즘 누가 국수 공장에 국수 사러 오냐고 반문한다. 허가 찔린 어색함에 공장 안으로 냉큼 들어선다. 그제야 한눈에 들어온 것은 30여 평 남짓 공장을 좌우로 가로지른 웅장한 몸집의 제면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6개의 스테인리스 재질의 롤러가 돌아가며 밀가루 반죽의 숨을 죽이고 있는 장면이다. 제면기의 한 쪽은 복층 계단으로 밀가루와 간수를 혼합하는 반죽기와 연결되어 있다. 한창 전성기 때는 3~4톤의 밀가루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20㎏ 밀가루 100포 정도가 하루 작업량이다.
국수 공장 건조대 높이의 비밀
20년 경력의 공장장도 있고, 지역 봉사 등으로 바쁜 곽 사장이지만 간수 용량, 그러니까 밀가루와 소금물의 배합은 직접 챙긴다. 소금이 밀가루 특유의 글루텐(Gluten)이라는 단백질의 응집력을 북돋워 국수 가락의 쫄깃함을 더해주기 때문이라는데, 그래서 구포 국수의 애칭이 ‘쫄깃 국수’인가 보다. 2평 크기의 반죽 통에서 잘 이겨진 반죽은 교반기(攪拌機)를 거쳐 컨베이어(Conveyor)를 올라타고 아래층 반죽기로 향한다. 쌍롤러 한 쌍이 두 덩이의 반죽을 맞물려 붙이고, 6개의 롤러에 저마다 부착된 핸들로 반죽의 강도를 조절하면 우동과 굵은 국수, 가는 국수 따위의 굵기별로 국수를 뽑을 수 있다. 마지막 롤러를 빠져나온 반죽은 저인망 그물 같은 촘촘한 홈을 빠져나오는데, 그 격자의 간격에 따라 중면은 22방, 소면은 24방 그보다 가는 면은 28방까지 뽑을 수 있다.

이곳을 통과한 국수 타래는 공장장의 능숙한 손끝에서 1.5m정도의 길이로 잘리고 수직 컨베이어에 실려 2층 건조실로 향하게 된다. 건조실에 들어서는 순간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바닥으로부터 1.7m 높이에 1평 남짓한 철제 격자들이 70평 넓이의 건조장을 바둑판처럼 덮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필요 이상의 길이를 가진 자들에게 겸손을 요구하는 건조대의 높이는 다름 아닌 곽조길 사장의 키 높이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한 번은 어느 잡지사에서 구포 국수는 원래 구포 둑에 널어 말렸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지역 방송사는 한술 더 떠 아예 구포 다리에서 국수 말리는 장면을 촬영할 수 없겠냐고 요구해 왔다고 한다. 곽 사장은 홍보 면에서 혹 할 제안이긴 했지만 그런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국수는 반죽이 아무리 잘 나와도 대나무대에 널어놓은 면발이 처지면서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많다. 일명 ‘반제품’은 다음 공정에 다시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흙바닥 위에 널어놓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980년대 이후로는 인근 사상과 대동 그리고 심지어 구포에도 공단이라는 것이 들어서면서 밖에서 국수를 건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이틀간 2차에 걸쳐 수분 함유가 10% 이하로 떨어진 국수는 우리가 사먹는 그 길이만큼 절단되어 1층으로 복귀한다. 공장 한 편에는 사각의 포장대가 놓여 있고 그 한 쪽 면에는 육중해 보이는 중량계가 놓여 있다. 판매용 국수 한 묶음은 정확히 1.4㎏이다. 3년 경력의 직원이 국수 가닥 한 묶음을 추슬러 저울에 올려놓는다. 보통 한 번에 무게를 맞춘다고 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몇 가닥 더 올려놓고 서야 저울 수평이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다음 국수는 속지에 말리고 포장 옷을 입고 판매용 박스에 담기는데, 소면은 빨강, 중면은 파란 로고로 구분한다.

국수 공장 제면기와 환풍기 모터의 위력적인 소음은 1층이고 2층이고 할 것 없이 보통 사람의 혼을 빼놓기 충분했다. 그래서 그런지 직원들은 말이 없다. 아니 별로 필요 없을 것 같다. 국수 통에 국수가 비어갈 무렵, 어디서 나타났는지 배달 담당 직원이 국수함을 옮겨오고, 2층에서 국수를 널던 곽 사장은 어느새 반죽기에 들어가는 간수를 조절하고 있다. 이 와중에 속 포장을 하고 있는 안주인이 느닷없이 사무실로 달려간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 주문이 온 것이다. 요즘은 핸드폰 주문도 많이 오는데, 그럴 때는 앉은 자리에서 상담이 가능할 경지[?]라고 한다. 오전 9시 시작한 작업이 12시경에 종료될 무렵, 필자의 전화기에는 부재중 전화만 4통이었다.

타향살이, 처가살이 설움도 많아
점심 무렵 국수 한 그릇 대접받지 않을까? 어쩌면 당연한 기대에 공장 3층에 올려진 곽 사장의 집으로 향했다. 팔순의 노부부가 반갑게 맞는다. 원래 영도 남항동이 고향인 곽 사장의 부친 곽판석(郭判錫)[87세] 옹은 구포 국수 2세대이다. 청년 곽판석이 구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남항동에 이웃해 살던 열여덟 아가씨 심복연[85세]이 부친을 따라 구포로 이사 오면서였다. 곽 사장의 외할아버지 심억주(沈億柱)씨가 구포 시장에서 국수 가게 그러니까 요즘의 국수집이 아닌 제면소를 연 것도 이맘때다. 그 사이 영도에서 중앙동, 서면, 주례, 사상을 거쳐 구포까지 이어졌던 초보 경찰 곽판석의 뚜벅이 사랑도 여물어 갔고, 그의 나이 스물일곱에 그 결실을 맺게 된다. 그런데 1955년 신혼집을 구포로 옮긴 판석에게는 예상치 않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본청 소속의 한 간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무언의 압력이 계속되어 경찰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속사정을 모르던 장인어른도 멀쩡한 제복 자리를 내놓은 사위가 탐탁지 않았지만 국수 기계 돌리는 일이 워낙 고생이 심한지라 차츰 하나하나 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30대 초반 장인에게서 독립하게 됐지만 생각지도 않은 호된 신고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공장 설비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어느 날 저녁, 인근 공장 주인들이 찾아와 가게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종용한 것이다. 원래 어느 시장이나 동종 업체끼리 치열한 경쟁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장인이 경영하던 공장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아우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도 개업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장사를 하지 말라니 서운함을 넘어 억울함에 밤잠을 설쳤다. 저들은 숫자를 믿고 덤볐지만 판석에게 의지할 것은 법 하나밖에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찰에 투신했던 덕인지 저들의 불법과 허점은 너무나 자명했다. 관할서는 아무래도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부산시경으로 직접 서류를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이 발보다 빠르다고 했던가? 투서를 접수한 다음 날, 상인들이 백기 투항한 것이다. 지금이야 1대 곽 사장 마음속의 섭섭함은 사라진지 한참이고 그보다 그렇게 아옹다옹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구포를 떠나 소식마저 끊어진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IMF 그리고 눈물의 잔치 국수
구포 국수는 1970년대~1980년대를 지나면서 낙동강 노을처럼 저물어갔다. 전쟁 기간 무상 지원이나 혼분식 장려 정책이 가져온 특수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최초 20여 곳에 달하던 국수 공장은 이제 두세 곳으로 줄어들었다. 2대 곽판석 사장에게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한때 판로를 찾아 구포를 잠시 떠났던 잉어표 국수 공장이 다시 구포로 회귀한 것은 1980년대 중반, 모두가 구포를 등지고 인근 대동으로 김해로 밀양으로 뿔뿔이 떠나던 시절이었다.

곽 사장이 믿는 구석은 설비도 기술도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갓 제대한 장남 곽조길이 비장의 카드였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 결과, 공장을 넓혀 국수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활로를 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곧장 적당한 공장 물색에 들어간 아버지와 아들에게 낙점된 곳이 바로 지금의 공장이다. 원래 카펫 공장으로 쓰던 건물이었는데, 아버지 곽 사장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엉뚱하게도 옆 건물에 들어서 있던 양조장이었다. 술이나 국수나 다 물이 좋아야 하는 것인데, 양조장 옆집이니 수질도 그만할 것이라고 미뤄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자금이었다. 공장으로 쓰고 있는 지금의 건물과 집을 처분해도 공장 매입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계약은 도장 찍기 전까지 모르는 법. 대금을 마련하지 못한 채 건물주와 계약을 하러 간 곽 사장이 마지막으로 내민 것은 엉뚱한 조건이었다. 공장을 명의 이전 해주면 그 공장을 담보로 잡아 대금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공장주 고향 동네 사람을 어렵게 모셔 중개인으로 넣은 덕분인지 당시로는 황당한 계약은 물 좋은 옆집 막걸리의 지원 속에 기분 좋게 체결되었다.

현재 1대 곽 사장은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2대 곽조길 사장이 구포 국수의 맥을 잇고 있다. 한때는 국수 공장 사장 입장에서 혹 할 만한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수 열풍이 부는 듯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잔치 국수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슬프게도 IMF, 빚잔치가 가져온 씁쓸한 국수 전성기의 귀환이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한참 동안 구포역에서는 당황스러운 진풍경이 벌어졌다. 여객열차가 정차하는 시간이면 살벌한 외침이 들러왔기 때문이다. ‘내 딸 사이소’, ‘내 배도 사가소’ 뭘 팔고 뭘 사라고? 자세히 귀 기울여 보면 그 외침은 다행이도 심청이 같은 예쁜 딸아이를 내놓은 소리가 아니고 딸기를 사라는 것이다. 당연 배 역시 물 많고 달기로 유명한 대저 배를 말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첫 열차가 출발할 때쯤이면 상행·하행 가릴 것 없이 객석과 통로는 함지박을 내려놓은 아낙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딸기와 배가 모두 팔린 함지박은 국수 다발로 채워졌다. 열차를 타지 못한 아낙들은 경비를 추렴해 트럭을 대절해 부산 시내로 국수 장사를 나갔다. 그때 그 시절, 구포 시장을 새하얗게 수놓았던 그 많던 국수 공장들과 밀양으로 안동으로 아니면 부산 시내로 국수를 팔러 다니던 ‘아지매’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구포 국수의 디아스포라, 6·25 전쟁
부산의 음식 골목을 조금 유심히 들여다본 사람은 발견할 수 있는 이채로운 풍경이 있다. 단 하나 뿐이어야 할 ‘원조집’이 한 집 건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몇 십 년 정도의 전통은 2세대로 취급받고, 3대 그러니까 60년 정도의 ‘역사’는 내걸어야 사람들의 눈길 한 번 받을 수 있을 정도이다. 맛을 돈으로 사고파는 방송 출연 맛집들이 기세등등한 요즘에도 3대 60년을 이어온 부산 음식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60년 전 그때 그 시절, 피난민의 도시 부산은 뭐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고 그 와중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역시 같은 처지였다. 실업난·주택난에 남자들이 허둥거릴 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그 집안의 아낙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의 좌판에 차려진 것은 그네들 고향 음식을 닮았지만 어딘가 낯선 먹거리였다. 이북식 메밀 냉면은 밀가루를 만나 밀면이 되었고 합천·밀양·함안 출신 할매들이 끓여낸 돼지국밥은 이제는 모두 부산 음식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음식, 구포 국수가 있다.

국수는 그 면발의 생김새 덕분에 장수와 인연, 자손의 번영과 희망을 상징한다. 그래서 국수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축제 때 성황을 누리던 음식이었다. 그런 국수가 전쟁이 한창인 부산에서 피난민의 밥상에 오른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국수를 어떻게 기억할까. 실향과 이산의 슬픔으로 말라버린 눈물샘을 간간하게 적셔주던 짭조름한 국물과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을 정도의 끈기를 지닌 면발로 피난민들의 지친 삶을 위로하지 않았을까. 피난민이 불어나면 국수 면발도 불어나던 시절, 구포 국수의 전성기는 시작되었지만 그 탄생의 순간은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포구 도시 구포,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다
2003년 계미년 태풍 매미가 구포 대교 상판을 강물 속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5년 뒤 개통 당시 전국에서 제일 길어서 낙동 장교(落東長橋)라고 불렸던 구포 명물은 논란 속에 철거되었다. 그런데 대교 건설 당시 구포면장 장익원은 의외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구포 다리가 지금까지 구포로 모여들던 물산을 부산으로 직송해서 구포에 불리하다는 이유였다. 지금이야 옛 구포 다리 위아래로 강을 가로지르는 신식 다리가 즐비하지만 원래 구포는 부산과 경상도와 그리고 남해안 물자를 전국으로 실어 나르던 최고의 포구 도시였다.

물길 따라 사통팔달(四通八達)이 가능했던 구포의 내력은 17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시대 구포는 상주의 낙동진(洛東津), 합천 율지의 밤마리 나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나루인 감동진(甘同津)의 소재지였다. 경상도 일대에서 현물로 거둬들인 공물과 현물세를 인천을 거쳐 서울로 올리던 남창(南倉)이 있던 구포는 상주 인구 1,500명을 자랑하던 거점 포구였다. 사시사철 명지 염전의 소금을 실은 돛단배가 낙동강을 따라 대구와 안동으로 올라갔고, 가을 녘이면 내려오는 배편으로 실려 온 쌀과 곡물이 구포 나루에 부려졌다. 그리고 개항 이후 구포는 대일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일감을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인부들로 들썩였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구포 선창 노래」는 구포 나루에 닿은 배에서 나락을 내리고 정미소에 나온 쌀을 수출선에 싣는 인부들의 노동요이다. 쉴 새 없이 나루에 접안하는 돛단배마다 걸쳐진 배다리를 위태위태 걸어가면서도 흥에 겨워 부르던 노랫가락에서 사람과 물자로 넘쳐 나던 구포 나루의 번영을 읽을 수 있다.

개항기 포구 도시로 명성을 이어간 감동진 구포 나루는 경부선 구포역이 들어서면서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으로의 곡물 반출을 위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생산된 곡물들이 대량으로 구포에 집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포역에는 증가하는 곡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구포 둑을 따라 집하장과 도정 시설들이 들어선다. 그런데 이 시기 구포에는 예전에는 취급하지 않던 곡물이 대거 반입되기 시작했으니 다름 아닌 밀이었다. 일제 강점기라 하더라도 제분업이나 제면업은 조선인에게는 색다른 사업이었고, 그 재료인 밀가루뿐만 아니라 국수 역시 여전히 낯선 음식이었다.
쉽고도 귀하신 이름, 국수
면 요리의 본고장 중국은 그 종류만 100여 가지가 넘어 ‘백면(百麵)은 백년학습(百年學習)’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국수는 면조(麵條)라고 쓰고 우리가 국수라고 쓰는 한자인 면(麵)은 원래 밀가루를 말한다.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 음식에 맛있는 것이 십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면을 먹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면은 밀가루로 만든 병[餠, 떡], 만두[饅頭, 찐빵], 교자[餃子, 만두], 면조[麵條, 국수] 등을 모두 포함한 말이었다. 고려 시대 밀가루는 주로 전병, 즉 기름과자를 만드는 데 쓰였고 국수로 만들어 먹는 사람들도 한정되어 있었다. 바로 왕족들이나 고관들에게 밀가루를 시주받았던 승려들인데, 그래서 아직도 절간에서는 국수를 승소(僧笑)라고 부른다.

밀가루가 본격적인 국수 재료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양반가에서였다.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는 경상도 농담이 있다. 원래 국수를 ‘국시’로 읽어야 맛이 더해진다는 말장난은 안동·상주·문경 등 경상도 내륙 지방과 논산·부여·예산·영동·청주 등의 충청도 지방에서 무를 무수 또는 무시, 여우를 여수 또는 여시라고 읽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의성 김씨 지촌 종택에서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국수를 만들어 손님을 대접한다. 찬물에 헹궈 건진 국수 위에 수육과 채소, 계란 등 갖가지 고명으로 장식을 더한다. 육수 또한 쇠고기나 수중군자(水中君子)로 불리는 은어로 우려내 감칠맛을 더한다. 농번기 논바닥에서도 주인댁 국수를 흉내 내기도 했으나 메밀 삶은 국수물에 푸성귀 몇 잎 얹는 정도의 ‘제물국수’였다. 조선 시대 국수 역시 신분 질서의 의연함을 과시한 음식이었다.
일제가 개발한 음식 문화, 분식
우리나라에서 밀 농사를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와 기장, 보리와 쌀 같이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조선 시대만 해도 밀가루는 곡물 가루 중에 가장 좋다, 또는 여진족이 선사했다 해서 ‘진말(眞末)’이라고 불렀다지만 사실은 그 희소성 때문에 부여된 별칭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재료가 워낙 귀하다 보니 음식으로 접할 기회도 적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 대부분에게 생소한 재료이자 음식인 밀국수에 대한 인식은 조선총독부가 식량 증산을 위해 소맥(小麥)을 우량 품종으로 심도록 권유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밀이 워낙 더위를 싫어해서인지 모르지만 우리 밀 가운데 우수한 품종의 주산지는 북한 지역인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였다. 하지만 1920년대까지도 밀가루는 빵이나 만두의 재료였을 뿐 국수의 재료로는 취급되지 않았고 여전히 국수의 재료는 메밀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말이 되면서 전쟁 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혼식을 장려하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면미(麵米)’라는 것을 만들어 보급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런 가운데 밀의 재배 지역도 점차 남하하면서 경상북도와 청도 일대에서도 밀 재배가 일반화되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연간 200만 석의 밀이 생산되었고 이 바람을 타고 인천을 비롯한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 대형 제분 공장들이 앞다투어 설립되었다. 쌀의 도정도 쉽지는 않지만 밀은 더욱 까다로운 도정과 제분 과정을 거친다. 밀은 낱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껍데기만을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말린 밀알을 통째로 깨트려 껍질과 분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력이나 동물의 힘이 필요하고 송풍 장치 같은 기계의 힘도 필요하다. 밀가루의 대량 생산은 대규모 제분 공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로마 과학 기술의 진보는 밀가루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구포역 주변의 정미 공장은 아마 이런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 덕분인지 인천을 뒤이어 구포에서도 기업인 오명구(吳命九)가 남선곡산주식회사를, 구포에서 곡물 유통업으로 성공한 안동상회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영남제분을 설립하였다. 이처럼 구포에서 제분업이 태동한 계기에는 곡물 집하장이라는 지리적 이점 그리고 곡물 유통업에서 갈고 닦은 기술력과 자본의 힘이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구포 국수 탄생 이야기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신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누룩이다.
반도 최고 금정산 누룩의 비애
1935년 일본인 양조 기술자 모리키 이와오가 쓴 『조선곡자제요(朝鮮曲子提要)』에는 부산 금정산 산성 누룩을 만들기 위해 북한의 사리원에서 밀을 기차로 싣고 와 구포역에 하역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당시 구포로 들여온 밀의 하역량은 어림잡아도 1년에 1만 6,000톤에 달했다. 밀을 실은 기차가 구포역에 도착할 무렵이면 밀가루 포대를 층층이 쌓은 달구지가 줄줄이 금정산을 오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1907년 발행된 『조선주조사(朝鮮酒糟史)』에 따르면 범어사, 통도사의 누룩 판매는 경상남도에서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했다. 금정 마을의 누룩 생산은 아마도 이런 사찰이나 사하촌의 내력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인지 금정산성 누룩은 양뿐만 아니라 품질 면에서도 그 재료가 들어온 황해도와 만주 지역으로 역수출 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이 덕분에 일제 시기에는 예로부터 물맛 좋기로 유명한 산성 마을에 밀가루 누룩을 빚고 발효시키는 술도가가 빼곡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금정산 막걸리가 전통주 1호가 되었지만 일제 때만 해도 사정이 그렇지 않았어요. 1930년대 전쟁이 심해지면서 군수품으로 조달하기 위해 누룩으로 술 빚는 것을 금지시켰거든요. 그런데도 금정산 막걸리가 유명하니까 그때만 해도 산성에서 누룩을 많이 만들고 적게 만드느냐 그 차이에 따라 부산 동래를 비롯한 동부 경상남도 일원의 곡물 값이 오르내렸거든요. 그리고 막걸리를 빚으려면 누룩이 필요했는데, 우리 집이 정미소를 해서 산성 사람들이 밀가루를 많이 사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당시에는 불법이었어. 허가도 안 받고 세금도 안냈으니까.”

(낙동문화원장 이도희)

식민 통치 초기부터 주조업에 관심을 보이던 일제는 1916년부터 1930년대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주세령을 개정하였다. 조선인들의 주조업은 자가 양조와 부업형이 많아 세원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가내 영세업자의 주조를 금지하고 집약적 공장화를 추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이 가족 단위 영세업자였던 금정산 주조업자들은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마다 그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경찰서, 세무서의 단속이 시작되면 산성 마을은 그날부터 전쟁터였다. 단속과 저항, 체포와 벌금, 문패 하나 달 수 없을 정도로 쫓고 쫓기는 살벌한 숨바꼭질이 연일 계속된 것이다.

“사람들은 금정산성 물이 좋아 막걸리를 거기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말도 맞아. 그런데 산성 문에 있으면 밀주 단속하러 오는 게 보여. 그래서 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망루에서 보초를 선거야. 그러다가 수상한 트럭이 올라오면 종을 쳤어. 그럼 사람들이 알아채고 누룩을 다 숨겼어. 난리가 나는 거지. 그래도 그 사람들 그때 참 단합이 잘됐어. 단속하는 그 사람들도 걸어서는 안 올라가니까 트럭이 올라오는 걸 감시한 거야. 구포에서 올라가면 서문을 지나야 되고, 만덕에서 올라가면 남문을 지나야 되고, 동래에서 올라오는 게 동문에서 보이니까 단속 피하기 쉬웠어.”

(낙동문화원장 이도희)
누룩은 국수의 은인일까 원수일까
국수를 뜻하는 영어 단어 누들(Noodle)과 마찬가지로 우리말 국수의 어원도 확실하지 않다. 정약용의 어원사전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조선에서는 면을 밀가루가 아닌 국수라고 한다’고 적고, 한자로는 국수(匊水)라고 썼다. 그러니까 국수는 ‘물을 움켜쥔다’라는 의미가 있다. 아마 메밀 반죽을 국수틀에서 물통으로 떨어트려 건져내는 장면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 밖에도 국수의 어원에 대해서는 별별 이야기가 등장한다. 순조 때 학자 조재삼은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 국수가 누룩의 원수라서 면수(麴讐)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중국에서는 밀가루의 용도를 두고 국수와 누룩은 서로 최고 자리를 두고 다투던 사이였기에 이렇게 부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경쟁 구도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는 성립되지 않았다. 대다수 조선 사람들은 밀가루는 누룩의 원료이지 국수가 누룩의 경쟁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형 양조장의 등장으로 설 곳을 잃은 누룩 제조업자들이 도산하면서 누룩의 원료였던 밀가루는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다 산성 사람들도 지치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한두 사람이 원래 누룩 팔러 오던 구포 시장으로 내려와 장사를 시작했는데, 원래 누룩 다루던 일을 하다 보니 밀가루에는 자신이 있었나봐. 윤용갑, 남용환씨 같은 분들이 그렇게 일제 수동 롤러 기계로 국수를 뽑기 시작한 거야. 그러다가 이분들한테 조선 사람들이 한 집 한 집 기술을 배우고 시장 가게에 세를 얻어 장사를 시작한 거야. 한창 때는 가게 앞에 널어놓은 국수 땜에 장터 마당이 온통 허옇게 보일 정도였어.”

(낙동문화원장 이도희)

당시만 해도 국수 공장은 가내 수공업 수준의 영세 업체였다. 조선인 공장은 국수를 군납하던 일본인 공장에서 오래된 제면기를 불하받았거나 시장에 나와 있던 중고 기계를 직접 사들였다. 그 와중에 해방이 되면서 국수 공장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수동식 제면기에 선박용 발동기가 달렸고 전기 사정이 다소 여유가 있던 해방 직후에는 전동식 제면기도 들여왔다. 2~3명의 누룩 제조업자가 시작한 국수 공장도 10여 곳으로 늘어나 판매상 30여 명이 가입한 조합을 구성하였다. 지금도 구포 국수 하면 떠오르는 거북 문양의 두루마리 포장지는 이 당시 조합비를 납부한 조합원에게 영수증 대신 내어주던 납세필증에서 유래한 것이다.

상품으로 처음 팔리게 된 국수는 새참으로 나온 거친 식감의 메밀국수밖에 모르던 장꾼들이나 화물 노역자들에게 새로운 식감을 선사했다. 찰기가 느껴지는 혀 맛, 끊을 때 이에 전해지는 쾌감, 식도를 통과할 때의 상쾌함이 삼박자를 이뤄 만족감은 물론이고 빨아들일 때 입술을 통과하는 최대의 감칠맛, 쌀이나 보리 등 끈기 하나 없는 메밀에서는 이런 자극을 느낄 수 없었기에 새로운 맛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 밀로 만들었던 구포 국수
해방이 되자 구포에서는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국수 제조업에 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구포 시장에 ‘거북제면소’, ‘김봉옥 제면소’ 등 제대로 된 간판을 내건 공장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일본인들에게 군납용으로 제공되던 밀가루는 이들 조선인 업자들에게 제대로 공급되지는 않았다. 조선인들은 할 수 없이 바로 옆 제분소를 놔두고 품을 팔아 청도·안동 등 경상도 북부 등지로 밀을 수집하러 다녀야만 했다. 이런 상황은 미국의 식량 원조가 본격화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개인적으로 제 고향은 현풍입니다. 저희 선친이 구포에서 잡일을 하다 해방이 되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생계를 찾기 위해 구포 시장을 물색했어요. 그러다가 안면이 있던 배승룡씨가 국수 공장을 하는 것을 보고 국수 공장을 시작하게 됐어요. 구포 시장 안에는 배승룡씨하고 주복이, 김병순 같은 분들…. 다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서너 군데 수동 공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제가 10살, 11살 때쯤이었어요. 처음에는 경상북도 일원이나 서부 경남 청도에서 생산된 밀을 가마니채로 사들여 밀가루로 도정해서 국수를 만들었어요. 근데 밀가루 까부수는 게 쌀이나 보리보다 까다로워 밀가루가 지금처럼 하얗지는 않았어요. 그때 국수 공장은 공장이라기보다는 가게에서 롤러로 돌려 뽑은 국수를 노상에서 널어 말리던 수준이었어요. 그때는 공해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국수라는 게 바람이 안 좋으면 반죽한 면이 갈라지기 때문에 습기를 품은 바람에 말리는 게 좋거든요. 그러니 강을 끼고 있는 구포 국수가 찰질 수밖에 없어요.”

(김봉옥 제면소 김수암)

흔히 국수는 쉽게 만들어 간편하게 즐기는 음식으로 알고 있다. 오죽하면 ‘국수나 먹지’라는 푸념이 있을 정도일까. 하지만 밀은 그리 녹녹한 음식 재료가 아니었다. 우선 밀은 쌀과 달리 6~7겹의 질긴 껍질로 둘러싸여 있어서 안의 배젖 부분에서 밀가루를 채취하는 일은 정교한 기술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밀 낟알을 잘게 쪼개 안에 붙은 밀가루를 채취하는 다단계 제분 방식(Gradual Milling System)’이 도입되기 전까지 밀가루는 귀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국수를 뽑는 과정이 제분 과정보다 쉽다고 말할 수도 없다. 메밀이나 밀가루를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조선 시대까지는 메밀 반죽을 넓게 밀어서 칼로 썬 칼국수가 일반적이지만 아주 가는 국수를 뽑으려면 국수틀이 필요했다. 면자기(麵榨機)라 불리던 이 기계는 부뚜막에 가마솥을 걸고 그 위에 수많은 구멍을 낸 철판을 깐 아름드리 나무통을 얻은 모양을 하고 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삽화가 김준근(金俊根)의 그림을 보면 돌처럼 단단해진 메밀 반죽을 뽑아내기 위해 장정 한 명이 통 위에 얹은 널빤지를 지렛대 삼아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있다. 기이한 자세와 꽉 다문 입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에서 고된 노동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대기업이 제면업에 진출해 국수를 손쉽게 쏟아내기 전까지 구포 국수의 제조 과정도 고된 노동이라는 점에서 조선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수 말만 들어도 신물부터 올라오던 시절
구포 국수는 애초부터 전통적인 방법 대신 수동 롤러가 장착된 제면기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노동 강도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소설 『소시민(小市民)』의 저자이자 6·25 전쟁 당시 초장동 제면소 인부였던 이호철(李浩哲)은 “똥간 갔다가 나오기 싫을 정도로 롤러 돌리는 게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국수 제조에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밀가루를 제면기에 넣기 위한 반죽 과정도 지금 밀가루와 달리 회분도 많고 질도 좋지 않아 반죽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소금은 반죽이 급격히 마르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유통 기한을 늘려주는 부수적 효과도 있었다. 자연히 ‘간 맞추기’에 따라 국수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들,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 되기도 했다.

“선친과 모친 두 분이서 운영했어요. 그래서 6남매 가운데 장남이던 저도 본의 아니게 직원 아닌 직원이었어요. 근데 저는 군에 가서 그리고 그 후 한동안 국수를 안 먹었어요. 어릴 때 하도 국수를 많이 먹어서요. 시도 때도 없이 국수가 나왔는데요. 지금처럼 고명이나 양념장도 없이 국수 삶은 물에 그냥 말아 먹으니 참 지겨웠어요. 그래도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때 밀가루는 색깔이 거무스름했어요. 아마 가마니에서 이물질도 많이 들어가고 지금처럼 도정 기술이 좋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그렇게 마련한 밀가루에 소금을 넣어 반죽을 합니다. 지금은 염도 측정하는 기계가 있지만 당시는 소금물에 계란을 띄웠어요. 계란이 10원짜리 동전만큼 떠오르면 아마 염도가 20그루베 정도가 되는 거예요. 지금은 13이라고 하는데 엄청 짜죠. 그렇게 소금을 넣어 반죽하지 않으면 밀가루가 반죽이 되지도 않고 탄력도 없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다른 것 다 가르쳐줬는데 소금을 얼마 넣는지는 딱 부러지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아마 국수 맛을 결정해서 그런가 봐요. 자식인 나한테까지 그런걸 보면.”

(김봉옥 제면소 김수암)

이렇게 뽑아낸 국수는 앞마당으로 옮겨져 건조 작업에 들어간다. 국수 맛은 반죽과 건조가 반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건조 과정 역시 국수 품질에서 결정적이다. 같은 원료, 똑같은 소금기를 품은 국수라도 어디서 며칠을 어떤 방법으로 건조시키는가에 따라 국수는 전혀 다른 맛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구포 국수의 ‘간간하고 쫀득한’ 맛 역시 건조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전통적인 수타 방식에서야 홍두깨로 얼마나 밀었느냐에 따라 면발의 탄력이 달라지겠지만 그 과정을 기계가 대신하는구포 국수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건조 과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구포 시장은 남해와 만나는 낙동강변에 있으면서 거북산이 구포를 둘러싸고 있잖아요. 그리고 가만히 보면 북구에서 하루 종일 햇볕이 내리쬐는 곳은 구포 시장뿐이에요. 그리고 구포는 강 옆이라 땅을 30㎝만 파도 맑은 물이 펑펑 나와요. 그러니까 햇빛이 때리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구포 국수는 소금기 품은 강바람과 강한 햇빛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수증기가 함께 말린다고 보면 됩니다. 구포 국수는 소금을 많이 넣지 않는데, 그냥 햇빛에 말리면 끝이 갈라져 상품이 될 수 없어요. 그걸 막아 주는 게 바로 구포의 자연적 환경인 거예요. 지금 구포 국수는 구포 아니라도 만들어 팔지만 그 쫀득쫀득한 맛은 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예요.”

(낙동문화원장 이도희)
김해 평야 벼들은 구포 국수가 키웠다
국수가 지금에 와서 흔한 먹거리가 된 계기는 6·25 전쟁과 구호용 밀가루였다는 게 정설이다. 전쟁과 장거리의 피난길은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주머니를 비워갔고 용도가 무색해진 조리 기구들은 피난 행렬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부산의 언저리 구포에 발을 디딘 피난민들의 사정을 헤아려 준 것이 국수였다. 저렴하고 간편하게 별다른 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짭조름한 국수 가닥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들의 삶을 이어준 먹거리였다. 피난 도시 부산에서 늘어난 인구만큼 부족한 것도 많아졌다. 대표적인 것이 전기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을 거치면서 선박 엔진을 달거나 전동식 기계로 진화한 제면기가 6·25 전쟁 중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오직 사람의 힘으로 돌아가던 국수 공장의 일상은 고단하기만 했다.

‘밤 한 시나 두 시가 되면 일꾼 우두머리가 석유 등잔을 켜고 돌아가며 깨웠다. 일방에서 불을 지필 동안 다른 사람들은 창고에서 밀가루 포대를 져내고 반죽을 하였다. 솥 물이 끓어오를 무렵이 되면 손기계를 돌려야 하는데, 그 손기계 돌리는 것이 내 몫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덜그럭덜그럭 돌림에 따라 반죽이 된 밀가루 덩이가 납작하게 정리가 되어 삐져나오고 그렇게 나오는 것이 둘둘 말아지고 하는 것이 여간 재미나는 것이 아니었으나 허구한 날 열 시간 남짓을 그러고 있자니 고역치고는 된 고역이고 부도 노동쯤은 문제도 안 되었다. 자연 뒷간으로 자주 가고 가서도 오래 앉는 버릇이 붙었다. 새벽 서너 시가 되면 벌써 허기가 졌다. 그럴 즈음이면 솥에서 국수 오라기가 끓고 김이 오르고 일판도 무르익기 시작한다. 일꾼 우두머리가 밥공기로 국수를 한줌씩 끊어서 상자에 차곡차곡 담는다.

날이 완전히 새고 건너편 집 점포 문이 열릴 즈음이 되면 자전거 꽁무니에 산처럼 실은 국수 상자가 내달린다. 이런 일이 두 시쯤까지 계속된다. 세 시쯤까지 다음 날 일의 단도리 같은 잡일이 있고, 다섯 시쯤이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이호철의 소설 『소시민』 중에서)

원료 면에서는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제분 공장이 대거 철수하고 남한에 4개의 공장만 남게 되었고 그마저도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된다. 그러나 낙동강 동쪽의 구포에 자리 잡은 영남제분 등은 건재했다. 그리고 1956년 미국의 PL480호에 따른 원소 소맥이 11만 4,000톤이나 무상으로 들어오고, 1960년대 중반 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원조 밀가루를 이용한 분식 장려 운동에 힘입어 국수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1960년대~1970년대까지 구포 시장은 공장에서 국수를 받아 부산 전역으로 팔러 나가는 아주머니들로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구포 국수는 상행 열차를 타고 밀양·청도 등으로, 여름철이면 모내기로 숨 돌릴 틈 없는 김해와 인근 대동 땅 농사꾼들의 새참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옛날에는 대동, 김해, 삼랑진, 청도 사람들이 구포장에 와서 채소와 과일을 팔고 국수를 사가지고 갔어요. 그 당시에는 김해·대동 쪽에도 많이 나갔어요. 결혼식 할 때도 답례품으로 국수를 줬어요. 생각해 보니 국수가 물 건너 제주도까지 건너갔네요. 그리고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박통 시절에 청와대가 한철 먹을 국수를 구포에서 사갔다고 해요. 대저에는 4~5월 달에 한창 많이 나갔어요. 논 주인들이 국수를 새참으로 내갔거든요. 이때는 아주 굵은 중면을 많이 사갔어요. 퍼지지 말라고. 배달 간다고 구포 다리 건너가면 계란 장수들이 기다리다 국수를 받아가요. 이 사람들이 경상도 일대를 돌며 국수를 판 거죠. 계란은 국수 고명이고 옛날에는 라면 양을 늘리려고 국수도 같이 넣어 먹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어쨌든 이때가 참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구포연합식품 대표 곽조길)
구포 국수, 땡초를 만나다
재료로서 구포 국수가 가진 특징은 간간하고 짭조름한 맛이다. 그렇다면 음식으로 구포 국수는 원래 어떤 맛이었을까. 조선 시대 국수, 그러니까 양반가의 잔치 국수는 고명은 색을 맞추기 위해 고추 장지[무장아찌]와 달걀 황백 지단을 채 썰고, 소금에 살짝 절여 볶은 호박채, 갖은 양념을 하여 볶은 고기채, 파채 등을 얹는데, 국수를 그릇에 놓고 고명을 중간에 놓은 다음, 다시 국수를 얹고 그 위에 고명을 한 번 더 놓는다. 그러고는 육수를 부어 차게 낸다.

하지만 난리 통에 처음 선보인 구포 국수가 이렇게 호사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구포 국수도 초록의 정구지[부추의 경상도 사투리], 검은 김, 갈색의 깨, 채 썬 노란 단무지 그리고 붉은 양념장이 어울려 한 그릇 밥상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포 국수는 언제부터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걸까.

“구포 국수가 원래는 이렇지 않았어요. 저희들 먹을 때는 신 김치 총총 썰어서 넣기도 하고 모친이 기분 좋으면 계란도 넣어 주셨어요. 집에서는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지 모르겠는데 국수만 전문적으로 하는 가게는 없었어요. 지금은 없어졌는데 구포역 앞에 함안집, 광복집에 가보면 국수는 선짓국이나 소고기국, 추어탕에 넣어먹는 부재료였어요. 제가 국수집을 다시 준비하면서 여러 군데 둘러봤는데, 국수 고명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정구지예요. 지금은 사대강 사업 때문에 많이 없어졌지만 낙동강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게 정구지였어요.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정월부터 9월까지 난다고 정구지라고 할 정도로 흔한 재료였어요. 그리고 부추는 국수가 줄 수 없는 씹는 맛을 주거든요. 물론 가격 면에서도 경쟁력이 있죠, 계절을 안타니까. 그리고 옛날에는 그렇지 않은데 요즘은 국수에 땡초를 많이 넣어요. 저도 국수하면서 배웠는데, 땡초가 비린 맛을 잡아줘요. 양념장에 넣으면 개운하기도 하구요. 제 혼자 생각이고 맞는 말인지 모르지만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손님들이 땡초를 많이 찾으시는 것 같아요. 땀 쫙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이원화 국수집 대표 이원화)
구포 국수 스타일의 완성, 멸치 장국
한국 사람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국물이다. 한 그릇에 담긴 밥상인 국수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먹은 음식에 대한 존경의 표시를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는 것으로 대신한다. 구포 국수 국물의 주재료는 뭐니 뭐니 해도 멸치다. 그런데 멸치는 100년 전만 해도 육수 재료로 쓰이지도 않았고 지금도 내륙 일부에서는 약간 비릿한 냄새와 쌉싸름한 내장 맛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해하고 가까우니까 육수 재료로 멸치가 자연스러워요, 그 비릿한 맛이. 저희 친구가 안동에서 건어물 상회를 해요. 근데 이 친구가 가게에 멸치 넣어 주는 게 제일 힘들대요. 이 사람들이 멸치 냄새가 나면 안 먹는대요. 사람들은 멸치 육수로 말아먹는 국수를 어려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멸치를 1시간 정도 달이는데 10분~20분밖에 안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는 다시가 안 우려 나는데 그만큼 멸치 다시가 익숙하지 않다는 거겠죠.”

(이원화 국수집 대표 이원화)

음식을 먹을 때 맛있다는 느낌은 감칠맛 때문인데, 그 원료가 되는 것이 글루탐산이다. 조선 시대 잔치 국수의 국물 재료인 쇠고기, 닭고기, 버섯 등은 대표적으로 글루탐산이 풍부한 음식이다. 물론 멸치에도 같은 성분이 들어있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멸치는 건조 기간이 짧아 부패하기 쉽고 특히 말려놓은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름 또한 업신여길 멸자를 써서 ‘멸어(蔑魚)’로 불렀다.

이런 멸치를 먼저 주목한 것은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온 일본인 어부들이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국물 및 사료로 멸치의 수요가 많았는데, 수출되지 못한 멸치가 조선에서 육수용으로 팔려나갔다. 그러다 멸치는 해방 이후 일본과의 국교 단절로 수출길이 막히자 전량 국내 소비로 전환되었다. 조선 시대나 해방 이후 그리고 1970년대 초반까지 쇠고기 같은 범상치 않은 국물 재료에 집착할 수 없었던 서민들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싼값에 시중에 풀린 멸치로 돌아섰다.

1970년부터 본격화된 외식 산업의 유행으로 구포 국수도 버젓한 가게에서 판매되는 상품이 되었다. 구포장과 인근 대동 안막장에서 국수집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였다. 안막 마을은 1920년대 낙동강변을 농지로 간척할 때 모여든 사람이 정착하면서 생겨났다. 1980년대까지 오일장이 들어서던 안막장은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상설 시장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옛날 장터를 건물이 둘러싸버려 주차장이 건물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안막장에서 번듯한 간판도 없는 가게를 60여 년간 꾸려온 주금동 할머니가 처음 국수집을 연 것은 1959년 여름이었다.

“친정이 여긴데 대신동으로 시집갔다 5년 만에 남편 죽고 친정으로 돌아왔어. 28살 먹은 과부가 두 살 된 딸을 업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먹고살 길이 막막하더라고. 들일로 밭일로 두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살았는데, 딸 맡길 때가 없어 곁에 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안막장에 밥집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를 업고 국수 한 그릇을 30원인가에 말아서 팔기 시작했지. 글쎄 처음에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국밥집에만 가더라니까…. 가게를 열면 손님이 올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러 가지 다해 봤어요. 국수 퍼지지 말라고 면하고 육수를 따로 내고 비린 맛을 없앤다고 육수에 땡초도 넣어보고 양념장에도 넣어보고. 내가 워낙 좋아하니까. 근데 희한한 게 비린내 없앤다고 만든 멸치 국수가 술꾼들 속 푸는데 더 좋은 거라. 그래서 멸치는 좋은 것만 쓸라고 남해, 진해로 사러 다녀. 국수 국물은 멸치를 많이 넣어야 맛이 좋아.”

(대동 할매 국수 주금동)

얼마 전까지 구포에 하나 남은 국수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쓴 할매 국수집의 상차림은 독특하다. 할머니 말처럼 마치 한여름 농사철에 논두렁에서 먹던 새참 같은 모양이다. 즉석으로 끓여먹는 국수는 대개 소면을 쓰는 데 반해 이 집 국수는 쉬이 불지 않는 중면을 쓴다. 게다가 육수를 부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양은 주전자에 따로 나온다. 지금이야 식당에서 파는 음식이 되어 버렸지만 새참 한 그릇 믿고 힘든 논일을 견디는 농부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불은 면발과 뜨끈한 국물을 먹이고 싶은 아낙네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녹아 있다.
지금 구포에는 구포 국수가 없다
“구포에 국수 공장이 가장 많았을 때가 1960~1970년대로 아마 30여 곳은 됐을 겁니다. 당시에는 대부분 가내 공장이어서 옥상이나 마당에서 국수를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지요. 그러다 소나기라도 내릴 때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두 일꾼이 되어 함께 국수를 거두어주곤 했어요.”

(구포연합식품 곽조길)

사람이나 음식에게나 그때 그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구포 시장에는 어디에도 국수를 내놓고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없다. 더 이상 구포는 교통 시설의 발달과 함께 이전의 곡물 집하장으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일거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과 그들을 보듬어 주던 주점, 식당, 여관 등도 함께 떠나갔다. 국수 공장이 자동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젊은 사람들 눈에는 밀가루 풀풀 날리는 반죽이나 날씨나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손 많이 가는 건조 공정은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해야 하는 힘든 작업이 되었다. 직원 한 명 기술자로 키우는 데 공을 들이기보다 차라리 널찍한 공장을 분할해 세를 받는 편이 적자를 면하는 방법이었다.

국수는 식재료이자 음식이다 보니 각종 「식품 위생법」, 「상표법」, 공장 등록 등 관련 법규가 까다롭고 사람들이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법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구포 국수에게 치명타는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환경의 변화이다. 낙동강 이편과 저편에 들어선 공단으로 인해 국수를 널어 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벌어진 구포 국수 상호를 둘러싼 법정 분쟁은 혈연과 이웃 간의 정으로 묶여 있던 제조업자들의 마음마저 갈라놓았다.
구포 국수, 다시 부산 대표 음식이 될 수 있을까
구포 국수는 현재 지리적 표시 단체 표장을 2012년 말 특허청에 제출한 상태이다. 부산에서는 이미 기장 미역, 기장 다시마, 금정산성 막걸리, 대저 토마토가 지리적 표시 단체 표장에 등록되어 있다. 구포 국수도 여기에 이름을 올리면 다섯 번째로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등록까지 보통 1년가량 걸린다고 하니 최소 2015년부터는 구포 이외에서 만들어진 국수 제품에 ‘구포’라는 지명을 쓸 수 없게 된다. 구포국수영농협동조합 오성환 대표는 “단체 표장 등록은 오랜 역사를 가진 구포 국수가 사라질 위기에서 다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구포 국수 공장 유치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포 유일의 국수 공장인 구포연합식품의 곽조길 대표의 각오도 남다르다.

“구포 국수라는 향토 명산물의 이름을 누군가는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면, 3대째 유일하게 구포에 남아 있는 인삼표가 그 역할을 해야지요. 디포리 육수와 현미, 검은콩 등을 넣은 건강식 구포 국수로 젊은 층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레시피를 만든다면 ‘구포 국수’ 브랜드를 보다 많은 소비자들에게 알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거북표 단독 상표에서 출발한 구포 국수는 잉어표, 인삼표, 방울이표, 붕어표, 범표, 광어표, 민어표 등 생산 공장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표장도 하나씩 늘어났다. 그리고 구포를 떠난 이들 업체는 여전히 구포 국수란 명칭과 로고를 사용하고 있다. 구포 국수의 지리적 상표 등록은 궁극적으로 이들 업체를 구포로 다시 불러 모을 것이다. 하지만 야심찬 계획과는 달리 현실은 녹녹하지 않다. 구포역 일대 도심 재개발을 통한 공장 부지 확보는 오를 만큼 오른 부산의 부동산 시세를 볼 때 지방 자치 단체 단독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무언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구포 국수집을 찾아가다 보면 아니나 다를까 원조집의 간판을 단 음식점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원조집은 없다. 난리 통에 찌그러진 양은 냄비는 흉내 낼 수 있을 지언정 그 시절의 절박함과 배고픔이 재현되지 않는 한 원래 구포 국수 맛을 복원할 방법은 없다.

‘구포 국수가 어떤 음식인가. 역사적으로 아픔을 내장한 음식이 아닌가, 동란에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 덕분에 구포 일대에 제분 공장이 서고 자연스레 국수집도 하나둘 생기지 않았나. 그런 쓰린 허기를 달랬던 음식을 구포도 아니고, 또 무슨 식재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몇 대에 걸쳐 가업으로 이어온 것도 아니면서, 구포 국수라고 우기니 환장할 노릇이다.’

(이상섭의 「다시 희망을-구포 국수」 중에서)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포 국수는 구포라는 지명에 방점을 찍기에 망설여지는 점이 있다. 구포의 강바람과 햇빛이 독특한 국수 맛을 만들기는 했지만 맛이란 것이 워낙 시대차가 있고, 개인의 격차가 큰 것이다. 구포가 아니면서 구포 국수라는 상표를 쓴다는 것도 무색하지만 굳이 구포만 되는 이유도 찾기 힘들다. 밀가루라는 이색적인 재료는 이미 대중화된 지 한참이고 멸치 육수로 평준화된 국물 맛에서 원산지를 특정하고 굳이 맛의 차별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런지 의문이다.

차라리 이참에 제대로 된 우리 밀 국수를 이 땅에 다시 번성시켜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MSG 조미료와 진짜 멸치 국물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의 미각을 염려해야 되지 않을까. 국수는 누구나 값싸고 간편하게 그리고 별다른 반찬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 전쟁 통의 절박한 상황이 만들어낸 한 그릇의 밥상, 구포 국수의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 있고, 기억되어야 할 것은 국수 한 그릇에도 만족과 포만감을 느끼던 그 시대가 아니겠는가.

취재가 막바지에 이르던 추석 연휴가 임박한 어느 날, 70년 전통의 국수 공장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달음에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달려간 공장은 외견상으로는 처음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안주인은 눈빛으로 2층 건조장에 올라가보라고 빙긋 웃는다. 햇볕이 차단된 작업장인지라 한눈에 알아챌 수 없었지만 부지런히 국수발을 건조대에 널고 있는 작업자의 실루엣이 예전과 왠지 달라보였다. 분명한 것은 조금 건장해 보이는 몸집은 확실히 2대 곽 사장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곽씨네 국수 공장의 3대 계승자였다. 부산의 모 대학 식품 영양학과를 올 가을 졸업할 이 집 장남이 두 달 전부터 건조실 일부터 가업을 전수받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반갑고 다행인 것은 이 바람직한 젊은이의 키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것이다. 구포 국수는 지금 100년 전통 명가에 도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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